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6월09일 제513호
“정몽준 독재, 이러단 망한다”

축구계의 ‘야인’ 조광래 · 신문선 대담… 축구협은 프로리그 육성 같은 축구 저변에 투자해야

구리= 정리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축구 담당 기자들은 조광래(50) 서울FC 감독과 신문선(46) SBS 해설위원을 국내 축구계의 대표적 ‘야인’으로 꼽는다. 그들만큼 축구협회를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던지는 축구인이 없기 때문이다. 조 감독은 지난 2001년 정몽준 축구협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 파동’에 가담해 파문을 일으켰고, 신 위원은 언론매체를 통해 줄곧 축구협회의 개혁을 외치고 있다. ‘메추 사태’로 축구계가 어수선했던 지난 6월5일 경기도 구리시 LG챔피언스파크에서 두 ‘야인’이 만나 한국 축구의 미래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 축구계의 '재야인사'로 불리는 조광래 감독과 신문선 해설위원이 지난 6월5일 LG 훈련장에서 만나 한국 축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감독만 바꾸면 능사인가

신문선(이하 신)=먼저 2002 한-일 월드컵부터 평가해보자. 월드컵 4강 신화를 얘기할 때 거스 히딩크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히딩크는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우쳐줬다. 그의 새로운 리더십은 축구뿐만 아니라 기업과 학계, 정부 등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광래(이하 조)=히딩크는 대표팀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축구철학을 100% 관철하기 위해 꾸준히 밀고 나갔다. 지도자는 그런 품성이 필요하다.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배워야 한다. 그의 월드컵 준비 과정을 보면 매우 치밀했다. 월드컵 첫 경기서부터 마지막 경기까지 누구를 어떤 포지션에 기용할지 등을 미리 구상하고 그 시나리오에 맞게 연습을 했다. 히딩크는 또 한국 선수에 맞는 전술을 개발했다. 그는 처음에 유럽에서 유행하는 ‘4백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 수비 방식이 당시 한국 선수들에게 잘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3백’으로 고쳤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뒤 과감하게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선수를 다루는 방법도 뛰어났다. 카리스마를 내세우면서도 선수들과의 친밀감을 중요시했다.

신=하지만 2002 월드컵을 평가할 때 히딩크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4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먼저 우리 선수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황선홍과 홍명보 등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다. 또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고 국민들의 성원도 있었다. 히딩크의 고액 연봉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한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축구계의 희생이 있었다. 프로리그가 파행되는 것을 무릅쓰고 대표팀 선수 차출에 기꺼이 응한 프로축구단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가 훌륭한 지도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정부나 국민, 축구계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4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2 월드컵을 평가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내 언론과 축구계가 자꾸 히딩크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마치 대표팀 감독만 잘 뽑으면 한국 축구가 잘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을 지금 축구협회가 하고 있다. 대표팀 감독을 바꾼다고 해서 한국 축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조=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팀 전력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아야 20% 정도다. 물론 이 수치는 작지만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감독 영입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히딩크가 아니라 히딩크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해결이 안 된다. 2002년 때처럼 정부나 축구협회가 대표팀 감독에게 ‘올인’할 상황도 아니고 또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축구협회가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갖고 대표팀 선수 육성에 나서야 한다. 내가 보기에 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는 좋은 선수들이 안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프로리그(K리그)를 봐라. 각 팀의 스트라이커는 대부분 ‘용병’들이다. K리그의 득점 선두 1위부터 4위까지가 모두 외국 선수들이다. 뛰어난 ‘토종’ 스트라이커가 없으니까 대표팀이 강해질 수 없는 것이다. 축구협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뛰어난 신인 선수 육성이다.

구단이 자기가 키운 선수를 못 뽑으니…


◁ 신문선_ 축구협회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곳에만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정상적인 축구 행정은 유소년 선수 육성에서부터 순서대로 집중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축구협회의 행정 마인드는 거꾸로 돼 있다. 맨 꼭대기의 대표팀에만 지원이 집중돼 있다. 피라미드가 거꾸로 서 있는 셈이다.

신=그렇다. 축구협회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엉뚱한 곳에만 돈을 낭비하고 있다. 축구의 저변을 피라미드에 비유할 수 있는데, 유소년 축구가 가장 밑에 있고 중·고교와 대학팀, 실업팀리그(K2리그), 2군리그 그리고 프로축구리그 순이고, 맨 위 꼭지점에 대표팀이 있다. 정상적인 축구 행정은 유소년 선수 육성에서부터 순서대로 집중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축구협회의 행정 마인드는 거꾸로 돼 있다. 맨 꼭대기의 대표팀에만 지원이 집중돼 있다. 피라미드가 거꾸로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대표팀 밑에 있는 한국 축구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움베르토 쿠엘류가 “연습이 부족했다”고 토로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생각해보라. 대표급 선수들이 연습 부족이라는 게 말이 되나. 유소년 축구에서부터 제대로 된 훈련과 경쟁을 통해 선수를 육성하면 기본기가 잘 갖춰진 훌륭한 대표팀 선수가 나온다. 그러려면 국내 프로리그 최우선 정책이 펼쳐져야 한다. 프로리그의 경기 수준이 높으면 관중이 많이 몰리고 그에 따라 선수들의 몸값이 높아진다. 어린 선수들은 국내 프로리그에서 성공하면 고액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실력을 갈고 닦는다. 결국 프로리그에는 우수한 선수가 몰리게 되고 여기서 선발된 선수는 정예 대표팀 선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축구에도 시장경제 원리가 적용돼야 한다. 시장경제의 원리가 바로 세계 축구의 흐름이다. 유럽의 강호들을 보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모두가 국내 리그 최우선 정책을 쓰고 있다.

조=지난 6월2일 터키와의 1차 평가전이 끝난 뒤 터키 선수가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 대해 ‘볼 컨트롤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고 한다. 정말 창피한 얘기다. 한 나라의 대표급 선수가 그런 평가를 받아서야 되겠는가. 그만큼 우리의 선수 육성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얘기다. 우리 팀은 3년 전부터 중학교를 졸업한 15∼16살짜리 선수를 뽑아서 훈련하고 있다. 프로구단의 우수한 시설과 최고 수준의 코치진 밑에서 기본기를 훈련하고 있는데 이들의 성장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이런 속도로 성장하면 대표팀 선수가 됐을 때 세계적인 선수들과 당당히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키운 선수들을 우리 구단이 뽑을 권리가 없다. 축구협회가 지난 2002 월드컵 직전에 신인 선수 선발제도를 드래프트에서 FA로 바꿔버려서 구단이 자기가 키운 선수에 대한 연고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프로구단이 선수를 육성하지 않게 된다. 자기 선수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데 뭣하러 자기 돈 써서 선수 육성하나. 외국에서 공 잘 차는 용병 하나 뽑아오면 되지. 축구협회가 선수 육성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


△ 지난 5월10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이란의 올림픽 예선전에서 축구팬들이 축구협회를 비난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축구협이 프로팀 감독을 바꾼다고?

신=신인선수 선발제도는 축구에서는 일종의 법인데, 그런 중요한 결정이 축구협회의 단 한 사람의 ‘독단’에서 나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축구인을 상대로 한 공청회도 없었고 프로팀 감독들의 의견도 완전히 배제됐다. 축구 관련 ‘법’을 만드는 이사회는 군사정권 때의 국회처럼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다.

조=대표팀 차출도 엉망이다. 도대체 프로리그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한번 선수들 차출됐다 들어오면 팀이 어수선해서 훈련이 잘 안 되고 당연히 경기의 질도 떨어진다. 그런 경기를 돈 내고 보러 오라고 하면 팬에 대한 모독 아닌가.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뛸 수 없는 선수들은 구단에 다시 복귀해야 한다. 그래야 프로팀도 살고 대표팀도 산다.

신=프로팀이 적자를 보면서 선수를 육성해놨는데, 축구협회가 무상으로 뽑아가면서 고맙다는 말도 안한다. A매치 한번 개최하면 관중 수입과 스폰서 수익, 광고 수입 등 엄청난 돈이 생기는데, 협회는 그 돈을 프로리그 육성 같은 축구 저변을 위해 쓰지 않는다. 프로리그를 활성화해서 프로팀을 운영하는 기업들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하는데 그걸 안 한다. 그러니까 축구협회가 축구인들로부터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축구인 출신인 조중연 부회장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한다. 왜? ‘정치인’ 정몽준 회장에게 충성해야 하니까. 지금 축구협회는 정 회장 1인을 위한 행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60∼70년대 군사문화를 방불케 한다.

2002년을 잊을수록 희망이 보인다


▷ 조광래_ 축구협회가 쓴소리는 아예 듣지도 않는다. 지난 2001년 서명 파동 때 조중연 당시 전무가 우리 단장한테 전화를 해서 “다음 시즌부터 감독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정 회장 퇴진 성명서에 서명한 나를 쫓아내라는 얘기다. 어떻게 축구협회 간부가 프로팀 단장에게 그런 전화를 할 수 있나. 그러다간 정말 한국 축구 망한다.

조=축구협회에 서비스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하나의 권력기관이 돼버렸다. 쓴소리는 아예 듣지도 않는다. 지난 2001년 서명 파동 때 조중연 당시 전무가 우리 단장한테 전화를 해서 “다음 시즌부터 감독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정 회장 퇴진 성명서에 서명한 나를 쫓아내라는 얘기다. 어떻게 축구협회 간부가 프로팀 단장에게 그런 전화를 할 수 있나. 축구협회가 프로팀 운영에 무슨 권리로 개입할 수 있느냔 말이다.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짓을 한다고 해서 모두 배척해버리면 안 된다. 그러다간 정말 한국 축구 망한다.

신=너무 절망적인 얘기만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국 축구의 비전을 제시하는 게 축구인들의 의무인데…. 2002 월드컵은 우리 사회의 주요 동력인 ‘광장 문화’를 탄생시킨 공로가 있다. 축구가 만든 광장 문화가 촛불시위와 탄핵시위의 계기가 된 것 아닌가. 한국 축구의 희망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축구협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과감한 인적 쇄신을 통해 정 회장 중심의 행정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 봄에 있을 회장 선거가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지방축구협회장으로 구성된 대의원 대회에서 뽑지 말고 축구 지도자 등 축구인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회장을 뽑아야 한다. 정몽준 회장은 2002 월드컵의 자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또 축구협회를 하루빨리 법인으로 전환해서 국내 체육 단체 중 최대 규모인 축구협회의 예산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지도자 육성이다. 세계 축구의 흐름을 제대로 선수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오늘 아침 중학교 애들이 우리 훈련장에 와서 시합했는데, 경기에 진 팀의 코치가 선수들을 태클 연습을 시키고 있더라. 아니, 경기를 졌으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비한 훈련을 해야지, 경기 끝나고 지친 아이들을 ‘뺑뺑이’ 돌리면 되나. 그렇게 하면 다음 경기를 이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래서 축구 지도자 교육이 필요한 거다. 축구협회는 축구 지도자들이 새로운 축구 흐름을 익히고 자신의 축구철학을 올바르게 완성할 수 있도록 과감한 지원을 해야 한다. 국내 선수들도 하루빨리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2 월드컵 4강은 훌륭한 성과임에 틀림없지만, 선수들의 개인적 능력은 ‘톱클래스’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월드컵 대표팀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아직도 환상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도전의식도 부족하고 투지도 없고.

신=축구팬들도 2002 월드컵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냉정하게 봤을 때 지난 월드컵은 한달간의 ‘일장춘몽’이었다. 우리나라 축구는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 당시 세계 최강인 프랑스가 예선에서 탈락했을 때 프랑스인들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강팀이라도 언제든지 질 수 있는 게 축구다. 팬들이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계속하면 축구협회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의 희망은 ‘2002년’을 잊는 만큼 보인다.

<프로필>
조광래 서울FC 감독
1954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고, 연세대 졸업. 1986년 월드컵 대표. 1993년 대우 로열스 감독. 1998년 안양 LG(현 서울FC) 감독 부임. 2000년 K리그 최우수 감독상 수상.
신문선 SBS 축구해설위원
1958년 경기 안성 출생. 서울체고, 연세대 졸업. 1979∼1981년 축구 국가대표. 1985 프로축구 유공 은퇴. 축구협회 이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