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7월10일 제467호 

대법원이 창피하다

소수의견 씨가 마른 보수적 판결…여성·노동·인권 관련 사건들은 최소한의 합리성도 유지 못해

한해 대법원으로 넘겨지는 1만여건의 사건 가운데 소수의견이 나오는 건수는 겨우 15건. 여성· 노동· 인권 관련 사건들은 최소한의 합리성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법원이 창피하다, 대법원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70). 그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이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돼 23년째 연방 대법관을 역임하고 있는 그가 지난 6월23일 미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대법원은 이날 미시간대 법학대학원(로스쿨)을 지원한 백인 3명이 “소수인종 우대정책(이른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으로 불이익을 받아 불합격했다”며 낸 소송에서 대학쪽 조처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는 자신을 뺀 나머지 8명의 연방 대법관들의 의견이 4 대 4로 팽팽히 맞서자 주저 없이 합헌쪽의 손을 들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오코너는 어퍼머티브 액션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판결에서 결정적 구실을 함으로써 어퍼머티브 액션에 진 빚을 갚았다”고 썼다.

한국과 미국 대법관들의 ‘본질적’ 차이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공교롭게도 같은 날 서울 서초동의 대한민국 대법원도 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한 현수막을 금지광고물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다”면서 나아무개씨가 춘천시장을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판결 내용이 알려지자 시민사회가 들썩였다.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상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인권퇴행적 판결이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판결의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급심과 헌법재판소 등에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취지의 판결 및 결정을 이미 했는데도 최고법원이 이를 무시해 판결의 논리성이나 신뢰성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후배 법관에게도 부끄러운 대법원 판결”이라고 혹평했다.

대법원은 어느 사회에서든 최고 사법기관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다. 사회의 규범적 이해관계를 최종적으로 판단해 내부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이정표 구실도 한다. 대법원 판결은 특히 하급심 판결의 잣대가 되는 동시에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인생과 일상생활에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오는 결정들을 포괄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의 방향과 내용에 따라 사회갈등의 해결방안이 나오고 새로운 사회적 흐름이 생겨난다.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사진/ 사회적 다양성을 대법원 구성에 반영하기 위해 여성, 흑인 등 소수자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미국 사법부의 전통이다.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오코너다.(GAMMA)


미국과 한국의 대법원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미국은 헌법재판소가 따로 없고 연방 대법관들도 종신제다. 대법원의 판단이 최고의 정치·사회적 규범이 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법원은 헌법재판을 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대법관들의 임기도 6년이다. 연임규정이 있지만 연임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두 대법원의 가장 큰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보다 ‘다양성’의 존재 여부다. 미국 연방 대법관 9명 가운데는 진보적 인물과 보수적 인물이 섞여 있다. 중도파로 분류되는 이들도 있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과 흑인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낙태 문제 △소수자들에 대한 우대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 △동성애 문제 △연방주의 △교회와 정치의 분리 등 5가지 주요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판결에서 사안에 따라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이에 비해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의 한국 대법관들은 ‘초록이 동색’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배경과 의식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된다. 50대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법원 안에서도 ‘초엘리트’ 코스를 거쳐왔다는 사회적 배경(사이드1 기사 참조), 보수적(때때로 극우적인) 판결 태도까지 너무도 닮은꼴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건수〉

연도

민사

형사

특별

합계

2001

7

3

4

14

2000

5

4

2

11

1999

7

5

3

15

1998

7

5

0

12

1997

4

7

3

14

대법관들이 얼마나 균질화된 집단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판결 과정에서 소수의견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4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대법원의 한 부에서 소수의견이 나올 경우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은 대법원장)로 넘어간다. 그러나 대법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전원합의체의 판결 건수(기존 대법원 판례를 바꿔야 하는 경우 포함)는 한해 대법원으로 넘겨지는 1만여건의 사건 가운데 15건을 넘지 않는다(표 참조). 한달에 평균 한번 꼴이다. 이 때문에 대법원 안팎에서는 “이회창씨 수준의 소수의견도 요즘엔 눈을 씻고 찾기 힘들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사건이 클수록 대법원 가면 깨진다

여기에 더해 대법원 판결의 보수화 흐름은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다. 특히 여성과 노동사건, 인권 관련 사건들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최소한의 합리성도 유지하지 못하고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울어지고 있다는 게 법조계와 시민사회의 일치된 분석이다.


사진/ 소수의견이 있을 경우 열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은 최근 몇년 동안 한 해 평균 15건을 넘지 못했다(왼쪽). 서초동 대법원 건물(오른쪽,김진수 기자)

하승수 변호사는 “최근 들어 민주주의나 인권의 문제처럼 상식적인 판단의 문제조차 대법원에 가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며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평균인의 가치판단 기준으로 볼 때도 최근 대법원 판결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불만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최근 몇년 동안에는 “사건이 클수록 대법원 가면 깨진다”는 말이 정설로 퍼져 있을 정도다. 즉, 소송가액이 크거나 이해당사자가 많아서 기업쪽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은 예외 없이 자본쪽 입장에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권두섭 변호사는 “노동과 자본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쟁점들에 대해서는 기본법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자본 편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서 “법철학의 부재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는데, 대법관들이 노동법을 다루면서 소유권 절대, 계약자유, 과실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시민법 논리를 들이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꼬집었다. 오랫동안 노동 관련 사건을 맡아온 김선수 변호사 역시 “노사간 힘의 역학관계 등 현실적 고려가 전혀 없이 형식 논리로 노동사건을 처리하려다보니 공공법리나 사회법적 원리를 중시하는 이들 사건의 특징에 대한 고려가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관들의 재판 업무를 실질적으로 보조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판사의 글은 대법원 판결이 왜 그렇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1년이 넘어가는 계약직 노동과 관련해 “1년을 초과하는 근로계약의 효력도 유효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에 대한 분석글에서 판결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와 같은 고비용 구조 등은 현행 근로기준법으로 대표되는 개별 근로관계법이 단순히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시장경제 원리를 크게 벗어나 근로관계의 형성, 내용 및 종료 등 근로관계 전반에 관해 법적 규제를 지나치게 강화하므로 기인하는 저능률, 고비용 및 경직성과 상승해 기업의 국제경쟁력 증대에 역시너지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철저히 기업과 사용자쪽 논리를 받아들인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폐쇄적이고 관료화된 인사시스템


사진/ 2000년 최초로 국회에서 대법관 후보 인사청문회가 열렸으나 수박 겉핥기식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이용호 기자)


국가보안법 등 인권 사건의 판결 역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노무현 정부 들어 한총련에 대한 전 사회적 대책이 폭넓게 논의되는 시점에 대법원이 무성의한 ‘이적단체 판결’로 찬물을 끼얹은 것은 대표적 경우다. 국가보안법 7조의 경우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에 대해 유엔 B규약 인권위원회가 지난 1999년 유엔 인권규약 위반 결정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판결 태도에서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오히려 입법기관이 법 개정을 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태도다. 오히려 진보적인 하급심 판결들에 대해 철퇴를 가하는 모습만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 판결의 보수화는 급기야 법원 내부의 세찬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법원 내부 통신망에 대법원 인적 구성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32~33쪽 참조)을 올린 정진수 서울지법 서부지원 판사는 “법원의 인적 구성이 현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과거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경우에는 법원은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퇴행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법관들의 보수적 성향은 개인적 배경뿐 아니라 법원의 폐쇄적이고 관료화한 인사 시스템에서 비롯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아래위 위계질서가 꽉 잡힌 하나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성적(연수원·사법시험 점수+근무 평정)에 따라 승진하는 경쟁체제에서 살아남는 판사만이 대법관 반열에 오르는 현재의 인사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대법관 자리가 보수적 인물들로 채워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법관 인사 시스템을 비롯해 대법관을 구성하는 방식과 원칙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근본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현직 판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적 구성 비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고서는 대법원 판결의 보수화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사진/ 기본권의 최후 보루라는 대법원의 위상이 보수적 판결 사태로 위기에 처했다. 사진은 대법원 건물 안에 있는 ‘법의 여신’ 부조.(김진수 기자)


보수화 우려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위헌법률심사권이 1991년 설립된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이후로는 대법관의 가치관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여지가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대법관은 법률에 따라 구체적 사건을 처리할 뿐”이라는 원론적 답변을 거듭했다. 그는 또 대법관 가운데 판사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높다는 주장에 대해 “대법관 한명이 1년에 감당하는 사건 수가 1천건 안팎이기 때문에 실무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우수한 판사로 임용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대법관 한명이 1년에 사건 1천건 감당

대법원이 사회적 가치나 정책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 100% 보수적 판결을 내린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대법원은 최근 여성과 남성에 대해 차별적 임금을 지급한 사건에 대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이는 동일가치의 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지급하도록 한 최초의 판결로 매우 의미 있다고 여성계는 보고 있다. 앞으로 노동현장에서 남녀간 차별적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판결이 가물에 콩 나듯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인권과 여성, 소수자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대법관을 하루빨리 찾아나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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