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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권리 ‘레드 카드’ 가난의 멍에 짊어진 채 사회적 고립감 깊어가… 취학아동에 대한 지원체제 서둘러 마련해야
고아원에서 지내는 2만여명의 아동들
서구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고아원이 전국적으로 270여개나 되고 그곳의 2만명 아동들은 지역사회에서 격리된 채 ‘가정’을 모르고 커간다. 그리고 중앙정부 예산 111조 7천억원 중 아동복지를 위해 쓰이는 예산은 0.075%에 해당하는 840억원이다. 우리 사회가 아동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찍이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는 20세기를 ‘아동의 세기’라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은 적어도 아동의 인권 확보와 아동복지의 발달이란 측면에서는 동토의 왕국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만큼 그 부모를 누구로 만났느냐에 따라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나라도 흔치 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해진 ‘일생일대 최대의 제비뽑기’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아이러니가 우리 사회에서는 심각한 이의제기 없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왜? ‘내 새끼’가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식 안에 그리고 우리 사회체계 안에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는 서구 선진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 사회에 전통적인 유습으로 강고하게 남아 있는 가부장제를 보자. 아동을 어른들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인식은 ‘장유유서’로 대변되는 유교전통과 결부돼 자녀를 그들의 부모 아닌 그 누구로부터의 간섭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내 새끼’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에서 형성된 무한개인책임주의가 결합되면 아동의 운명은 그저 그 부모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사회제도가 이들 부모-자식의 관계에 끼어들 여지는 지극히 적어진다. 오로지 그 아이를 책임지는 보호자이자 부양 의무자인 부모가 없을 경우에만 최소한의 정부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인권, 그 중에서도 사회권에 대한 후진적 인식도 한몫한다. 독재에 항거해 정치적 자유를 누리려는 열망은 시민권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지만, 그 이후 자본주의와 시장의 폐해로부터 구성원의 삶을 지켜나가는 데 필수적인 사회권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행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나마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주창하고 이를 쟁취해나갈 수 있는 노인·장애인·여성 등 성인과는 달리 아동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아동권은 성인들의 성숙한 사회권에 대한 인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동권의 저수준은 사회권의 현주소와 등치된다. 정녕 열악한 가정과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시민사회단체를 볼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은 그런 이유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진적인 아동권으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듣기 좋은 말로 ‘아동은 우리사회의 미래’라는 구두선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동을 대접해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집권하자마자 ‘슈어 스타트’(Sure Start)라는 빈곤아동퇴치정책을 선언했다. 집권 뒤 10년 안에 아동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고 20년 안에 이를 완전 퇴치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아동을 정책대상의 제일 우선순위로 올려놓았다. 아동수당을 올리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생활지원 수준을 늘리는 것은 물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여러 정책을 도입했다. 심지어 결혼수당 대신 아동세제공제(CTC·Children’s Tax Credit)를 도입해 아이가 있는 가정의 소득보전을 정책집행 1순위로 끌어올렸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평균출산율 1.17명이라는 ‘눈부신’ 가족계획의 성과 덕에, 지금의 추세를 단순하게 연장하면 2050년대부터 인구가 절대수치로 볼 때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침내 2120년께에는 한반도 인구 제로(0) 상태에 놓인다. 매우 기이한 예측이지만 적어도 통계기법에 따르면 그렇다. 이에 따르면 아동의 출산과 출산된 아동의 건강한 보호는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빈곤아동을 위한 정책 프로젝트가 매우 미비하다. 아니 이에 대한 필요성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심각한 ‘집단 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사회적인 소속감을 맛보지 못한 아동의 미래는 또 어떻겠는가?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맛볼 때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는 건강을 지켜주는 정서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지켜야 할 행동수칙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이런 사회관계 속에서이다. 어릴 때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고립감 자체도 문제지만 그로부터 정상적인 행동수칙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아동기의 빈곤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정상적 사회관계를 맺는 방식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 아동 자신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 아동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결론이므로, 이런 아동의 양산은 한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현재 교육부에서 학비를 지원받는 아동 40만명과 기초생활보장수급권 가구의 아동 16만명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빈곤아동의 최소치이다. 그러나 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차라리 미취학아동이라면 그나마 낫다. 알량하지만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보육료가 면제되거나 부담이 절반으로 줄기 때문이다.
공부방 양성화… 예산타령 그만 두라
그러나 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식적인 지원체계는 거의 전무하다. 전국적으로 300개 남짓의 민간 공부방에서 월 50만원의 박봉 속에 ‘희생’과 ‘봉사’로 중무장된 공부방 교사들이 열악한 공간이나마 빈곤아동의 극히 일부를 붙들고 있는 게 전부다. 국회는 공부방이나 지역센터의 법제화를 통한 양성화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정부는 공식적인 시설이 아니므로 예산이나 지원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수십만명의 빈곤아동들이 지금 몸서리치게 새기고 있을 사회적 고립감이 미래 우리에게 어떤 형태의 보복으로 되돌아올지 몸서리쳐지지 않는가 그러나 당장의 예산부족 타령 속에 주판알만 굴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관료들의 실상이다. ‘집단적인 백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동의 빈곤. 이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지수인 동시에 미래의 희망지수이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 후진성지수는 크기만 하고 미래의 희망지수는 초라하다. 그러나 수십만명의 빈곤아동이 방치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조차 보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암울한 현실이다.
이태수 |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부위원장 lts1115@kko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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