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6월09일 제513호
일본은 샴페인에 취하지 않았다

재일동포 프리랜서가 진단한 일본 축구의 발전 비결… 과감한 인사개혁과 감독에 대한 전폭적 지원


신무광/ 축구 저널리스트 m-shin@mvf.biglobe.ne.jp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의 약진이 눈부시다. 지난 4월28일 체코 대표팀을 1:0으로 이긴 데 이어, 5월30일에는 아일랜드에 3:2로 역전승했다. 6월1일에는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것도 싸움의 무대는 전부 적지였다. 멀리 유럽까지 달려가 노련하고 강한 유럽팀들을 상대로 호각의 승부를 연출한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에도 6월 프랑스에서 열린 컨퍼데레이션컵에서 프랑스에 선전(2:3패)하고, 10월에는 루마니아와의 원정경기에서 1:1로 비겼다. 그러나 최근의 약진은 주목할 만하다. 잉글랜드 대표팀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지난 6월1일 경기 직후 “2002년 월드컵 때 일본은 훌륭했고 어느 정도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늘은 정말로 강했다”며 일본의 성장을 ‘절찬’할 정도다. 같은 원정경기였지만, 중동에서 베트남과 오만에 연패를 당하고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 142위인 몰디브와의 경기조차 고전한 한국과 대조적이다.

구태의연한 기술위원회 세대교체

같은 월드컵 공동 개최국이면서도, 왜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대조적일까? 그 이유는 2002년 월드컵 이후 일본축구협회가 착수한 인사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은 두 번째 월드컵 출전에서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지만, 그 기쁨에 빠지지 않았다.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룬 탓도 있으나, 매스컴은 ‘트루시에 재팬’의 성과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축구팬들도 일본 축구와 세계 축구와의 거리가 아직도 멀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런 목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일본축구협회의 가와부치 사부로 회장은 대회가 끝난 뒤 참신한 인사 기용을 단행했다.


△ 6월1일 영국 맨체스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 대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경기. 일본은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다.(사진/ AP연합)

우선, 대표팀을 강화·지원·평가하는 기술위원회의 위원장에 47살의 다지마 고조를 임명했다. 옛 일본대표팀 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뒤 독일 유학을 거쳐 릿쿄대학과 쓰쿠바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지식인이다.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각국 축구 관계자와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그는 1999년부터 일본축구협회 국가대표 코치진에 참여해 U-15(15살 이하), U-16(16살 이하), U-17(17살 이하) 대표 코치도 역임했다. 연공서열에 구애받지 않은 기용으로, 구태의연한 기술위원회의 세대교체를 추진한 것이다.

또 대표팀만이 아니고 일본 축구계 전반을 조정하는 전무이사에 축구인이 아닌 히라타 다케오를 기용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요코하마국립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 유학 경험이 있는 그는 통산산업성에 들어가 브라질 일본대사관에서 1등서기관을 지낸 인물이다. J리그 출범도 음지에서 지원하고, 2002 월드컵유치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높이 평가해 일본축구협회가 ‘헤드헌팅’한 것이다. 히라타는 통산성을 퇴직해 축구협회 전무이사직에 전념하고 있다.

J리그와 긴밀한 협력 구축

그리고 대표팀 감독이다.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달성한 성공자이면서 철저한 관리주의와 개성적인 언동으로 불평을 산 필립 트루시에 감독을 미련없이 경질했다. 대신, 세계적인 슈퍼스타이며 J리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브라질의 ‘하얀 팔레’ 지코를 감독에 임명했다. 그것도 임기를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보장했다. 감독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지코의 기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가와부치 회장은 절대적인 신뢰를 주며 지코에게 대표팀의 키를 맡겼다. 다지마와 히라타도 ‘지코 재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예로 대표팀 선수 소집을 들 수 있다. 원래 일본 축구협회는 J리그와 빈번한 협의를 거쳐 J리그의 각 구단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수를 선발하도록 노력해왔다. 이것이 ‘지코 재팬’ 발족 이후에는 더욱 강화됐다. J리그는 매년 3월에 개막하는데, 그 전 시즌 연말에 일본축구협회와 J리그가 의견을 교환해 서로의 전력에 지장이 없도록 대표팀 강화 일정을 짠다. J리그 출신의 지코 감독도 “J리그에서 호조를 보이는 선수를 대표팀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그 결과, 수비수 쓰보이 게이스케, 미들필더 엔도 야스히토, 구보 다쓰히코라는 신예가 등장했다.

한국도 겪고 있는 ‘유럽파’ 소집 문제에도 힘썼다. 현재 일본에는 나카타 히데토시(이탈리아), 나카무라 순스케(이탈리아), 이나모토 준이치(잉글랜드), 오노 신지(네덜란드), 다카하라 나오히로(독일), 스즈키 다카유키(벨기에) 등이 유럽에서 뛰고 있다. 다지마는 수시로 현지에 가서 유럽 구단들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고 있다. 유럽파의 장시간 이동에 따른 부담을 줄이고, 국내파의 원정 경험을 쌓기 위해 유럽 원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유럽파에 과도한 이동 부담을 강요하는데다 신예는 거의 발굴하지 못하는 한국과는 매우 대조적인,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표팀 강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기뻐하는 일본 대표선수 이나모토 준이치. 일본축구협회는 J리그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대표선수를 차출하고 있다.(사진/ 연합)

더구나 소집기간에 실시한 평가전도 계획적이고 대담하게 진행됐다. 2002년 10월26일 자메이카전 이래 ‘지코 재팬’은 1년8개월간 26경기(6월1일 현재)를 펼쳤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해외 원정도 많았고 상대도 다양했다. 아시아 국가와 8회, 유럽 국가와 6회, 남미 국가와 5차례 평가전을 치렀고,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이 대전하지 않은 아프리카(4회), 오세아니아(1회), 중남미 국가(1회)와도 대전했다.

이런 다양한 평가전은 “철저한 실전주의를 통해 팀을 단련한다”는 지코 감독의 대표팀 운영 방침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히라타 전무이사의 외교 수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 시절엔 축구로 날을 지새고 성인이 돼서는 통산성 관료로서 교섭이 어려운 중동 국가에서 석유개발사업에 관여해온 히라타 전무이사는 “비록 패하더라도 2006년 월드컵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강한 팀과 싸우고 싶다”는 지코 감독의 열망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히라타는 세계 각지를 돌며 정력적인 교섭 활동을 펼쳤다.

다양한 강팀과 싸우며 배운다

상대가 강호일수록 고전하는 것은 당연한 법. 지코는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등 강팀을 스파링 파트너로 골라온 탓에 많이 졌고, 그 비판을 온몸에 뒤집어쓰기도 했다. 올해 2월 오만전, 3월의 싱가포르전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졸전을 펼쳤을 때 일부 ‘울트라닛폰’이 지코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관리와 약속, 조직력을 선수들에게 강요한 전임 트루시에 감독과 대조적으로, 자율과 창조력을 중시하는 지코 감독의 지도방법에 비난과 시선이 쏟아졌다. 유럽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선수 기용은 팀 안의 경쟁의식을 저하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럼에도 지코 감독이 해임되지 않은 이유는 가와부치, 다지마, 히라타 등 축구협회 수뇌부들의 이해와 두터운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코 감독이 제창한 ‘실전주의’ 아래 선수들이 눈에 띄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예전의 일본 대표선수들은 주어진 전술과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결단력과 창조력을 몸에 익히고 있다. 그 완성도는 아직 높다고 할 수 없으나, 일본은 ‘조직과 개성의 융합’이라는 현대 축구의 조류를 착실히 익히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여운에 매몰되지 않고, 다음의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일본 축구. 그 진화 속도는 점점 가속화할 것이다.

신무광/ 축구 저널리스트 m-shin@mvf.biglobe.ne.jp

[필자 프로필]
1971년 일본 도쿄 생. 재일 한국인 3세. 1994년부터 스포츠라이터로서 활약하고, <주간사커다이제스트> <스포츠 그래픽넘버> 등에 기고. 저서 <히딩크 코리아의 진실>로 일본 유일의 스포츠 기자상인 2002년 미즈노 스포츠라이터상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