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8월28일 제474호 

누가 뭐래도 손으로 쓴다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펜과 붓을 드는 사람들… 디지털 시대의 고시생들이 펜글씨를 배우는 까닭

좀체로 손으로 글쓸 일이 없다지만 나쁜 글씨체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

8월22일 오전 서울 종로1가 대한글씨검정교육회 사무실에 대학생 이아무개(26)씨가 상담하러 찾아왔다.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이씨는 악필이 고민이다. 이씨는 실력이 아니라 글씨 때문에 떨어진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이씨의 하소연을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무시하기는 힘들다.

한 사법고시 준비생(29)은 “필체가 좋지 않은 수험생들은 글씨체를 바꾸는 게 좋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주관식인 2차 시험답안이라면 보기 좋은 필체와 보기가 짜증나는 악필로 쓴 답안의 점수 차이는 평균 3~5점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주위를 보면 필체가 좋지 않아 2차 시험에서 간발의 차이로 탈락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각 대학의 법대 고시준비반에서는 ‘좋은 글씨’ 특강을 열기도 한다.

필체가 좋지 않아 고민하는 수험생들


사진/ 펜글씨는 쇠퇴해도 붓글씨는 독자적 영역을 지키고 있다. 연세대학교 붓글씨 동아리 서우회의 한 학생이 붓글씨를 쓰고 있다.(김진수 기자)


내용이 같은 답안이라면 깨끗하고 알아보기 쉽게 정리된 답안이 유리하다는 게 각종 시험답안 채점자들의 공통된 말이다. “교양과목 채점을 할 때 답안지 수백장을 제한된 시간 안에 읽어야 한다. 그런데 글씨가 엉망인 답안은 보는 순간 짜증이 난다. 글씨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람인 이상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대학교수는 말했다.

현재 서울 시내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실에서 가르치는 펜글씨 학원은 없다. 인터넷이나 통신교육, 개인지도 등으로 글씨 지도를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펜글씨 학원은 모두 문을 닫았다. 90년대 들어 군대에서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기계 차트가 도입된 뒤로 차트병(행정병) 양성기관에서 교육을 받으면 행정병으로 입대하는 제도가 없어진 것도 펜글씨 학원 쇠퇴의 한 원인이다.

권혁시 대한글씨검정교육회 이사장은 “일본에서는 컴퓨터 보급으로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늘자 이런 현상을 ‘자맹’(字盲)으로 규정하고, 자맹 퇴치운동을 벌일 정도였다. 우리도 초등학교 저학년에 ‘쓰기’ 과목을 강화하고 바른 글씨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으로 쓴 글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주부 오서현(33)씨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남편이 지쳐 보이거나 미울 때면 연필로 편지를 쓴다. 오씨는 “편지를 쓰다보면 어느새 남편에 대한 서운하고 미운 마음이 사라진다. 편지는 닫힌 사랑의 문을 열게 하고,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준다. 이메일이 편리하지만 손으로 쓴 편지가 전하는 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학교 급식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수험생 어머니 사이에서는 자녀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주는 ‘도시락 편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는 한달에 하루 ‘엄마 사랑의 날’이 있다. 엄마가 도시락과 편지를 가방에 넣어주면 점심시간에 엄마의 편지를 읽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아이들도 도시락에 담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사랑을 먹는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사진/ 손으로 쓴 글씨는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장기수로 복역한 신인영씨의 구순 어머니가 보낸 편지와 신씨의 돋보기 안경.


대학 시간강사인 김인호(37)씨는 손으로 쓴 기말 리포터를 받는다. 동료들은 김씨에게 “요즘 학생들이 손으로 글쓰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시간강사가 겁도 없다”고 놀리기도 한다. “많은 학생들이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자료와 선후배들이 냈던 리포터를 짜집기해서 리포터를 내더라. 그래서 손으로 쓰라고 했다. 손으로 베끼는 동안 최소한 내용은 읽어볼 게 아니냐.”

펜글씨가 쇠퇴한 데 비해 붓글씨는 독자적 영역을 지키고 있다.

8월21일 저녁 7시 서울 연세대 대강당 서우회 동아리방, 은은한 묵향이 밴 동아리방에서 서우회 회원인 구본희(22·건축공학과 3년)씨는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잡았다. 허리를 숙여 화선지에 한획 한획 글을 써가는 구씨 옆에서 김홍규(68)씨가 글씨 지도를 하고 있었다. 김씨는 1980년부터 이 학교 서우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의 할아버지뻘인 김씨에게 20년 전의 학생들과 지금 학생들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차이야 많지요. 하지만 인간 본성은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필서는 인격 도야이고 자기 수양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선미가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정신문화인 서예는 이어질 것입니다.”

붓글씨 쓰면서 흐트러진 마음 다잡아

학생들은 “왜 자기들이 <한겨레21>의 취재대상이 됐는지” 궁금해했다. ‘쓰는 시대’에서 ‘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붓글씨를 쓰는 게 특이해 보였다고 설명해줬다.

학생들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주장했다. 강우진(22·경영학과 3년)씨는 “우리는 동아리방에서 컴퓨터로 바둑도 두고, 농구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다른 동아리와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남들 하는 것 다 하면서 남들이 안 하는 서예도 하는 거다. 남들 안 하는 걸 하는 우리 동아리가 오히려 요즘 젊은이들 정서에 맞는 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구본희씨는 “붓글씨는 컴퓨터로 쓴 것처럼 선과 획을 똑바로 긋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글씨를 어떤 마음으로 쓰느냐가 중요하다. 글씨가 잘 써지면 정말 희열이 느껴지고 5~6시간을 내리 글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서우회도 가입회원이 줄어들고 동아리방에서 글쓰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육필의 시대가 저물어도 붓과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을 것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 숨결을 남기는 ‘육필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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