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1월11일 제543호
3세 경영 시대, 지진 속의 재벌

재벌 3세 경영 일선에 등장하며 권력지도 바꾼다…덩치 큰 4대 그룹에서는 극도의 진통 겪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재벌 3세가 경영 일선에 잇따라 등장하며 재계의 권력지도를 바꿔놓고 있다. 지난해 말 그룹 인사에서 새로 등장했거나 파격 승진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3세, 선대로부터 지분을 넘겨받아 그룹 지배력을 강화한 예가 적잖이 눈에 띄었다.

삼성그룹 방계인 CJ그룹은 지난해 12월 이재현(45)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47)씨를 CJ엔터테인먼트, CJ CGV, 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부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장녀다. 앞서 지난해 10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입사한 조원태(29)씨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외아들로 역시 재벌 3세다.

현대그룹 방계인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해 12월 인사에서 정교선(31) 부장을 기획조정본부 기획담당 이사로 승진시켰다. 정 이사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아들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차남이다. 정 이사의 형인 정지선(33)씨는 이미 부회장직에 올랐으며 정 회장으로부터 주식 215만주(9.58%)를 물려받아 현대백화점 최대주주(15.72%)이기도 하다. 정 부회장은 1997년 과장으로 입사한 뒤 초특급 승진을 거듭하며 6년 만에 부회장직에 올랐다.

길게는 24년, 짧게는 10년 역사

역시 현대그룹 방계인 INI스틸 계열사인 BNG스틸에는 고 정몽우씨의 차남인 정문선(35)씨가 재정담당 이사로 영입됐다. 정 이사는 이미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형 정일선(35)씨와 함께 3세 경영 시대를 열고 있다.

국내 최대그룹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37) 삼성전자 상무는 그룹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등극한 데 이어 지난해 S-LCD(삼성전자와 소니의 합작사)의 등기이사로 뽑혔다. 아직 삼성전자의 등기임원으로 선임되지는 못한 상태임을 감안할 때 또 한 계단 오른 셈이다.

삼성과 쌍벽을 이루는 현대자동차그룹에선 정의선(35) 기아자동차 부사장이 2001년 초 상무, 2002년 초 전무, 2003년 초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리며 3세 경영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정 부사장은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외아들이다. 이 밖에 내로라 하는 재벌 그룹에서도 3세 경영인이 그룹 권력의 꼭대기에 올랐거나 고위 임원으로 대거 참여하고 있다.

국내 재계에 3세 경영 시대가 열린 것은 1981년,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그룹에서 창업주인 고 박승직씨의 장손인 박용곤(73)씨가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때였다. 두산그룹에선 이미 4세가 경영 일선에 활발히 나서고 있다. 박용곤 두산건설 회장의 아들인 박정원(43) (주)두산 상사BG 사장, 박지원(40) 두산중공업 부사장, 박용오(68) 두산그룹 회장의 아들인 박중원(36) 두산산업개발 상무, 박용성(65) 두산중공업 회장의 아들인 박진원(36) (주)두산 상무 등이 그들이다.


△ 삼성그룹은 3세 경영인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오른쪽)가 올 그룹 신년 하례식 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 연합)

4대 그룹은 총수 일가 지분율 낮아 고민

두산이 4세 경영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은 올해로 창업 109돌을 맞는 독보적인 연륜 때문이며 재계 전반의 형편과는 괴리가 있다. 이 때문에 3세 경영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4대 그룹(삼성·LG·현대자동차·SK) 중 하나인 LG가 구본무 회장 시대를 연 1995년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3세 경영이 길게는 24년, 짧게 보면 10년의 역사를 축적한 셈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3세로 경영을 넘기는 과정에서 4대 그룹과 그 아래쪽 그룹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덩치가 큰 4대 그룹에선 소유·경영권 이양에서 극도의 진통을 겪을 뿐 아니라 아직 미완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아래쪽 그룹에선 이양 과정이 비교적 원활한 편이며, CJ그룹처럼 3세가 이미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등 권력 이양을 마친 예가 적지 않다. 이재용 상무를 둘러싼 탈세 논란, 현대그룹이 겪은 ‘왕자의 난’ 같은 권력 이동 과정의 뜨거운 쟁점이 아래쪽 그룹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하위 그룹이 여론의 주목을 끌지 못한 탓도 없지 않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소유 지분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4대 그룹은 다른 기업 인수와 증자를 통해 덩치를 키우는 과정에서 창업주 일가의 지분이 희석된 예가 많아 3세로 넘기는 데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반면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그룹에서는 총수 일가의 지분이 높게 유지되고 있어 경영을 넘겨주는 게 쉬운 편이다.”(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 기업 역사가 가장 짧은 롯데그룹은 아직 2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2세 후계자인 신동빈 그룹 부회장.

실제, 2003 회계연도 결산 기준 대기업집단의 총수 일가(총수, 배우자, 혈족 8촌, 인척 4촌) 지분율을 보면, 삼성 4.71%, 현대자동차 4.75%, SK 2.04%에 지나지 않는다. 4대 그룹 중 총수 일가 지분이 높은 LG그룹의 경우도 7.82% 수준이다. 반면 그 아래쪽 그룹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CJ 17.73%, 효성 23.82%, 신세계 26.95%, 현대백화점 23.47%, 현대산업개발 16.93%, KCC 40.56% 등으로 높은 편이다. 하위 그룹에서 두산 4.37%, 한화 3.50%, 한솔 5.30% 등 낮은 예도 있지만, 오랜 역사로 4세로 넘어가고 있거나(두산) 맹렬한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운 예외적인 경우다.

4대 그룹으로선 취약한 지분 구조 탓에 계열사들끼리 얽히고설킨 순환출자를 통해 지배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고, 다음 세대로 넘기는 과정에서 갖가지 변칙 수단을 동원해야 할 처지인 셈인데, 4대 그룹 내부에서도 3세 경영의 속사정은 그룹별로 많이 달라 눈길을 끈다.

LG는 순탄, SK는 아직 진입도 못해

LG그룹은 지난 1995년 가장 먼저 3세 경영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과정도 비교적 순탄했다. 외환위기 이전이어서 지배구조에 대한 외부의 감시 눈길이 많지 않았던 게 한 이유다. 창업주 일가의 지분율은 높지 않으나, 80여명의 친족 주주(동업자인 허씨 일가 포함) 지분을 합하면 경영권을 지켜내는 게 어렵지 않다는 든든한 배경도 있다. 친족 주주들로 이뤄진 ‘가족회의’에서 의사 통일만 이루면 무난하게 경영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구조다.

LG에선 현재 구본무 회장의 삼촌인 구자용 E1(옛 LG칼텍스가스) 사장, 구자균 LG산전 부사장 등 2세가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구본무 이후’(4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딸만 둘인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11월 구광모(26)씨를 양자로 입적했다. 구씨는 구 회장의 동생인 구본릉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로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인스티튜트 공과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지금은 국내 정보기술(IT) 솔루션 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양자 입적은 구자경 LG 명예회장을 비롯한 구씨 일가의 가족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후계 구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구광모씨는 지난해 9월 말 현재 그룹의 지주회사인 (주)LG의 지분 233만8천주(1.35%)를 보유하고 있다.


LG그룹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경영 일선에 여성 3세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삼성그룹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그룹 관계자는 “본인 나름의 사업을 한다든지 회사에 입사한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여자 후손들이 경영 참여를 한 적은 한번도 없다”며 “유교적인 가풍 때문인 듯하다”고 말했다.

SK는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아직 3세 경영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다. 최태원(45) 회장은 창업주인 큰아버지 고 최종건씨를 거쳐 아버지 고 최종현 회장한테서 물려받은, 이른바 2.5세다. 최 회장의 세 자녀는 아직 경영에 참여하기엔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총수 일가의 취약한 지분 구조로 보아 경영권을 이어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덩치 큰 다른 기업들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규모를 키움으로써 총수 일가의 지분이 묽어진 데 따른 부메랑을 맞고 있는 셈이다. 영국계 사모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를 표적으로 삼아 경영권 도전을 선언한 게 우연이 아니다.

3세 경영을 바라보는 눈길이 집중되는 곳은 역시 삼성그룹이다. 국내 최대 그룹인데다 3세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그룹 소유권을 넘겨받는 과정의 탈세 논란 등 대형 이슈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상무는 상무보에서 승진한 지 올해로 3년째로 접어들고 있어 올 초 사장단·임원 인사에서 승진할지 여부에 재계의 눈길이 쏠려 있다.

삼성, 이재용 장악력 떨어질 듯

이 상무는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의 최대주주(25.10%)로 올라 있지만, 지분 취득 과정을 둘러싼 법적 시비가 아직 진행되고 있어 뜻밖의 암초를 만날 수 있다. 재계 안팎에선 이 상무의 경영권 승계는 무난할 것으로 보면서도 그룹 장악력은 2세인 이건희 회장 때와 크게 다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그룹 전체에 대한 지분 장악력이 취약한데다 계열사의 자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법·제도적 환경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대자동차 그룹 후계자는 정의선 기아자동차 부사장이다. 정의선씨가 2001년 3월 고정주영 명예회장의 영정을 들고 청운동 빈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그룹을 통할하는 총수가 그룹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려고 하더라도 한 계열사의 이익을 해치는 방식이라면 해당 계열사 경영진이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배구조 개선에 따라 해당 계열사 경영진이 주주 이익과 배치되는 결정을 내리면 감옥에 갈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김진방 교수) 여기에 이재용 상무가 벤처기업인 e삼성을 운영하다가 쓴맛을 본 경영 실패의 경험도 리더십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 때문에 ‘이건희 이후’의 삼성은 총수보다는 이미 갖춰진 삼성 나름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해지고, 계열사의 자율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란 관측이 많다.

삼성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LG와 달리 여자 후손들의 경영 참여가 활발한 편이라는 점이다. 고 이병철 회장의 딸인 이인희 한솔 고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등 2세뿐 아니라 이건희 삼성 회장의 딸인 이부진(35) 호텔신라 상무보·이서현(32)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33) 조선호텔 상무 등 3세 경영인도 적지 않다.

그룹 통수권이 3세로 넘어가는 과정의 진통은 현대자동차그룹도 삼성그룹 못지않게 진하게 겪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02년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모비스와 비상장 계열인 본텍(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씨가 지분 30%로 최대주주인)의 합병을 통해 의선씨를 현대모비스 주요 주주로 내세우려는 시도를 하다 반대 여론에 부딪혀 중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아직 그룹의 최고경영권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최대주주로 올라 있는 것과 견줘 한참 늦은 셈이다. 총수일가의 지분 구조가 취약하다는 점에서는 삼성이나 현대차에 별 차이가 없음에도 일찌감치 소유·경영권 이양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준비해온 삼성과 그렇지 못했던 현대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 LG그룹은 구본무 회장(왼쪽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으로 일찌감치 3세 경영 시대를 연 반면, 현대자동차 그룹(회장 정몽구, 오른쪽 사진)은 3세 이양 과정에서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두 그룹의 올 초 시무식.

현재 기아자동차 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정의선씨는 미국에서 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일본계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근무하다 1999년 말 현대자동차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한 뒤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정일선 BNG스틸 부사장,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과 함께 ‘왕회장(고 정주영 창업주) 손자 3인방’으로 꼽힌다.

CJ그룹의 이재현 회장, 가장 안정적

재벌 3세 중 가장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로는 CJ그룹의 이재현 회장을 꼽을 수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장손인 이 회장은 2002년 회장직에 올랐으며 잡음 없이 그룹을 비교적 무난하게 이끌고 있다는 평이다. CJ는 삼성에서 분리되던 1995년(당시엔 제일제당) 매출 규모가 1조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8조원을 넘어섰다. 순이익 규모가 수십억원 수준에서 10년 사이에 무려 5천억원 안팎으로 커질 정도로 내실도 다졌다. 이 회장은 CJ 23.49%를 비롯해 그룹 전체의 지분의 17.45%를 장악하고 있어 소유·경영권 모두 확고한 편이다. CJ 관계자는 “이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 생전 서울 장충동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며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고, 장손이란 자부심이 강하다”고 귀띔했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아들 3형제인 (주)효성의 조현준(37) 부사장·조현문(36) 전무·조현상(34) 상무의 소유·경영권도 비교적 안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삼형제 모두 6~7%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형제 사이의 분란만 없다면, 외부의 경영권 도전을 막아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룹 관계자는 “삼형제가 임원회의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며 “세 아들 중 누구한테 경영권을 넘겨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기업 역사가 짧은 롯데그룹에서 이제 막 2세(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50) 부회장)로 경영권 이양이 이뤄지고 있을 뿐, 대부분의 그룹에서는 이처럼 2세 → 3세의 권력 이동이 활발하다. 1896년 한국 재계의 출발점인 ‘박승직 상점’이 문을 연 지 100여년, 국내 첫 제조업체인 제일제당이 가동을 시작한 1943년 이후 60여년을 거친 한국 재계가 또 한번의 고비를 맞고 있는 셈이다.


능력있고 잘생기고…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재벌 2·3세…경영권 세습 당연하게 묘사해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재벌 2·3세는 흔히 여자 주인공의 구세주로 표현되기 일쑤다. 돈 많고 능력 있는 터에 얼굴까지 잘생긴…. 또 전문성 검증 없이 오너(대주주)의 아들이나 손자라는 이유로 경영권을 물려받는 일을 당연하게 묘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SBS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파리의 연인>, 한국방송의 <그녀는 짱>, 지난 2001년 방영된 문화방송의 <호텔리어>, 2000년 SBS의 <줄리엣의 남자> 등이 그런 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11월 “기업경영 활동을 다룬 드라마의 내용을 모니터링한 결과 기업지배 구조 및 기업공시 제도에 대한 왜곡 사례가 다수 나타났다”고 지적한 뒤, 이런 뜻을 한국방송작가협회와 방송3사에 전달했다. 당시 금감원의 모니터링은 경영권 분쟁 등 기업 경영활동을 다루는 과정에서 주주총회·이사회의 역할·권한을 혼동하고 왜곡한 것을 주로 지적한 것이었는데, 재벌 2·3세의 경영권 향방과 관련되는 부분도 많았다.

예컨대 탤런트 박신양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 기주(GD자동차 대표이사)와 비서실장의 대화 한 토막을 보자. 경영권 다툼의 와중에서 기주가 “최 이사가 만나는 사람이 몇명이라고?”라고 물은 데 대해 후배사원 승준은 “현재까지 한 열서너명 정도 되고, 모두 우리 회사 소액주주들…”이라고 답한다. 최 이사가 악의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 제몫찾기를 위한 소액주주 운동을 부정적으로 비치게 한다.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기존 경영진의 시각이 일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세부적인 사항을 제쳐두고라도 각종 드라마에서 전반적으로 재벌 후손들을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일반인들이 재벌 2·3세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보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텔레비전 드라마임을 감안할 때 재벌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작가로 활동했던 강은정씨는 이에 대해 “드라마에서는 역사나 인물을 보여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통속적인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주인공을 긍정적으로 설정하는 예가 많다”며 “르포나 사실 전달과는 다르게 봐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의 연인>에선 탤런트 이세창이 연기한 나쁜 이미지의 재벌 2세도 설정돼 있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