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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표지이야기 등록 2003.11.05(수) 제483호

[표지이야기]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50대

노후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거리로 내몰리다…임금 방식 개편해 고령자 퇴출 압력 줄여야

“사람은 워킹 애니멀(working animal)이야. 늙어도 일을 해야 제대로 밥맛이 나잖아. 사회가 갑자기 바뀌어버렸어. 나야 거의 정년에 도달할 때까지 해먹고 나왔지만….”

지난 10월2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 2003실버취업박람회장을 찾은 김아무개(55)씨는 그래도 자신은 행복한 편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씨는 금융기관에서 이사까지 지낸 뒤 올 초 명예퇴직해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저거 봐, 인력회사 하나 만들면 되겠어.” 박람회장을 떠도는 수많은 노인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력서가 가득 든 누런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구인업체 부스를 기웃거리던 장아무개(56)씨는 직장을 잃은 뒤 1년째 놀고 있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야 회사를 떠날 때를 대비해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지만 세상이 변해 갑자기 은퇴당한 우리야 그것으로 끝이지 뭐.” 장씨가 한숨 쉬며 말했다.

전체 임직원의 1~2%

이름이야 ‘실버’취업박람회지만, 행사장에는 김씨와 장씨처럼 명퇴·구조조정 등으로 노동시장에서 퇴출돼 이미 ‘노인’이 된 50대 고령자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구인업체로 참가한 택배서비스 회사 부스 앞에 서성거리던 박아무개(62)씨는 5년 전에 금융기관에서 정년퇴직한 뒤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집안 눈치 보며 그저 놀고 있다고 말했다. “자영업 식당이니 뭐니 자영업에 뛰어든 친구들 보니까 다들 망했어. 펜대나 굴리던 사람이 자영업에 어디 함부로 손댈 수 있나 경비원 자리야 있지만 말이 주야간 교대근무지 너무 힘들어, 주5일제 하는 판인데….”

50대 노동자는 기업에서 눈씻고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된 지 이미 오래다. LG전자의 경우 올 4월 말 현재 50∼54살은 전 임직원의 1.5%, 55살 이상은 0.2%에 불과하다. 대우일렉트로닉스의 50대 이상 임직원은 전체 직원의 2.7%에 불과하다. 45살 정년에, 56살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이라는 ‘사오정, 오륙도’란 말이 직장을 휩쓸고 있는 한국에서 정년퇴직자는 별종으로 취급된다. 기업도 더 이상 정년퇴직 업무를 보지 않는다. 2001년 고용보험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50대 실직자 가운데 정년퇴직으로 직장을 떠난 사람은 2.9%에 그쳤다.

“사회보장보다 일자리를 달라”

직장에 아직 붙어 있는 50대는 “다음은 내 차례”라는 위기감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고, 이미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대다수 50대는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패배감을 곱씹으며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회사인간’의 마지막 세대로 개발연대를 뚫고 달려오면서 기업과 국가에 의해 강요된 저임금 노동생애를 살아온 세대가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갑작스런 퇴장은 개인적으로 노후소득 문제와 준비되지 않은 은퇴에 따른 상실감을, 사회경제적으로는 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 재정의 막대한 지출 부담을 안겨준다.

2000년 현재 우리 경제의 생산가능인구(15∼64살)는 3370만명(전체 인구의 71.7%)이다. 이 가운데 50∼64살 인구는 18.4%로 한국은 아직 ‘젊은 국가’ 대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생산가능인구 중 50∼64살 인구 비중은 2010년 25.0%, 2020년 32.9%, 2030년 36.0%로 대폭 높아진다. 따라서 앞으로 30년 뒤 55살 이상 인구에게 500만개 이상의 추가적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면 절대적인 노동력 감소로 인해 생산 및 경제성장이 큰 폭으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직장 은퇴 연령은 몇살이나 될까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자는 68살, 여자는 67살이 돼야 실제로 일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은퇴 연령이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40대 중반부터 다들 명퇴로 잘려나가는 판국인데 뜻밖의 조사결과라고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에 50∼64살 인구 중 취업자가 62.6%에 이를 정도로 한국 노년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실제로 높은 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 연구위원은 “국민연금 같은 퇴직 이후의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해 나이 들어도 계속 일해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라며 “노년층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지만 이는 50살 이상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는 아주 적은 대신 자영업자와 농촌 고령자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령 임금노동자의 급격한 퇴장은 노동시장 잔존율에서 한눈에 확인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01년 노동부의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를 분석한 결과, 30∼34살 사이의 임금노동자를 100명이라고 할 때 이들 중 35∼39살까지 임금노동자로 남는 사람은 85.9명, 55∼59살까지는 28.8명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35살을 기점으로 스스로 자영업자가 되든 실직자가 되든 임금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는 노동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년은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02년에 실시한 사업체 실태조사(1433개 업체 대상)를 보면 전체의 76%가 정년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정년은 대체로 55∼57살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년이 남아 있기 때문에 퇴출시키지 못한다’는 정서는 옛말이 됐다. 노동생애를 통해 예외적인 소수는 50대 후반, 60대까지 자신의 경력을 유지하면서 소득증가를 누리지만, 대부분은 중년의 어느 시점에서 은퇴해 노동소득이 완전 단절되거나 자영업 창업이나 비정규 단순직에 취업해 아주 낮은 소득으로 생활한다.

퇴출 노동자 대부분 임시·일용직

실버취업박람회장에서 만난 장씨는 “회사에서 코스트(임금비용)가 많이 든다며 퇴직을 종용해 어쩔 수 없었다”며 “내가 국민연금 40만원을 받게 된다는데 용돈밖에 안 되는 그것마저도 깎는다고 난리”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50대는 자녀교육비 등 지출이 가장 많은 때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일자리를 알아보러 박람회장에 나왔다는 6급 기능직 공무원 김아무개(57)씨는 “공무원연금으로 기본생활이야 유지할 수 있겠지만 하루아침에 200만∼300만원 수입이 없어지게 됐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고 한숨지었다. “큰애는 대학 다니고 아들은 이제 고교 졸업하는데 막내 대학 졸업시킬 때까지는 일해야지. 부모가 아이들을 끝까지 돌봐줘야 한다는 게 우리 정서잖아?” 이에 대해 한국노동연구원 장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고령자는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어한다”며 “노인복지를 위해 국가가 뭘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면 (사회보장보다) 일자리를 달라는 요구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한국 노동자들이 연금 타먹는 노년을 제대로 경험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일을 그만두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직 고령자 대부분이 이전에 고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임시·일용직 저임금 노동자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고령 실업자 중 고졸 이하 학력이 90%를 넘는다.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고, 벌어놓은 소득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더 오래 임금노동자로 살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게다가 40대에 회사를 나오면 갈 만한 딴 데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자영업자 비중이 높긴 하지만 정규직 임금노동자들이 퇴직 이후 선택하는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잡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고령자를 상대적으로 임금비용이 많이 드는 노동력으로 여겨왔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생산성을 반영하지 않는, 이른바 순수한 연령에 따른 ‘임금프리미엄’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령자는 과잉인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용자쪽 주장과 달리 우리나라 임금분포는 40대 초반에 임금수준이 정점에 이르고, 50대 초반이 되면 30대 후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물론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곳도 아직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전통적인 연공급체계를 나이 들수록 임금이 떨어지는 보상체계로 바꾼 기업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전체 임금분포가 40대 중반부터 꺾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고령자라 해도 퇴출 압력의 강도가 임금수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연령에 따라 임금이 계속 올라가는 정규직 고령자에게는 목을 자르겠다는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반면, 저임금 일용직 고령자는 그대로 노동시장에 남을 확률이 비교적 높다. 실제로 10∼29인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50대 초반 노동자의 88%가 50대 후반에도 남아 있는 반면, 500명 이상 대기업에서는 70% 이상이 퇴출당하고 있다. 고임금 장기근속자가 선별적으로 빠져나가고 시장임금이 낮은 저임금 단순직 고령자들만이 노동시장에 그대로 남기 때문에 전체 임금수준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령 노동자 실종은 국가의 손실

오직 노동만 하다 삶을 마감하는 것도 문제지만, 생애의 3분의 1을 복지에 의존하는 연금생활자로 살게 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이 클 뿐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연금만 봐도 노동자가 연금재정에 기여하는 기간을 늘리지 못하면 후속 세대의 부담이 커지고 기업 역시 연금재정 기여분을 더 떠안야 한다. 그 런 점에서 50대 중반 이후 근로 의욕이 있는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기업이 지금 당장 적극 나서야 한다. 장 연구위원은 “고령자의 임금수준을 다소 낮추더라도 고용을 안정시키고 노동생애를 연장하거나, 단순 연공급이 아니라 맡은 직무에 기초해 보상을 하는 방식으로 임금을 개편해 고령자 퇴출압력을 줄이는 게 고령화 사회에 대처하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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