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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표지이야기 | 등록 2003.12.11(목) 제4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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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팔레스타인] 거룩한 날에 관용을 다짐합시다 팔레스타인 무슬림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 예루살렘에서 3개 종교가 평화적으로 어울리기를
존경하는 <한겨레21> 독자 여러분, 성지에서 연말 인사를 올립니다. 올해 유대와 무슬림과 크리스천 축제가 몇주 간격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 그 모든 종교가 함께 성지라 여기는 이곳 팔레스타인에 제가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큰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곳 팔레스타인에서는 몇주 전 유대가 수코트(Sukkot) 잔치를 벌인 데 이어, 며칠 전엔 우리 무슬림이 라마단(Ramadan) 금식월이 끝나면서 벌이는 잔치인 에이드 알 피터(Eid Al-Fiter)를 치렀고, 곧이어 크리스마스 시즌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슬림도 트리를 만든답니다
그러다보니 올해 제 아내 베나즈와 딸 타말은 에이드 알 피터가 끝나기 무섭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자고 보챘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은 모두 무슬림이지만,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크리스천 못지않게 온갖 장식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서 나무에 매다는 타말을 보고 있자니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아빠, 우린 무슬림인데 왜 크리스마스를 지내야 돼？” 철없던 제가 묻는 말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시던 부모님께서는 ‘종교적 관용’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된 저도 타말에게 늘 제 부모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주변에는 폭력과 증오가 판치고 있지만. 하지만 올해도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된 지가 벌써 3년째입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인티파다(봉기)에 돌입하면서부터입니다. 무슬림들은 베들레헴을 에워싼 중무장 이스라엘 군인들이 쳐놓은 검문소를 지나갈 수 없는 탓입니다. 기자인 저는 취재와 개인적인 축하를 겸해 인티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베들레헴을 찾아갔습니다. 나티비티 교회당 자정 예배에 참여하려는 수많은 성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 그리고 취재기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밀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곤 했지요. 그 찬란했던 형형색색 불꽃놀이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이스라엘군 총구에서 나오는 사나운 불꽃만 요란할 뿐입니다. 저는 1995년 크리스마스 이브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국민기구(PNA)에 베들레헴을 넘겨주며 철수하던 감격스러운 장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날 무슬림과 크리스천들은 함께 어울려 밤새도록 베들레헴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베들레헴이 벌써 3년째 이스라엘군에 포위당해 있으니… 참으로 슬프기만 합니다. 그날 우리 무슬림과 크리스천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베들레헴을 침공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도 실수를 했습니다. 2002년 4월, 베들레헴을 점령한 이스라엘군에 쫓긴 몇몇 팔레스타인 무장해방단체 조직원들이 피난처로 나티비티 교회당에 들어가 200여명 시민들을 포위한 채 저항했던 일이 있으니까요. 이스라엘군은 당시 나티비티 교회당을 둘러싸고 최악의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 같은 시민에게마저 3년 동안 나티비티 교회당은 말할 것도 없고 베들레헴까지 걸어잠근 상황은 문명사회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입니까？
하늘의 별따기, 예루살렘 특별허가증
<한겨레21> 독자 여러분,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오늘 12월1일은 그래도 좀 낙관적인 기운이 드는 날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시민들 모두에게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이른바 제네바 양해각서에 양쪽 대표들이 서명할 것으로 보이니까요. 사실 팔레스타인은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평화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그 희망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제네바 협정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협정이 체결된다면 이 지역의 미래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쪽이 서로 보편적 역사와 종교, 정신 그리고 수많은 유대와 크리스천 이슬람 성전들을 지닌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인정이란 서로 다른 정파들이 예루살렘이 지닌 종교적 차별성과 행정분할권을 존중하면서 신성과 덕성을 포함해 전통 관습과 자유 예배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무슬림 팔레스타인인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이 ‘인정’은 충분히 공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루살렘이 누구 땅인가’를 놓고 지금까지 진퇴양난을 거듭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저 나름대로 이 인정이 공평한 결론이라 여기는 건 다름 아닌 예루살렘은 유대와 크리스천 그리고 무슬림의 세 종교가 함께 어울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이스라엘도 무슬림 팔레스타인도 독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종교에 자유로운 예배를 보장한다.” 이 사안 하나를 놓고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크리스천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종교 제전을 놓고도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제한적인 숫자만 예루살렘을 방문을 허용해왔습니다. 특히 가자와 서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는 아예 예루살렘 방문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특별허가증이란 게 있지만, 그걸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고 보니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그저 ‘불가능’이라 여길 뿐입니다. <한겨레21> 친구 여러분, 올해도 물론 이스라엘 당국은 서안과 가자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크리스마스 이브 때 베들레헴 방문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서안에 해당하는 라말라에 살고 있는 제 크리스천 친구들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한 심정을 털어놓더군요. 물론 그 친구들은 지금 베들레헴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로 이스라엘 당국이 발급하는 허가증을 얻고자 애를 쓰긴 하는데, 베들레헴에 가려면 예루살렘을 거쳐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아 속만 태우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을 거미줄처럼 짜놓은 이스라엘군 검문소를 통과하는 일이 베들레헴 허가증 얻기보다 더 어려운 탓입니다. 축 처진 크리스천 친구들 어깨를 두드리며 저는 조심스레 위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아리엘 샤론 총리가 요사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편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한번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나？ 이번에는 그가 약속을 지킬 것도 같은데….”
베들레헴의 ‘아름다운 이브’를 위하여
아무튼 베들레헴의 올 크리스마스는 별 장식도 없이 매우 제한적인 종교의식 속에서 치러지겠지만, 크리스천 친구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탄생지를 지척에 두고도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이 예수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은, 아마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의 독자들께서는 상상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겨레21> 독자 여러분, 여느 때라면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미사를 올리는 베들레헴 나티비티 교회당 종소리에 맞춰 반대쪽 무슬림 사원에서 올리는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놀라는 그 풍경이 현지 무슬림과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무슬림 사원의 기도는 예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달라도 우리는 하나라는 참으로 거룩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한겨레21> 친구 여러분에게는 과연 크리스마스가 무엇을 위한 잔치입니까？ 무슬림인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평화, 사랑, 관용을 서로 표현하는 날이라고 말입니다. <한겨레21> 친구 여러분 모두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성지에도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날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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