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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표지이야기 등록 2003.09.25(목) 제477호

[표지이야기] 북한, 남쪽 실향민과 화해한다?

평양 근처 고향방문 허락… 관광 순조롭게 지속되면 다른 지역도 가능해질 듯

“죽기 전에 고향땅 한번 밟아보려고 그토록 즐기던 술, 담배를 다 끊었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실향민 김아무개(75)씨는 감격에 겨워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9월16일 고향의 옥수수밭 옆 조그만 공터에 평양소주를 한잔 따라놓고 조상들을 향해 막 큰절을 올린 뒤였다. 같은 고향의 친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술과 담배로 날과 밤을 지새다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단다. 하지만 그는 늘 악착같이 살아남아 반드시 고향땅을 밟고야 말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 이번 평양관광코스 중에 고향인 정주가 포함돼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서둘러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도 1차 관광단에 포함되었다.

집을 나서면서 다른 몇몇 고향사람들에게는 “그냥 서울 딸네집에 한번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실제 고향땅을 찾아볼 수 있을지 못내 믿기지 않아 일단 자신이 먼저 다녀온 뒤 신청하라고 권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꿈속에서만 그리던 고향의 흙을 만져보고, 물을 마실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됐다. 53년 만의 귀향이었다.

‘배신자를 환영하는 북한 사회’

이처럼 남한에는 평양방문을 50년 넘게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바로 한국전쟁 때 북녘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이다. 통일부에 등록돼 있는 북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만 15만1천여명에 이른다. 남북 당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지금도 주선해주고 있으나 아직도 극소수만 흩어진 가족친지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고향땅을 방문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향땅 혹은 인접 지역 방문은 가능해졌다. 물론 아직도 관광코스가 한정돼 있어 모두가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당장 평양·안주·정주·향산·남포 등에 살았던 실향민이나 이산가족들은 고향의 흙내를 맡을 수 있게 됐다. 또 평양관광이 순조롭게 지속되면 관광코스가 더 다양해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 당국은 그동안 실향민들을 ‘고향을 버린 배신자’로 규정해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아직도 실향민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반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듯하다. 조용한 방문은 막지 않겠지만 단체로 망향제를 지내는 등 요란한 행사를 치르는 데는 반대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실향민들의 귀향을 전례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향 소식과 관련된 질문들에 스스럼없이 친절하게 답해주었고, 멀리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는 지금은 어렵지만 조만간 고향땅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기대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번 1차 평양관광단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북녘 땅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었다. 바야흐로 실향민과 북한 당국간의 50여년 만의 본격적인 화해시대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별도로 ‘고향 데려가달라’ 떼쓰면 난감

평양관광을 주관하는 평화항공여행사쪽은 앞으로 관광경비를 줄여 실향민들이 돈이 없어 고향땅을 밟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할 작정이다. 박상권 사장은 “이번에 일단 시범적으로 평양관광을 실시해보고, 가급적 더 많은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관광경비를 줄일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쪽이나 평화항공여행사쪽은 이산가족들이 고향에 데려가달라고 떼를 쓰거나, 공개적으로 가족을 찾아달라거나, 직접 연락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데는 난감해하고 있다. 이럴 경우 다른 사람들의 관광 분위기를 해칠 뿐 아니라, 추가 관광 자체가 중단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관계자들은 우려한다. 이산가족 문제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만큼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평양관광에서도 관광코스와는 동떨어진 곳에 고향을 둔 일부 실향민들이 별도로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북쪽 안내원들에게 요청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 실향민은 북쪽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당장은 처지가 비슷한 더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 가까이라도 방문할 수 있고, 훗날에 누구라도 고향땅에 직접 갈 수 있도록 안내원들이 좀더 애를 써달라는 당부만을 남겨 주위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주= 글·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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