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11월12일 제484호 

재벌이여, 엄살떨지 말라

검찰 수사가 실물경제에 악영향 준다는 논리는 과연 얼마나 근거있는 것일까

“이번 기회에 완전히 털고 가야 한다.” 한 재벌그룹 구조조정본부 소속 임원이 최근 사석에서 기자에게 한 말이다. 재계가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 매우 비협조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의 말은 ‘그냥 해보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선자금 제공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많은 재벌 임원들의 속마음은 그와 비슷하다. 이번 기회에 정치권과 재벌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행을 근절해야 훗날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는 “이번에는 총수까지 검찰에 불려가지는 않을 것 아니냐”며, 이번이야말로 과거를 청산할 아주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사진/ 1995년 말 ‘노태우 비자금 사건’때 검찰에 줄줄이 소환됐던 재벌 그룹 총수들. 이런 초유의 사태에도 실물경제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한겨레 이정우 기자)


SK(주)의 주가가 오히려 오른 이유

하지만 재벌기업들의 실제 움직임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다. 검찰이 SK그룹 외에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다른 기업들로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또 다른 재벌 소속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다들 정신이 없다. 짜맞춰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냐”고 하소연했다. 재벌들은 이미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흔적이 있는 자료들을 철저히 폐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초 SK그룹 수사과정에서 핵심 서류들을 압수당해 SK의 불법행위 증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을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다.

정치권, 특히 야당인 한나라당이 검찰수사를 거부하는 가운데 기업들마저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검찰로서는 수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안대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불법 대선자금에 대해 기업들이 ‘자수, 자복’할 것을 촉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안 중수부장은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계좌추적과 압수수색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진/ 지난 11월6일 정치자금 개선 등 현안에 관해 기자회견하는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전경련은 일찌감치 기업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면을 요구하고 나섰다.(연합)


재벌들이 검찰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재벌의 실질적 지배자인 총수의 처지에서 보면, 설령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행이 사라지기를 바랄지라도 수사결과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걱정하게 마련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고 정몽헌 현대 회장이 검찰수사를 받고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총수가 검찰에 불려가지는 않더라도 총수 책임론이 불거질 경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다.

재벌들이 검찰수사에 반발하고 방해하는 논리는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인들로 수사가 확대될 경우, 내년 경영계획을 세우기 어렵고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재계의 어설픈 논리를 검찰이 상당 부분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이번 수사의 목적은 각 정당이 수수한 불법 대선자금의 규모와 용처를 확인하는 것이지 기업 자체의 범죄를 캐는 것이 아니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 수사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기업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구한다”고 말했다. 재벌의 철저한 수사가 정말로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것일까?

대부분의 재계 인사들은 이런 논리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올 들어 SK그룹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SK그룹이 한때 파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룹의 주력사인 SK(주)의 주가 움직임은 ‘경제 악영향론’을 무색하게 한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던 올해 1월 SK(주)의 주가는 1만3천원대였다가 5천원대까지 수직 추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사 착수 시점보다 오히려 2배 가까이 올라 있다. 한 외국계 증권사의 임원은 “외국계 펀드의 지분 매집에 따른 경영권 분쟁 가능성과 실적 호전 등이 호재로 작용했지만, 어쨌든 검찰수사가 기업의 불투명한 경영으로 인한 악재를 제거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진/ 부당내부거래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됐던 SK(주) 최태원 회장. 지금 SK(주)의 주가는 수사 착수 시점보다 오히려 2배 가까이 올랐다.(한겨레 이종근 기자)


재벌의 ‘약자 논리’와 검찰의 선 긋기

과거의 경험으로 봐도, 검찰의 기업 불법행위 수사가 경제 전체에 주는 악영향은 거의 없었다. 사상 최대의 재벌기업 수사가 진행된 것은 지난 95년 말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이다. 검찰은 그해 11월6일부터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30대 그룹 총수 대부분을 줄줄이 소환했다. 하지만 실물경제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해 경제성장률은 3분기 9.8%에서 4분기 7.0%로 조금 떨어졌지만, 이는 경기순환에 따른 것이었다. 경기는 93년 1월 저점에서 확장을 시작한 뒤 95년초부터 설비투자가 줄어드는 등 고점에 임박한 징후가 뚜렷했다. 성장률 하락은 그에 따른 영향일 뿐이었다.

재벌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제 악영향’ 논리와는 별개로, 일찌감치 기업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자신들은 단지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돈을 냈다’는 이른바 ‘약자’ 논리다. 재벌들의 이런 논리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재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해, 얼마씩 어떤 조건으로 정치권에 제공했는지가 먼저 철저히 드러나야만 한다. 그러나 재계는 여야 정치권과 검찰이 처한 상황을 교묘하게 활용해 재벌 수사에 대한 한계선을 만들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정치자금 개혁방안을 서둘러 발표해, 앞으로는 ‘재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에 정치자금을 대주겠다며 정치권 전체를 압박하고 나섰다. 재벌에 가장 친화적인 한나라당이 재계의 ‘사면’ 요구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재계가 검찰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명분을 키워주기 위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런 가운데 검찰은 벌써부터 자신의 권리를 벗어난 ‘사면’을 거론하며, 재계의 불법행위 수사에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수사 편의 때문이다.

검찰은 10년 전일 까맣게 있었나

지난 95년 35명의 재벌 총수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839억원의 뇌물을 제공한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1명만을 구속하고, 8명의 재벌 총수를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했다. 그때도 검찰의 논리는 ‘경제에 악영향을 줄까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검찰이 수사 편의를 위해 미리 재계 인사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자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수사결과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행이 여전히 뿌리뽑히지 않은 데는 검찰의 책임 또한 결코 적지 않은 셈이다. 그런 검찰이 10년도 안 된 일을 벌써 까맣게 잊은 건지 지켜볼 일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