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전하는 긴급 뉴스를 보면서도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살 썩는 냄새 맡으며 해변을 달리다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댄 타이 남부 무슬림 지역인 빠따니(Pattani) 나라티왓(Narathiwat) 얄라(Yala)는 2월 초 총선을 향한 선거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이 1월4일 타이 정부군 사령부 공격 1주년을 맞아 다양한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아 심상찮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난 1년간 500명 넘는 이들이 살해당한 그 분쟁 현장에서 이미 긴장감이 목 밑까지 파고든 내게 쓰나미쯤은 별 감흥을 줄 만한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12월27일 자경대원 2명(얄라), 경찰 3명(나라티왓), 그리고 12월28일 교사 1명(얄라), 군인 2명(딱바이)이 ‘누군가’의 폭탄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현장을 드나들던 내게 쓰나미는 여전히 딴 세상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12월28일 오전, 쓰나미에 당한 희생자가 수만명을 넘어섰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고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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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나미는 불교의 땅 타이를 상징했던 부처를 포함해 인간의 모든 영역을 시험했다. (사진/ 정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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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9일 새벽, 나는 분쟁 취재를 잠시 접고 타이 남부 거점도시인 핫야이(Hat Yai) 공항으로 달리면서 강박감에 시달렸다. ‘인재(human disaster)인 전쟁과 천재(natural disaster)인 쓰나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쟁의 본질이 정치였다면, 쓰나미의 정체는 무엇일까?’
푸껫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쓰나미는 내게 가당찮은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구호물자를 실어나르는 수송기들이 꼬리를 물고, 각국에서 파견한 구조요원들이 공항 청사를 빼곡히 메운 틈새에서 나는 어리벙이가 되고 말았다. 지난 10여년 동안 방콕 베이스에서 각종 취재를 위해 푸껫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만, 한발 늦게 취재 현장에 도착한 탓이었다. 시간을 다투는 긴박한 취재 현장에서 다른 기자들의 꽁무니를 쫓을 때 느끼는 일종의 낭패감 같은 것이었다.
푸껫은 나라 안팎에서 각종 구호·구조단체가 밀어닥친 탓에 호텔도 자동차도 모조리 만원이었다. 어렵사리 방을 잡고 자동차를 빌린 뒤, 기사를 닦달해 현장으로 달렸다. 쓰나미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팡응아(Phang Nga) 지역을 향해 푸껫에서 120km 지점까지 북상 취재를 시작했다. 푸껫-팡응아 길은 구급차량과 구호물자 운송 트럭들로 곳곳이 심하게 밀렸다. 푸껫과 팡응아를 잇는 사라신 연륙교를 지나 팡응아로 접어든 뒤 타이무앙(Thai Muang)을 지날 무렵 차창으로 살 썩는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가 후끈하게 밀려들었다. 왓라켄(Wat Raken)이라 부르는 불교사원 뜰이 주검들로 뒤덮여 있었던 탓이다. 이번 쓰나미 공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근 카오락(Khao Lak) 지역 사망자 주검들을 이 왓라켄 마당에 늘어놓고 신원 확인작업을 하고 있었다. 12월26일 쓰나미가 할퀸 첫날 이미 320구에 이르는 주검들이 왓라켄에 도착했고, 사흘째인 12월29일에도 새로운 주검들이 속속 밀려들고 있었다. 그 사이 신원을 확인한 주검들은 화장했지만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은 150여구는 여전히 마당에 늘어놓은 상태였다. 그 주검들은 대부분 외국인, 주로 서양 관광객들이었다. 물이 차 퉁퉁 부어오른 주검들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상처 입은 얼굴들, 일그러진 표정들, 팔다리를 쳐든 몸짓들을 통해 주검들은 저마다 고통스러웠던 최후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라크나 아프간도 이러진 않았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죽어나간 주검들을 보아왔고 또 필요에 따라 그이들을 매만지기도 했다. 그래서 수천구의 주검이 밟히는 땅에서도 눈도 깜짝 안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백컨대 이번 쓰나미에 당한 주검들 표정만은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토록 흉측하게 일그러진 표정들을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쓰나미에 할퀸 주검들에서는 총 맞아 죽은 주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평온한 기운 같은 걸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전쟁터 주검들은 이번 쓰나미 주검들에 비해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고통스런 모습을 한 주검들이 사원 한켠에서 안식을 기다리고 있다. 타이무앙의 왓라껜에서. (사진/ 정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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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들이 풍긴 냄새는 옷에도 담배에도 물에도 녹아들어 긴 여운을 남기며 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렇게 허파에서도 머리에서도 심장에서도 되올라오는 여운을 달고 들어선 카오락 해변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멀린리조트’와 ‘에메랄드리조트’ ‘브리자드리조트’가 모여 있는 지역은 마치 융단폭격을 받은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사실 핵폭탄을 제외하고는 어떤 대형 폭탄을 동원한 공습도 이렇게 한 지역을 초토로 만들어버린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악명 높은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이 직접 때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현장도 카오락처럼 구겨지지는 않았다.
멀린리조트는 언덕에 올라앉아 본체 건물은 그나마 화를 면했지만, 나머지 해변에 자리잡은 에메랄드리조트와 브리자드리조트는 완파당한 채 흙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 80%에 이르는 희생자들이 외국 관광객인 탓에 각국은 푸껫에 비상조직을 가동해 자국 피해자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사진/ 정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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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락 해변은 인적이 끊겨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많은 관광객을 맞았던 이 고요한 카오락 해변은 사흘 전 그 악몽을 감추기라도 하듯 예전보다 더 잔잔한 파도를 일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바다는 옛날의 바다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바다를, 그 파도를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산더미처럼 덮쳐오는 쓰나미 환영에 휩쓸렸다. 한번 쓰나미가 휩쓸고 간 그 바다의 아픈 기억은 더 이상 심리적인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 쌀랑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무전이라도 쳐줬더라면…”
카오락 해변에서 낭통(Nang Thong) 해변과 쿡칵(Khuk Khak) 해변을 따라 올라가는 2차선 양쪽 도로는 구조·구호차량들로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곳곳에 자리잡은 호텔과 리조트들은 카오락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폐허였다. 길바닥 모퉁이마다 새로 건져올린 주검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주검들이 뿜어내는 냄새는 해거름 길 천지를 진동했다. 복구단체들과 구호단체들은 해가 지고도 바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자가발전기를 장착한 특수차량들이 밤을 밝히는 동안 주검들을 다듬는 자원구조대들의 눈빛은 붉게 물들어갔다. 표정 잃은 구조대원들의 얼굴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 벌어져온 그 어떤 사연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이들은 기계적으로 주검을 건져올리고, 주검을 손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포텍텅’이라는 유명한 민간구조대에서 10년 가까이 일해온 킷티삭(36)은 “너무 피곤하고, 너무 지쳤다. 10년 동안 각종 사고로 숨진 주검들을 만져왔지만, 이번에 처음 세상이 허무하다는 걸 느꼈다”며 자신이 받은 충격을 털어놓았다.

△ 자연에 순순히 굴목하고 맹종하는 법칙을 배우는 일만 남은 것일까. 해일은 자동차와 호텔까지 산산히 구겨 놓았다. (사진/ Rex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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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공격을 받은 뒤 나흘째인 12월30일, 푸껫섬 빠똥(Patong) 해변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열렸다. 몇몇 주민들은 쓸 만한 물건들을 건지겠다며 해변을 거닐었고, 한 서양 늙은이는 건강을 생각하며 해변가를 달렸다. 그 바닷가와 마주 앉은 빠똥 거리는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고 허물어져 있었다. 서양제 ‘맥도널드’도 ‘피자헛’도 ‘하겐다즈’도 그리고 일본판 ‘젠’도, 또 타이식 웃음을 흘리던 그 많던 술집들도 모조리 무너져버렸다. 은행도 우체국도 살아남지 못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언덕을 끼고 있는 빠똥 해변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까닭을 빠똥 해변 경찰관 솜삭은 이렇게 설명했다.
“경찰을 포함해 모든 정부 관리들이 월급 받는 일에만 정신이 팔렸지, 아무도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너진 건물들이야 다시 세우면 그만이지만, 사람 생명은 어떻게 하나. 바다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산상 경찰 관제소에서라도 우리에게 무전을 쳐줬더라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솜삭은 이번 쓰나미 비극이 부패한 관료집단 탓이라고 자신이 포함된 경찰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나는 승진시험에 두번이나 합격했는데, 그게(돈) 없으니 아직도 이 꼴이야.”
복구에도 ‘탁신 방식’이 있다?
솜삭에 따르면, 빠똥에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직전 갑자기 바다쪽으로 2km 지점까지 물이 빠지자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그 해변으로 몰려나갔다고 한다. “사실은 그때 사람들을 산쪽으로 대피시켰어야 하는데, 그 상황을 진단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 그리고 거대한 물살이 소용돌이치면서 다시 해변쪽으로 몰려왔고 곧장 파고 10m에 이르는 쓰나미가 두번 빠똥을 강타했다.”

△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이 몰려드는 푸껫행정청의 실종신고센터. (사진/ 정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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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껏 두번의 파도에 두들겨맞고 빠똥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빠똥 북부 까말라(Kamala) 해변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공부한다던 까말라 초등학교, 바다를 마주 보는 10m 거리에 자리잡은 이 학교는 쓰나미로부터 최초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완파당했다. 본관 콘크리트 건물도 1층은 완전히 뚫렸고 2층만 아스라히 버텨고 서 있다.
“학생 700명에 선생 20명인 이 학교가 이 모양인데, 교육감은 무조건 1월4일까지 개교하라는 명령을 내리니….” 교감선생 뿌리차 뿌엔락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야. 일요일 아침이어서 학생도 선생도 모두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 말야. 만약 그게 월요일에서 금요일 사이 아침이었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졌겠지.”
학교 시설은 폐허가 되었지만, 선생 1명과 학생 1명이 사망하는 선에서 그친 이번 쓰나미에 뿌리차 선생은 거듭 행운을 강조했다. 그러나 문제는 복구다. “복구비용도 주지 않고 말로만 최선을 다하라고 하니…. 하는 수 없이 내 돈 들여 재료 사고 물 사고 음식 사서 학생들 데리고 와서 이 학교 건물을 복구하고 있는 중이야.”
푸껫기술학교 교사인 마닛은 교육당국과 정부에 거칠게 쏘아붙였다. “이게 탁신(Thaksin) 총리 방식이고, 정부 행태야. 무조건 말로 다 때우는 거야. 말로는 뭐든 할 수 있지…. 초등학교 아이들 700명이 공부하는 이 학교를 정부가 복구하지 않으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이 폐허 판에 일주일 뒤부터 학교를 다시 열라고 하니, 대체….”

△ 자원봉사자들이 푸껫 인근의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고 있다. (사진/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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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현재 푸껫에 머물고 있는 탁신 총리가 지난 밤 고위관리들에게 100만밧(약 3천만원)을 주겠다며 큰소리쳤던 사실을 놓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만신창이가 된 푸껫을 둘러보고도 그걸 지원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마저도 고관들이 다 나눠먹을 텐데….”
신마저 무너져버린 그 땅
‘탐욕을 부리지 말라’고 가르쳤던 부처님도 쓰나미 앞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까말라 초등학교와 나란히 서서 해변을 바라봐왔던 왓까말라(Wat Kamala) 사원도 거센 쓰나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쓰나미는 그렇게 종교를 포함해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휩쓸어갔다. 안녕을 빌며 신을 좇던 인간의 의지마저도 쓰나미는 산산이 부숴놓고 말았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깨트려버렸다. 신마저 무너져버린 그 땅에서 인간은 이제 누구를 향해 기도를 올릴 것인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또 다른 방법은 없다. 신도 대신해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제 시간이 왔다. 자연에 순순히 굴복하고 맹종하는 법칙을 배우는 일만 남았다. 그 자연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또 자연이 아니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통하는 방법을 지금이라도 익혀나간다면, 그 자연은 나와 한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제공할 것이라 믿으며 취재를 마쳤다. 그리고 전쟁도 쓰나미도 모두 인간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이 기사를 마치는 12월31일 금요일 오후 8시 현재, 타이에서 쓰나미로 인한 희생자 수는 총 4541명에 이르고, 그 수는 머잖아 7천여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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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주검을 손수 화장하다
여행 왔다 끔찍한 일 당한 스위스 여의사 푸레이… 다른 중상자 무시할 수 없어 의료지원도

△ 애인의 주검을 손수 화장하는 스위스 여인 페트리 프레이. 흐느끼면서도 긴 대나무 막대로 애인의 주검을 구석구석 돌려가며 정성스레 태웠다. (사진/ 정문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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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보고 있나?”
화장(火葬)을 하다 말고 다가온 그녀는 모질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피해의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쓰나미는 이 고운 여자의 영혼마저 강타했던 모양이다. 말을 트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말 대신 그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교감을 시도했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페트리 푸레이(Petri Frey·36)라는 이 스위스 여자는 함께 왔던 애인을 쓰나미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그녀가 낙원이라 여겼던 푸껫은 애인의 주검을 손수 화장하는 지옥으로 변했다.
“내 손으로 그이를 태우게 될 줄이야….”
기어이, 그 고운 눈망울에 물기가 맺히고 만다.
애인을 잃고도, 자신의 직업이 의사인 탓에 차마 다른 중상자들을 무시해버릴 수 없어 의료지원에 나섰던 푸레이는 쓰나미 공격 3일 뒤인 12월29일 오후에 홀로 애인의 주검을 태우기 시작했다.
“함께 왔으니 돌아갈 때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이가 바다를 좋아했으니 일부는 여기 바다에 뿌리고 일부는 내 품에 안고….”
푸레이는 말을 잊지 못했다. 지난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맥주로 끼니를 대신하고 있다는 그녀는 흐느끼면서도 긴 대나무 막대로 애인의 주검을 구석구석 돌려가며 정성스레 태웠다.
“난 그래도 행운이야. 그이가 남긴 재라도 함께 돌아갈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말야. 부디, 그이들을 도와줘.”
푸레이는 그렇게 참한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참한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난 여기 좀더 머물면서 의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해야 해.”
거센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어느 건물의 한 모퉁이에 끼여 상처도 없이 살아남았던 자신을 “다른 이들을 돌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푸레이에게서 사람이 쓰나미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보았다.
언제든 다시 되돌아올 쓰나미, 그 자연 현상을 거부할 수 없다면 사람은 그와 친숙해지는 방법을 빨리 깨닫는 수밖에 없다. 그 쓰나미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기에 가린 푸레이를 두고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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