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3월18일 제501호
‘고건 카드’ 들고 ‘고’를 외치다

역풍 무릅쓰고 탄핵 밀어붙인 한 · 민 · 자의 속셈… 총리 체제 안착시킨 뒤 상황 변화 시도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3월13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야 3당 대표들의 회동. 이들의 입에서 '총선연기론'이 공식적으로 나올 시점은 언제일까.(이용호 기자)

몰랐을까.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결의안을 통과시킨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자민련 의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어떤 벽에 부닥칠지 정말 몰랐을까.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사안의 경중이 다르긴 하나, 자신들의 권능으로 ‘탈옥’시킨 서청원 의원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세 야당이 군사작전을 치르듯 탄핵안을 통과시킨 것을 보면, 이른바 ‘그랜드 플랜’이라고 부를 만한 꿍꿍이속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혹을 살 만하다. 당초 탄핵 반대를 내걸었던 자민련의 막판 가세는 이런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권력 분점을 핵심으로 한 개헌을 고리로 결탁한 것이 아니냐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탄핵 이후’ 준비해온 징후 드러나

탄핵 정국을 주도했던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지도부는 ‘큰 그림’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등 탄핵받을 만한 일을 했고 3월10일 기자회견에서 사과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진퇴를 총선 결과와 연계해 노골적인 선거개입 의도를 드러낸 것이 탄핵안 가결로 이어진 것이지, ‘끝장’을 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이를 ‘기호지세’로 설명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는 싶었으나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후 그 상태에서 중단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고 다른 정당들의 협조를 일사불란하게 끌어낼 정도의 기획력이 있었다면 한나라당이 지금과 같은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도 있다.


△ 3월11일 기자회견을 열어 탄핵소추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노무현 대통령. 그는 탄핵 표결을 "굳이 물리적으로 저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 탁기형 기자)

그러나 최병렬 대표와 홍사덕 총무 등 당 지도부는 ‘탄핵 이후’를 준비해왔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 대표가 3월10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재의 최종 결정이 나면 국민의 뜻을 모아 다음 대통령 선거를 할지, 개헌을 할지 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탄핵을 기정사실화하고 보궐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을 뽑거나 아니면 개헌을 통해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개헌을 시도할 수 있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세 야당의 지도부가 ‘탄핵 이후’에 관한 정교한 구상에까지 같은 그림을 공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 탄핵 이후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조순형 민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최소한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까지는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탄핵안 가결 이전부터 탄핵 반대 여론이 거셌음에도 이들이 노 대통령의 탄핵을 기정사실화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지난해 초 취임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30% 안팎에 머물고 있는 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이다. 탄핵안 가결 이후 잠깐 동안 역풍에 시달리겠지만, 결국엔 반노 대 친노, 혹은 진보 대 보수의 대결 구도로 재편된다면 4·15 총선에서 다른 쟁점들을 희석시키고 지지층 결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한 듯하다. 실제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탄핵안을 가결시키기 이전까지의 탄핵정국에서 “영남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층이 결집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들의 희망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민주주의 퇴행이라는 위기감이 퍼지면서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대선자금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확신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노 대통령이 권한정지로 무력화되면 검찰도 비로소 ‘본연의 위치’로 되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노무현 캠프의 검은돈 비리를 상당 부분 더 수사해놓고도 현직 대통령의 위세에 눌려 발표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며 “그러나 이제는 검찰이 소신껏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대형 측근비리가 추가로 더 밝혀질 경우, 지금의 정당지지율 구도가 뒤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계산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도 “특검 수사 결과 노 대통령 자신이나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날 경우 헌재 심판 결과와 무관하게 스스로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고건 권한대행 체제의 안정’에 희망을 걸고 있다. 탄핵 심판이 진행될 몇 개월 동안 지난 1년 내내 정쟁으로 얼룩졌던 정치권이 평화로워지고 여기에 경제까지 활력을 되찾는다면, 국민들 사이에 ‘혼란과 고통의 주범이 노 대통령이었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총선연기론’ 언제 고개 들까

‘고건 카드’는 ‘노무현 이후’의 큰 그림과도 맥이 닿아 있다. ‘최병렬 대통령 혹은 홍사덕 총리’ ‘조순형 대통령과 홍사덕 총리’ ‘내각제로 지분 확보’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을 묶어줄 최대공약수가 ‘고건 대통령, 혹은 분권형 개헌을 통해 정치적 위상이 달라진 고건 총리’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핵심관계자는 “고건 총리가 민정당의 국회의원이었고, (분당 이전) 민주당 소속 서울시장이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세 야당이 탄핵 이후까지 단일한 대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욕심을 버리고 고건을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전략기획통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이 파면되고 보궐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전망이 구체화할 경우, 고건 총리가 독자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고 총리가 대권을 꿈꿔온 지 오래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라며 “고 총리가 당장은 ‘권한대행’의 한계에 머물겠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다 보면 저절로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3당이 3월13일 “고건 체제 안정을 위해 협력”을 외치며 ‘고건 띄우기’에 나선 것도 나름의 포석이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즉, 고 총리에게 바람을 넣음으로써 독자 행보 시점을 앞당기려는 원려도 작용한 듯하다는 이야기다.

3당 대표는 고건 총리 체제에서 개헌은 없다고 공언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스스로의 공언을 뒤집기 위해 가장 손쉽게 꺼내드는 것은 ‘상황의 변화’다. 아직은 연기만 솔솔 피우고 있는 ‘총선연기론’이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점을 주목해봐야 할 것 같다.

‘식물 대통령’으로 사느니…

열린우리당의 표결 봉쇄도 말린 노 대통령의 의중… 스타일대로 타협보다 원칙 고수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국회에서의 탄핵안 처리 대책을 놓고 미묘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안을 발의한 직후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의 통화에서 “굳이 물리력으로 저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가 “표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적 혼란을 막는 게 중요하다”며 표결 봉쇄 의지를 밝힌 데 대해 이런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 전날인 3월11일 기자회견에서도 애초 “국회가 자유롭게 표결해달라. 열린우리당도 당당하게 표결에 임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려다 참모들의 만류로 참았다고 여권 관계자는 전했다.

노 대통령은 탄핵안 표결 당일인 3월12일 아침 이병완 홍보수석을 통해 대국민 사과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사과 내용은 “잘잘못을 떠나 국민 여러분께 오늘과 같은 대결 국면의 탄핵 정국에 이르게 된 것을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 국가 최고책임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이었다. 즉, 선거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으라’는 야당의 요구에 응한 게 아니라 총체적 혼란 상황에 대한 포괄적 유감의 뜻을 밝힌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야당의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수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제로 탄핵안이 가결되자 “헌재 판결은 다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설령 헌재가 탄핵 청구를 수용해 자신이 파면되는 한이 있더라도, 배수진을 치고 국민의 심판을 구해보자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은 “야당에 휘둘리며 식물 대통령으로 4년 임기를 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탄핵안이 가결된 날 저녁 수석·보좌관들과의 저녁식사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3당 합당 합류 거부, 거듭된 부산 선거 출마와 낙선 등을 회고하며 “지도자는 원칙을 지켜야 하고, 그래야 정치도 역사도 발전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일찍이 어정쩡한 타협보다는 나름의 명분과 원칙을 고수한다는 점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왔다. 또한 상대 정파와 대립각을 분명히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지지자를 끌어모으는 승부사적 기질도 발휘해왔다. 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내 비판세력과의 타협을 주문받자 “소용없는 일이다. 내 지지율은 바닥까지 내려가야 다시 치고 올라간다”고 말한 적도 있다.

야당 일각에서 탄핵안 가결 뒤 거센 역풍을 맞고 “우리가 노 대통령이 놓은 덫에 걸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 대통령 자신이 사과했듯이 국정 혼란은 초래됐지만, 어쨌든 지지자들의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치도록 해 결집시킨다는 전략은 일단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