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8월21일 제473호 

검사님! 이번엔 자신 있습니까

권노갑 구속에 이어 정치인들 소환 예정…김영완 직접 진술 확보 못해 유죄 판결 불투명

지난 7월4일 저녁 서울 서초동의 한 음식점. 대검찰청 고위 수사관계자는 아끼는 후배검사 2명, 몇명의 절친한 법조 출입기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검사와 기자들 사이의 저녁 술자리가 으레 그렇듯 이날도 폭탄주가 돌았다. 평소보다 좀 과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어느 술자리의 ‘천기누설’


사진/ 8월12일 송광수 검찰총장(오른쪽)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점심식사를 하러 대검청사 구내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번 수사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연합)


“현대 비자금 총액은 1천억원 규모다. 한나라당 의원 5명도 받았다.” 현대 비자금 수사와 관련한 언급이었다. 수사와 직접 관련 있는 지위에 있던 그의 이날 언급은, 그 뒤로 진행된 이번 사건의 규모와 강도를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본인과 주변 후배검사들의 신속한 입막음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발언은 몇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발언 당시는 검찰이 특검 수사팀의 수사기록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다시 말해 검찰이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의 수사기록에 기대지 않더라도 독자적으로 이번 사건을 수사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이미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의 발언이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의 혐의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150억원+α’ 수사가 본격화한 지 두달 가까이 흐른 지금 150억원 부분보다 ‘+α’쪽이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정치적 파장도 깊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검찰은 150억원에 대한 수사보다 ‘+α’쪽을 먼저 건드렸다. 사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쪽에서 받았다는 150억원(양도성예금증서) 부분은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이 대부분 혐의를 입증해놓았던 것이다. 또 ‘거악’과 맞서는 것이 본업인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 검사장)로서는 이 부분에 치중하면 특검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집단으로 비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검 중수부가 눈독을 들인 ‘+α’ 부분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권 전 고문의 비자금 200억원 수수 혐의와 함께 여야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현대쪽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현재 수사팀이 소환하려고 하는 정치인은 5~6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박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대로 비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을 차례로 부를 예정이다. 소환 일정은 8월20일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개별 정치인들의 수사는 추석 연휴기간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비중 있는 정치인들이 소환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소환 정치인들의 면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파괴력 있는 중진의원들이 포함됐을 경우 정치권에 미칠 파장은 만만찮아 보인다.

검찰 수사내용대로라면 권 전 고문이 현대쪽에서 받았다는 비자금 액수는 모두 200억원으로, 박 전 장관의 15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검찰 고위 관계자가 흘린 ‘1천억원’까지는 아니지만, 검찰이 현재까지 수사과정에서 밝힌 전체 비자금 규모도 350억원에 이른다. 또 최근 정치권에서는 대검 중수부에 소환될 한나라당 의원들의 실명이 오르내리고 있다. 고위 관계자가 술자리에서 누설한 ‘천기’(天氣)가 현실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익치 증언도 ‘말바꾸기’ 전력 문제


사진/ 8월15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서울구치소로 떠나고 있다.(한겨레 김봉규 기자)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권 전 고문의 혐의를 입증하고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검찰에 따르면 권 전 고문은 2000년 2월 말 서울 신라호텔 1층 커피숍에서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김영완(50·해외도주)씨 등이 있는 자리에서 정 의장한테서 대북사업 전반에 대한 지원요청을 받자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권 전 고문은 이 자리에서 “4·13 총선도 있어 돈이 많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잘 돼야 대북사업이 잘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 의장은 이에 따라 4차례에 걸쳐 현금 200억원을 사과상자 크기의 서류상자에 나눠담아 전달하는 방식으로 김영완씨를 통해 권 전 고문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수사팀의 결론이다. 현금은 김씨의 자택에 보관됐고, 권 전 고문은 필요할 때마다 현금을 찾아갔다는 게 검찰 조사결과다. 한마디로 김씨가 권 전 고문의 ‘금고지기’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또 수사과정에서 권 전 고문한테서 “김영완이 현대에서 100억원을 받았다고 했지만 10억원만을 빌렸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스스로 현대쪽에서 100억원이 나온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인정한 셈이고 그 정도면 절반 시인이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게 수사 관계자의 말이다.


사진/ 김영완씨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검찰은 김씨가 200억원의 현금을 이 집에서 보관했다고 밝혔다.(연합)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에서 드러나고 있는 ‘흠결’은 유죄 판결을 자신할 수만은 없다는 전망을 불러온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허점은 미국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진 김영완씨의 직접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대쪽 돈을 받은 김씨와 권 전 고문의 직접적 ‘연결고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검찰 수사결과를 꼼꼼히 따져보면 비자금의 전달경로인 ‘현대(정몽헌-이익치-김충식)→김영완’까지를 설명하는 진술은 많은 데 비해, 가장 중요한 대목인 ‘김영완→권노갑’의 전달과정은 간단히 정리돼 있다.

검찰은 권 전 고문이 정 의장에게 “200억원을 잘 받았다. 고맙다”는 전화를 한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 의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법정에 나와 진술해줄 수 없다는 얘기다. 검찰에 적극 협력하고 있는 이익치 전 회장의 진술에 대해서도 권 전 고문쪽에서는 공격할 여지가 남아 있다. 이 전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말바꾸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19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수사 때 “내가 다 했다”고 진술했다가, 지난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몰랐을 리 없다”고 말을 바꿨다. 그 뒤 검찰은 수사를 통해 그의 발언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결론지었다.




진승현 게이트의 재판될까

김씨가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제출한 진술서 역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이 진술서에서 박 전 장관이 뇌물로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150억원 관련 내용은 자세하게 밝히면서도 권 전 고문 부분은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수사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외국에서 임의로 작성된 진술서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도 무척 낮다는 게 변호사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김씨가 200억원이 넘는 국내 재산을 검찰에 압류당한 상황이어서 그가 보낸 진술서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권 전 고문은 지난 7월 초 진승현 게이트 항소심에서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한테서 5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1심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관련자들의 진술뿐인데 청탁을 받은 분위기나 상황이 아니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김씨의 귀국 여부는 검찰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고 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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