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hani.co.kr/h21

기사섹션 : 표지이야기 등록 2003.10.22(수) 제481호

[표지이야기] 국정상황실은 실세상황실?

386 대표주자 이광재는 왜 눈총받았나… 보수적인 보좌로 지지층 이탈에 한몫 지적도

노무현 정부의 소장파 실세로, 그리고 386 논란의 핵으로 꼽혀온 이광재(38)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결국 낙마할 것같다. 10월18일 사표를 제출한 가운데 그의 퇴진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평소 “참여정부는 시스템으로 가동되며 2인자는 없다. 나도 당연히 2인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청와대 설명과 별개로 이 실장은 참여정부의 최대 실세중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광재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사에서 막강 파워 발휘

이광재씨와 안희정씨 두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측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좌 희정, 우 광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특히 이씨가 정치인 노무현의 측근에서 정권의 실세로 부상하는 것은 지난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시작된다.

당시 인수위는 대선 자문교수단 출신 학자 위주로 짜였으며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임채정 인수위원장을 제외하곤 대부분 배제됐다. 학자들은 당선자의 눈과 귀를 잡는 권력게임에 아무래도 서툴게 마련이다. 그 결과 생긴 권력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이씨를 정점으로 한 386 측근들이 메우게 된 것이다.

당선자 비서실 기획팀장을 맡은 이씨는 이때부터 참여정부의 밑그림 그리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미국식 백악관 모델을 본떠 청와대의 부처별 소관수석제를 폐지한 게 우선 이씨의 작품으로 꼽힌다. 현 청와대 체제의 교과서는 박세일 전 청와대 수석 등이 집필한 <대통령의 성공조건>이었는데, 이씨는 이 무렵 박 전 수석의 아이디어를 흡수해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참여정부의 조각 단계에서도 이씨는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인수위 분과 차원의 공모 작업과 별개로, 부처별 장관 후보 적임자 리스트를 만들어 당선자에게 보고했다. 이미 이씨가 실세로 떠오르던 상황이어서 각계로부터 그에게 정보가 집중되고 있었다. 조각 단계에선 주요 포스트에 개혁 성향 학자군을 전진배치할 것이냐, 아니면 안정감을 중시해 관료를 중용할 것이냐는 논쟁이 있었다. 이 무렵 이씨는 “에이스 중의 에이스를 발탁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 결과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상징하는 ‘세대교체형 관료 중용’이라는 흐름이 나타났다.

청와대 비서관·행정관 인선에선 ‘노무현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386이 약진하고 유종필·이충렬·윤석규씨 등 70년대 학번들이 대거 탈락했다. 이를 두고 탈락자들 사이에선 “이광재가 83학번”이라며 “그 위 학번들을 껄끄럽게 여긴 결과”라는 해석들이 나왔다. 이씨는 2급 국정상황실장이 됐다.

정권 출범 뒤로도 이씨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는 문희상 비서실장과 정찬용 인사보좌관, 정무 민정 홍보 국민참여 수석비서관으로 짜인 인사위원회에서 수석 이하급 인사로 유일하게 정규 멤버로 참여했다. 한 인사위원은 “이씨는 심의 대상이 어느 자리이든 후보군에 관한 정보가 풍부했다”며 “다른 위원들이 자기가 모르는 분야라서 할 말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잦은 데 반해 이씨는 의견을 활발히 개진한 편”이라고 전했다.

합참의장을 인선할 때 이씨가 국방부 의견과 달리 비육군 출신 기용을 강력히 주장해 인사위원회 차원의 결론을 사실상 이끌어냈던 예가 그런 맥락으로 꼽힌다. 조영길 국방장관이 반발하면서 대통령 면담을 통해 육군인 지금의 김종환 합참의장으로 뒤집어졌는데, 이씨의 파워만은 유감없이 확인되었던 셈이다.

국정상황실이 청와대의 중추신경으로

이에 따라 시중에선 “한자리 하려면 이광재 줄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참여정부가 인사의 투명화를 최대 치적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공직 진출 희망자들 사이에선 “시스템은 시스템이고…”라는 시니컬리즘이 싹터가고 있었던 셈이다.

청와대 내부에서 국정상황실의 위상도 독특했다. 국정상황실은 실장 이씨를 포함해 27명의 행정관을 두어 비서관급으로는 청와대에서 가장 큰 조직이었다. 인원 구성 측면에서도 사건·사고에 대비해 24시간 순수 상황근무를 하는 경찰 파견인력 5명 외에 국무조정실·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산업자원부·중앙인사위원회·해양수산부·국정홍보처 등 정부의 주요 부처를 망라해 부이사관 또는 서기관급으로 파견자를 받았다.

국정상황실을 여러 부처를 망라해 구성한 것은, 이 조직에 대통령의 지시사항과 부처의 정책 진행상황을 크로스체크하는 임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정우 실장과 권오규 정책수석이 이끄는 정책실 소속 행정관들이 각 부처의 상황을 파악하는 ‘단순 연락관’ 성격이라면, 국정상황실은 일종의 암행모니터 기능을 지녀온 셈이다. 지난 5월 1차 청와대 개편 때는 이씨를 팀장으로 국정상황팀을 만들면서 홍보수석실에 있던 여론조사비서관실을 흡수함으로써 이씨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국정상황실은 상황보고서를 작성해 매일 아침 대통령 관저로 보냈다. 또한 각 정부 부처와 유관기관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보고서 가운데 대통령이 꼭 읽어야할 것들을 추리는 업무도 국정상황실에서 맡았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는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를 최종 선별하는 일을 부속실장이 했는데, 이 업무도 국정상황실로 옮겨간 셈이다.

이에 따라 국정상황실은 자연스럽게 청와대의 중추신경으로 자리잡아갔다. 부처별 소관수석제도를 폐지함에 따라 청와대의 내각 장악력이 떨어진 가운데 생긴 공백을 국정상황실이 부분적으로 메운 셈이다.

국정상황실은 대통령의 일정 기획이라는 중요한 업무도 담당했다. 일정 기획은 대통령의 메시지 관리와 직결된 업무로, 국정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모기능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에서는 문희상 비서실장과 이광재 국정상황실장, 권오규 정책수석, 윤태영 대변인, 정만호 의전비서관 등 5~6명이 매주 한 차례씩 일정기획회의 형식으로 회동하곤 했는데, 이들은 곧바로 청와대 내부의 핵심 이너서클로 떠올랐다.

이벤트 기획 재주꾼을…

사실 어느 조직이나 실세는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 좀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정보와 권한이 집중되는 것까지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따라서 실세냐 아니냐보다는 일을 제대로 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씨는 세간의 386 이미지와 달리 적잖이 보수적 입장에서 노 대통령을 보좌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반기 화물연대나 철도파업, 전교조 네이스 파동 등 노사갈등이 불거졌을 때의 일이다. 정부의 해당 부처들은 국정상황실과 민정수석실, 정책실 등 청와대의 여러 부서로 상황보고서를 보내면서 청와대와의 조율을 희망했다. 단일한 소관수석실이 없어 조율 창구가 복잡한 탓이었다. 해당 부처의 한 관계자는 “이런 가운데 국정상황실쪽의 대처 방향 제안이 다른 부서에 비해 좀더 보수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공권력 투입’ ‘단호한 대처’ 따위의 이야기들이 국정상황실쪽에서 좀더 강하게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다.

이 무렵 노 대통령은 사회 갈등을 놓고 “대화로 푸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가 “법대로 단호히”라는 상반되는 메시지 사이를 오갔다. 이런 모습은 노 대통령이 애초의 대선공약 정신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비쳤으며, 그 결과 노동계와 시민사회 등 지지층이 이반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런 흐름과 이씨의 국정상황실이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해왔다는 점이 결부되면서 청와대 밖의 386 동년배들 사이에선 “이광재의 보수성이 문제”라는 인식들이 형성되어갔다. 전경련 등 보수세력의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정신 퇴색의 대표적 예로 꼽히는 ‘2만달러 시대론’도 청와대 내부에선 이씨를 비롯한 몇몇 참모들이 선도한 결과라는 시각이 많다.

이씨는 원래 노무현 캠프 안에서도 아이디어맨으로 꼽혔다. 특히 이벤트 기획과 발랄한 홍보카피를 만들어내는 데 능한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본디 차분하게 업무를 챙기거나 조직을 치밀하게 관리하는 쪽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이씨의 국정상황실이 일정기획 업무를 맡은 가운데 마련된 대통령의 ‘동선’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7월 ‘여성 공무원과의 대화’ ‘세무 공무원과의 대화’ ‘근로감독관들과의 대화’ 등 대화라고 이름을 붙여 각급 공무원

들과의 특강 정치를 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전파한다는 취지로 공무원 몇백명씩을 불러 점심을 함께 하면서 두세 시간씩 대통령이 연설하고 참석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정들의 효과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쏟아낸 직설적 언행이 노 대통령을 공격하는 새로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차분히 국정을 수행하기보다는 마치 선거캠페인을 하는 것같다”는 반응들도 나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청와대는 9월부터 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 부처 장관과 이해당사자, 전문가 등이 사회갈등 현안을 토론하는 ‘국정토론마당’을 매달 한 차례씩 열기로 했다고 8월18일 발표했다. 첫달에는 ‘자유무역협정(FTA)과 농가 지원 대책’을 주제로 내걸었으며, 다음달에는 국민연금 개혁방안을 테마로 한다는 계획이었다.

보수세력 공격의 제물?

그러나 한국방송은 고심 끝에 청와대의 중계방송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통령과 100여명의 관련 당사자가 토론하되, 무슨 결론을 내리는 자리도 아닌 형식 등을 ‘기이하게’ 여긴 탓인지 발을 담그길 주저한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도 “공론화를 중시하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대통령 참석 토론회를 여는 순간부터 농민들이 농림부는 젖혀두고 청와대가 문제를 해결하라고 달려들게 될 것”이라며 부작용을 우려했다. 한 정치학자는 “청와대가 이벤트 업체냐”라며 의구심을 표시했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때마침 멕시코 칸쿤 이경해씨 할복자살 사건과 겹치면서 흐지부지 취소됐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최초의 제안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설명하지만, 일정기획을 담당한 국정상황실과 무관해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10월18일 사표를 제출하면서 “나에게 이 자리는 권력이 아니라 의무였고 사명이었다.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내 개인 때문에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깨끗이 물러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밝혔다. 그와 가까운 청와대의 한 행정관도 “광재 형은 몇차례나 그만두려 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동료들도 이씨가 권력이나 부를 탐했다고 보진 않는다. 그보다는 일을 좋아하며 재능을 발휘하길 즐겼다며 그의 ‘선의’를 인정해주려 한다.

그의 낙마는 보수세력의 공격에 따른 제물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에게 적대적인 보수신문들이 정권 초기부터 그와 386 참모들을 ‘약한 고리’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보수신문들의 논조에선 ‘386’을 때림으로써 노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소수 386의 대표’ 이미지로 격하·고립시키려는 듯한 의도가 읽혔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통해 시대정신을 공유해온 동년배들조차 이씨의 처지를 강력하게 엄호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청와대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을 보면 이른바 ‘386 정신’과도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2003/10/021003000200310220481061.html



The Hankyoreh Plus copyright(c) webmaster@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