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식량난처럼 숨기지 않고 유연한 대응… “열악한 철도 인프라 개선 등 전화위복의 계기로”
북한은 용천역 대형참사에 대해 90년대 식량난처럼 숨기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은 과연 이 사태를 정면돌파할 것인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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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기관리 능력이 또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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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역 폭발사고로 얼굴과 눈을 크게 다친 북한 어린이들이 4월25일 신의주 병원에 누워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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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2일 북한의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일어난 대폭발 참사는 21세기 초 북한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될 만하다. 더불어 오늘날 북한이 처한 비극적인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가 이번 사고를 얼마나 조기에 매끄럽게 수습하고 안정을 회복하느냐는 그의 체제 유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는 국제사회뿐 아니라 내부 주민들도 널리 인지하고 있는 만큼 이제 김 위원장은 나라 안팎의 시선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게 됐다.
최악의 위기를 막 넘기고 있었는데…
용천군 재해대책위원회가 4월24일 밝힌 사망자 수는 154명에 이른다. 5명이 실종됐고 1300여명이 다쳤다. 이재민 수만도 8천여명에 이른다. 1300여명의 부상자 가운데 300여명은 극히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 가운데 76명은 초등학생으로 드러났다. 20세기 말 최대의 비극으로 일컫는 북한 식량난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터다. 1995년부터 98년까지 4년간의 홍수 등으로 적어도 100만명 안팎이 굶어죽었다는 게 정설이다. 식량난의 최대 피해자도 어린아이들과 병약한 노인들이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손을 들어 화답하는 모습.(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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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지도부를 원망하지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 때의 혁명정신으로 위기를 타개하자는 지도부의 호소에 묵묵히 따랐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 속에는 이런 정신이 녹아 있었다. △혁명의 수뇌부를 철저히 옹호·보위하자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난관을 뚫고 나가자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혁명의 낙관주의를 잃어버리지 말자 △온갖 어려움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갖자.
특히 주민들은 배고픔의 고통을 이기는 것도 혁명의 수뇌부인 ‘수령’을 옹호하고 보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굶어죽기도 하고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미국의 봉쇄 사슬에서만 벗어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지도부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미국(놈들)이 드디어 핵폭탄을 떨어뜨린 줄로만 알았시요”라고 사고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외신에 전하는 북한 주민의 말에서도 일상적인 대미 적대의식을 엿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식량난과 핵 위기 속에서도 북한 사회를 그럭저럭 잘 꾸려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핵 문제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분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고, 개성공단과 신의주 특구를 여는 등 과감한 개혁·개방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북한은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다했고, 그런 노력을 통해 최악의 고비를 막 넘기고 있었다. 이는 용천역 폭발사고 때 평양에 있었던 셀리그 해리슨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선임연구원이 4월24일 북한의 최근 경제개혁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평양에는 최근 잘사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상점에 물건도 많아진 것 같다. 시장도 비교적 활성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4월19~21일 중국 방문은 비상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개혁·개방의 최대 걸림돌인 ‘북핵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이제 그가 뭔가 중대한 결단을 내릴지 모른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관측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런 예상을 크게 비켜가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앞으로 인내성과 신축성을 계속 발휘해 6자회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회담의 진전을 이룩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중국쪽에 밝혔다. 이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4월23일 국내 한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감지된다. 그는 김 위원장의 방중 성과에 대해 “그가 6자회담을 지속해나가는 데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고, 유연성을 보였다는 얘기를 중국의 리자오싱 외교부장에게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그의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의 발언은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북-중간에 뭔가 의미 있는 교감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한다.

△ 깊이가 10여m에 달하는 구덩이가 당시의 폭발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AF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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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향후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
해리슨 연구원의 방북 결과 설명도 북한의 전향적인 자세를 뒷받침한다. 그가 만난 김계관 북한 외교부 부상은 “북한은 절대로 (미국이 우려하는) 다른 국가나 조직과 핵과 관련한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선을 앞두고 북한의 무모한 모험 가능성을 염려해온 워싱턴 조야의 우려를 불식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내용들이다. 유엔 주재 북한 관계자는 4월25일 “용천 폭발사고가 6자회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중국은 김 위원장의 현명한 처신에 고무된 듯하다. 중국은 북한이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여러 경제 개혁·개방 조처들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조선중앙통신>은 4월22일 “김 위원장이 중국쪽의 북한 경제건설을 위한 무상원조 제공에 대해 사의를 표시했다”며 “조-중 쌍방이 농업발전, 도시건설 등 많은 측면에서 응당 서로 배우고 경험을 교류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러시아의 일간 <코메르산트>는 23일치에서 “김 위원장은 이번 방중 기간 중국 지도부에 각종 경제개혁 조처를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은 이에 식량과 전력 공급을 보장했을 것이며, 김 위원장은 이에 만족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 위원장과 중국 지도부가 약속한 모든 내용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이 경제 문제 해결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줬다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당장 시급한 식량과 에너지의 안정적 지원을 이끌어내고, 앞으로 북한 주민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여러 조처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전망이 중론이다.
한국 정부의 핵심 관계자들도 내심 김 위원장의 귀환 뒤 나올 후속 조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중국 당국에서 김 위원장의 방중 메시지를 이미 전해들은 터였다. 개성공단 개발이 본궤도에 오른데다, 열린우리당의 국회 과반의석 차지라는 정치적 뒷심을 받아 대북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려던 참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모처럼 우호적인 주변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터진 용천역 폭발 대참사는 김 위원장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으로 비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의 원인 파악에 따라 김 위원장의 향후 행보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한마디씩 내놓는다. 정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 사고가 어떤 이유에서 발생했든 개혁·개방의 대세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김 위원장의 신변이 위험에 노출된 사실, 그가 북한 내에서조차 더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북한 내 조직화된 반김 저항세력이 저지른 사고가 아닐지라도, 북한 내 열악한 인프라와 낙후된 사회 안전망은 김 위원장의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대형 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김 이후의 북한’에도 진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른 정보소식통은 “사실 김 위원장은 과거에 이런저런 사고로 여러 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다”며 “이번 사고로 그의 대내외적 행보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또 다른 참사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부 기강을 더욱 다잡는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4월19일 베이징에서 만나 회담하는 모습. 이들은 북한 핵과 경제지원 문제를 집중적으로 협의했다.(AF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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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식량난 때와 태도가 다르다”
하지만 북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김 위원장이 이번 참사를 기회로 활용할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북한이 예전과 달리 용천역 참사 소식을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주민들에게도 적극 알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부의 한 분석관은 “북한 당국은 사고를 숨길 경우 되레 체제 유지에 부정적인 유언비어만 양산할 게 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이제는 북한도 휴대전화 사용자가 수만명에 이르는 등 많이 달라져 숨기려 해도 숨길 수도 없는 반개방 사회로 변신하고 있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들 김 위원장이 미봉책이 아닌 정면 돌파에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유연한 대응은 일찌감치 감지된다. 북한 정부는 의료와 구호체계 미비 등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수습과 복구를 감당하기가 어렵자 4월23일 국제기구와 평양주재 외국 대사관들에 폭발사고 발생과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국제구호 관계자나 외국 언론에 사고 현장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한편, 부상자들이 수용돼 있는 신의주 병원까지 국제구호기구 대표들에게 보여줬다.
북한 당국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진 북한의 모습을 실감케 한다. 이미 수년간 식량난을 겪으면서 국제사회와 사귀어온 경험이 이번 사태를 발빠르게 대응하고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마수드 하이더 평양주재 유엔대표는 “지난 1990년대 중단 식량 재난 때 나온 반응과 비교하면 이번에 보여주는 자세는 매우 전향적”이라고 북한의 협력 태도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는(북한의 태도변화) 지난 몇해간에 걸친 사고의 점진적인 변화의 산물이며, 그들은 국제구호기관이 매우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사회도 이번 용천역 폭발 참사의 수습 지원이 북한에 또 다른 개방의 ‘단맛’을 맞보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정상적 교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들이다. 단순히 일회성 지원이라는 땜질에 그칠 게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처방을 북한 당국에 제시하고, 협력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구적인 비즈니스, 경제, 안보 문제와 관련한 국제 자문기관인 ‘스트랫포’는 “북한이 이번 참사를 잘 활용한다면 열악한 철도 인프라 개선뿐 아니라 연관 산업을 현대화하는 데 필요한 외국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용천역 폭발로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된 북한 주민들이 곳곳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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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랫포’는 또 “북한이 흥미롭게도 용천 참사 현장에 초대한 기관 가운데 유럽위원회가 포함되어 있다”면서 유럽은 미국과 달리 정치적 부담이 없으면서 풍부한 자본과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흥미를 보일 만한 경제협력 파트너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이전의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말고 원조나 지원을 호소해 도움을 이끌어내고 철도와 관련 인프라 산업에 외국 투자를 적극 유치해 근본적인 사회 안전망 개선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은 셈이다.
국제구호단체들 중장기적 지원 모색
마침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을 비롯한 국제구호단체들도 각종 보고서에서 “이재민 임시수용소와 병원, 학교, 공공시설의 복구가 당장 시급하다”고 진단하면서도 공공 인프라와 보건·의료 체계 등에 대한 부문별 평가작업을 통해 좀더 중장기적인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단순 구호활동에서 인프라 등으로 지원 분야를 옮겨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경제특구로 지정돼 비상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신의주와 더불어 가까운 용천이 평화의 번영을 상징하는 북한 최초의 도시로 거듭 태어날 수는 없을까. 순식간에 폐허로 변한 삶의 보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절망과 원망이 희망의 눈빛으로 바뀔 그날이 올까. 세계는 지금 김정일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