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8월06일 제471호 

시련은 혹독했고 실패는 참담했다

비운의 현대가문, 정권과의 갈등에서 그룹의 운명을 건 대북사업까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1991년에 펴낸 자서전의 제목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맨손으로 한국 최대의 재벌그룹을 일군 사람다운 패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문구다. 1915년생인 그는 책을 낼 당시 이미 76살의 노인이었으나 육체의 연령은 불도저 같은 그의 패기를 조금도 꺾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자서전 출간 이후 그와 현대그룹이 걸어온 길은 시련을 넘어 ‘실패’의 연속이었다.

92년 대선부터 쇠퇴의 길로


사진/ 한자리에 모인 정주영가의 직계가족. 정주영 명예회장의 말년은 바람 잘 날 없었다.(현대50년사)


그룹을 등에 업고 밀어붙인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와 그뒤 이어진 정권과의 갈등, 평생을 일군 그룹 계열사들의 잇따른 몰락, 그리고 자식들간의 재산다툼으로 그의 말년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2년여, 그가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던 대북사업도 유업을 받든 5남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시들어갈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올라와 쌀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청년 정주영이 자신의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40년,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된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설립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그는 7년 뒤 현대건설의 뿌리인 현대토건을 설립해 건설업에도 뛰어들었다. 현대토건은 미군숙소 공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1957년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내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마침내 1960년대 초반에 국내 도급순위 1위의 건설업체로 떠올랐다.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대규모 국책사업을 큰 이익 없이 수주하는 등 정부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그는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1968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포드신화를 창조하고, 1972년 현대조선을 설립해 현대중공업을 오늘날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로 키우기도 했다. 1983년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전자산업에 뛰어드는 등 정주영 회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현대그룹을 계열사 60개에 21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국내 최대 그룹으로 일구었다. 1981년 서울올림픽(88년)을 유치한 것도 그의 공로로 꼽힌다. 현대그룹과 정씨 일가에게는 이 때가 전성기였다.

현대그룹이 쇠퇴의 길로 접어든 분기점은 1992년 정 회장이 국민당을 창당해 총선과 대통령선거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정치헌금 요구에 시달리고, 정치헌금을 거절했다가 세무조사를 받기도 한 그는 현대그룹을 사실상 하부조직으로 삼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물론 패배했고 그로 인한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그는 결국 국민당을 해체하고 경제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뒤 김영삼 정부의 보이지 않는 탄압으로 현대그룹은 오랜 침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현대그룹이 재기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다. 대북 햇볕정책에 호응해 금강산 관광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현대의 대북사업이 정부정책에 협조하며 어떤 반대급부를 노린 것이었는지, 정주영 회장의 순수한 큰뜻에서 비롯됐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현대그룹이 빅딜 과정에서 엘지반도체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것이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는 대가가 아니었느냐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1989년 방북 때부터 정주영 회장이 뜻을 두어왔고, 그룹의 운명을 걸 정도로 막대한 돈이 드는 사업을 수익에 대한 아무런 보장 없이 감행했다는 점에서, 결코 뒷거래를 노린 사업이라고 깎아내리기 어렵다.

‘왕자의 난’으로 치명적 타격

현대는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로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고, 그해 11월 금강산 관광사업의 닻을 올렸다. 현대그룹은 금강산사업 등 대북사업에만 1조원 이상의 출혈을 감수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엄청난 출혈은 현대그룹의 재무건전성을 급격하게 갉아먹었다.

그런 가운데 2000년 차남 몽구 회장과 몽헌 회장 사이에 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인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현대그룹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현대는 왕자의 난을 통해 몽구 회장의 자동차 그룹과 몽헌 회장의 잔여 소그룹으로 분리됐다. 현대자동차는 이후 승승장구했으나, 정주영 회장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대북사업은 갈수록 험난한 길에 부닥쳤다.


사진/ 9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던 정주영 명예회장은 패배 뒤 후유증에 오랫동안 시달렸다.(한겨레 장철규 기자)


대북사업을 이어받은 몽헌 회장의 몫이던 현대건설과 현대반도체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끝에 2001년 그룹에서 분리돼 나갔다. 그해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현대중공업도 현대의 품을 벗어났다. 특히 몽헌 회장은 현대투신증권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보유 지분의 대부분을 담보로 제공하면서 현대상선 외에 의미 있는 지분을 갖지 못한 상태로 전락했다. 대북사업을 총괄했던 현대아산은 자금줄이 막혀 대북송금을 제때 하지 못했고, 한때 정부의 간접적 지원을 받았으나 현 정부 들어서는 야당의 반대로 그것마저 어려워졌다.

지난 2002년말 대선에서 정주영 회장의 6남 몽준(현대중공업 고문)씨가 노무현 후보와 손을 잡았다가 투표를 하루 앞두고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전격 철회해 손가락질을 받은 것도 현대가 비운의 한 단면이다.

현대그룹에 대한 마지막 타격은 새 정부 들어 시작된 대북사건 송금 수사였다. 정주영 회장 부자가 열정을 불태운 대북사업은 역사적 의미가 크게 훼손됐고, 몽헌 회장은 그 와중에 목숨을 끊었다. 몽헌 회장의 죽음은 옛 현대그룹의 주력기업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고리조차 이제 끊어지게 됐음을 뜻한다.

민족화합의 길을 역사가 기억할까

물론 정주영 회장이 일궈놓은 현대호의 일부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그룹으로 남아 여전히 한국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유업을 맡긴 아들을 기대보다 일찍 하늘에서 만나게 된 ‘왕회장’이 현대그룹의 명맥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데 대한 안도감을 크게 느낄지, 아니면 생의 마지막을 불태운 사업이 뜻대로 이뤄지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더 크게 느낄지는 알 수 없다.

고 정주영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끝부분에 이렇게 썼다. “70이 넘게 살아오는 동안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신문기자였던 다섯째 아우 신영이를 잃고 아들 둘에 한 며느리를 잃었다. 이 개인적 불행은 나에게 다시 없는 아픔이며, 돈이 인간의 목적도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절실히 느끼게 했다.” 정주영·정몽헌 회장 부자가 그룹의 운명을 걸고 토대를 닦은 민족화합의 길을 역사가 기억한다면 그나마 그들은 위로받을 수 있을까.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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