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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싸움, 지쳐버린 황태자… 대북사업 총괄했던 왕회장의 적자, 아버지 닮은 뚝심으로 신임 얻었던 정몽헌 의장…
2001년 타계한 정 명예회장은 위기와 시련이 닥칠 때면 불도저와 같은 뚝심으로 다시 일어서곤 했다.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눈이 내릴 때는 다 오고 난 뒤에 마당을 쓸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말해주듯 전술적 후퇴는 있었지만, 살아 있는 한 그 어떤 시련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신임은 부담이었을까?
죽음을 선택한 정몽헌(54)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은 선친의 이런 생존철학을 거스른 것일까? 정몽헌 의장의 자살은 끝없는 시련 속에서도 한국경제의 거목으로 살아온 아버지 ‘왕회장’(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재벌 황태자나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정몽헌에 대한 연민까지 불러일으킨다.
경영자로서 그의 첫 출발은 순탄했다. 지난 92년에 세운 현대전자를 그한테 맡겼을 정도로 정 명예회장은 그의 경영능력을 일찌감치 인정했다. 그는 현대전자를 단기간에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 대열에 올리는 등 기회가 올 때 밀어붙이는 ‘현대맨’의 뚝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6공화국 때 넉달간 구치소 신세를 지는 등 90년대에 몇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의 고초와 시련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련시켰다. 6공 정부는 정 명예회장이 92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자 정 의장을 현대상선 비자금 조성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왕회장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아들인 후계자를 손봤다는 게 당시 재계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수감생활 중 정 의장은 사식을 거부하고 견뎌내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격려를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런 신임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일까? 왕회장 타계 이후 자주 차질을 빚어온 대북사업은 심리적으로 그를 더욱더 괴롭혔다. 정 의장은 98년 그룹 공동회장 취임에 맞춰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을 관장하면서 정 명예회장의 강력한 후계자로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현대그룹이 정 의장과 형 정몽구(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당시 현대정공 회장의 투톱 체제에서 정 의장의 원톱 체제로 돌아서는 게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난 99년에는 반도체 빅딜을 통해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과시했고, 그의 전성기가 활짝 열리는 듯했다. 2000년 3월의 이른바 ‘왕자의 난’ 때는 몽구씨를 제치고 공식적으로 현대그룹의 법통까지 이어받았다.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과 정 명예회장의 생전 숙원사업이었던 대북사업을 계승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겉으로는 매우 왕성한 활동
그러나 사업가로서 이런 화려한 승승장구도 잠시뿐. 곧이어 시련이 닥쳤다. 정 명예회장이 세상을 뜨면서 형 몽구는 자동차그룹을, 동생 몽준은 현대중공업을 맡아 ‘마이웨이’를 선언하면서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왕자의 난’에서 패배의 잔을 삼켜야만 했던 몽구 회장은 이제 ‘글로벌 CEO’로 변신하면서 현대 패밀리를 대표하는 재계의 거목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나 왕회장이 가장 총애한 것으로 알려진 정 의장은 그가 이끌던 계열사들이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지면서 자신 역시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그가 이끌던 현대상선·현대상사 등은 부실기업으로 전락했고, 유동성 위기를 겪은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는 대주주 지분 완전감자로 자신의 손을 떠나 채권단한테 넘어가고 말았다. 재벌총수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도 현저하게 약화됐다. 뜻하지 않게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사업가로서의 운도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외로운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정 의장은 소탈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조직의 효율성과 상하간 의사소통을 중시했다.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할 정도로 수줍어해 한때 ‘촌색시’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소심한 면모와 달리 신입사원 씨름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현대 패밀리 특유의 강골도 갖추고 있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특히 일처리에 관한 한 정 명예회장 못지않게 치밀하고 ‘불 같은’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00년 왕자의 난 직후의 일화 한 토막이 이를 잘 보여준다. 몽구-몽헌 회장이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던 그해 6월 초 몽구 회장은 미국에, 몽헌 의장은 일본에 외유 중이었다. 그런데 몽구 회장이 갑자기 6월8일 급거 귀국했다. 몽구 회장은 다음날 아침 정 명예회장과의 독대를 통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약속받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아침에 정 명예회장의 청운동 집에 도착해보니 외국에 있는 줄 알았던 몽헌 의장이 자신보다 몇분 일찍 이미 거기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몽헌 의장이 한발 앞섰던 것이다.
혼란과 고통이 뒤엉켰을 내면세계
대북사업을 총괄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는 왕회장의 적자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선친의 지론을 2세인 자신이 다시 한번 현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왕회장이 떠난 빈 자리를 고독하게 지키면서 선친이 평생 일군 현대그룹의 회생을 꾀했다.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을 통해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왕회장이 92년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갑자기 늙어버렸듯, 그도 대북송금 수사 이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고 한다. 재기를 노리며 정력적인 대북사업 활동을 보였지만, 실상 그의 내면 풍경은 극심한 혼란과 고통으로 뒤엉켜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 명예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전설을 남기며 불굴의 철인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정몽헌 의장은 끝내 시련 앞에 무너진 ‘비운의 황태자’로 남게 됐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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