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10월15일 제480호 

권력게임 ‘이판사판’

재신임 국민투표 관련 정치권의 역전 노림수… 친노·반노 전선 형성되면 정계개편 가능성도

정치권이 내년 총선과 권력구도 전체를 새로 짜는 건곤일척의 승부에 빨려들어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판 승부’를 제안하면서 자신의 자리마저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과 각 정파는 판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짜기 위해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재신임 방법= 노 대통령은 10월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12월15일께 재신임 국민투표 △불신임되면 내년 2월15일 사임 △내년 4월15일 총선 때 대통령 보궐선거 함께 실시 등의 정치 일정을 제시했다.

노 대통령이 주도적·공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재신임 국민투표론은 조만간 대세가 될 것 같다. 현행 헌법이 국가안위에 관한 주요 정책만을 국민투표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당사자인 대통령이 자리를 걸겠다는 마당에 위헌 시비가 큰 힘을 얻긴 어렵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밀어붙이는 의도는 비교적 간명해 보인다. 이유가 어찌됐든 국정평가 지지율이 30%선에 머무는 상황,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인 통합신당의 총선 열세가 예상되는 상황 탓이다. 내년 총선에서 신당의 패배와 함께, 4년 임기를 남기고 레임덕에 빠질 게 뻔하다면 판을 근본적으로 흔들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진/ 재신임 국민투표를 앞두고 여야 정치권은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표로 긴급하게 대책 마련에 들어간 한나라당, 민주당, 통합신당의 표정.(맨 위부터 아래로)


한나라당 주류에는 ‘한판 승부’ 필요성에 공감하는 정서가 우세하다. 최병렬 대표가 노 대통령의 최초 재신임 제안이 나온 직후(10월10일) “재신임을 가급적 빨리 해야 하며, 방법은 국민투표가 적당하다”고 응답한 것을 봐도 그렇다. 한나라당 주류를 형성한 영남권 보수파 의원들은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노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평소 주장해왔다. 그런 마당에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자청한 것은 ‘불감청 고소원’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도 수도권 의원들은 다르다. 정병국·맹형규·김원길 의원 등은 “헌정 중단과 국정 혼란을 우려하는 안정희구 심리 때문에 재신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며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의 의도에 말려들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에 따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10월13일 “국민불신과 측근비리에 대한 책임론에 대해 투표를 해야 하며, 정치권 전반의 부정부패를 연계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조금 바꿨다. 국민투표 수용 여부를 확정하기 전에, 노 대통령을 좀더 압박해보자는 계산인 셈이다.

민주당은 고민이 가장 깊다. 박상천 대표는 10월10일 “헌법에서 외교·안보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돼 있지 다른 것은 할 수 없다는 명시적 규정이 없기 때문에 국민투표가 불가능하진 않다”고 말했다. 차제에 노 대통령을 ‘부분적으로’ 끌어내려 외교·안보만 담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내정권력은 각 정파가 분점하자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구상을 바탕에 깐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10월13일 최고위원회 뒤 유종필 대변인은 “대통령의 진퇴에 대한 국민투표는 위헌이라는 의견이 다수 헌법학자들의 견해이며, 따라서 국민투표법을 개정하더라도 불가능하다”며 “국민투표 여부의 최종 결정 권한은 국회에 있다”고 국민투표 유보론으로 돌아섰다.

민주당의 어정쩡한 태도는 지지층의 다수가 노 대통령 불신임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김경재 의원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그만두게 운동할 수도 없다는게 민주당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김영환 의원은 “지역별로 볼 때 호남에서 노 대통령 재신임 찬성여론이 가장 높다”며 “노 대통령이 좋아서라기보다 노 대통령을 끌어내리면 한나라당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불안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통합신당은 애초 “대통령의 고뇌는 이해하지만 재신임 제안은 문제가 있다”던 입장에서 ‘대통령 결정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통합신당의 정동채 홍보기획단장은 10월13일 “대통령이 현행법 테두리에서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여야간 조속한 합의가 있었으면 한다”며 국민투표법 개정을 통한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했다.

정계개편 가능성= 재신임 정국은 ‘노무현 대 반노무현’이라는 큰 구도로 정계를 양분·재편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예견된다. 노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대로 대통령 신임 국민투표가 실시될 경우 국회의원들은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일부 수도권 의원들이 노 대통령 불신임 운동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흐름이 그런 징후다. 한나라당 의원들이야 지금으로선 재선 전망이 높기 때문에 당을 이탈할 가능성이 적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자신들의 입지도 불안한 편이다.

설훈 의원(민주당)은 이런 맥락에서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민주당과 통합신당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결합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분이 취약한 분당의 결과로 고심해오던 두 당 의원들이 자연스럽게 재결합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양대 진영의 딜레마= ‘노무현 대 반노무현’ 진영으로 갈려 신임·불신임 운동을 펼친다고 할 때 두 진영은 각기 다른 딜레마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노무현 진영은 “정치개혁의 전기로 삼자”(김원기 통합신당 창당준비위원장)는 깃발로 ‘개혁 대 수구’ ‘낡은 정치 대 새 정치’의 구도를 짜려 하고 있다. 이렇다 할 활로가 없던 차에 오히려 승부수가 될지 모른다는 희망도 이들은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왜 노무현을 재신임해야 하는지”를 설득할 적극적 명분을 찾기 어렵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이런 점을 잘했으니 계속 맡기는 게 옳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국정평가 지지율이 낮은 것은 그렇게 주장하기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반노무현 진영은 노무현 정권 심판을 정면에 내걸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자격이 없는 것으로 검증되었다며, 더 이상 끌고 가는 것은 국익에 반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반노 진영은 노 대통령을 끌어내린 다음의 대안이 궁색하다. 보궐선거를 다시 하자니 마땅한 주자가 없고, 내각제 개헌 등은 지지 여론이 낮기 때문이다. 헌정 중단에 따른 혼란을 싫어하는 안정희구 심리도 이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국민투표 향방= 청와대쪽의 최대 희망은 신임 투표를 통해 70~8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국정 운영의 동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경우 총선에서 통합신당의 승리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신임 투표가 부결되면 노 대통령은 미련 없이 사임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부결될 경우 내년 2월15일 사임하겠다는 일정은, 과도기 혼란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기간이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에서는 이기되 10% 안팎의 근소한 차이가 나는 제3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확실한 재신임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어렵고, 패자쪽에서도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이 애초 제기했던 ‘국정 발목잡기 정쟁’이 재연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대체 재신임 투표를 왜 했는지 의문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절차와 경로=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란 게 헌정 사상 처음이기 때문에 절차와 경로가 모두 불확실한 상태다. 과반수 찬성률을 신임으로 볼지, 1%라도 많으면 신임으로 볼지도 법규정이 없는 상태이며, 신임·불신임 운동을 위한 절차와 방법도 현재로선 아무런 규칙이 없다. 이에 따라 청와대와 정치권 사이엔 국민투표 관련법 정비를 놓고 치열한 ‘샅바 싸움’이 예상된다.

글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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