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봉 | 건국대 법대 교수·헌법학

서울 서초동 서초역 주변에는 사람들을 약간 가위눌리게 할 정도로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현대식 건물이 서 있다. 우리의 대법원 건물이다. 1995년 서소문의 옛 청사로부터 옮겨온 뒤 그곳에 자리잡았다. 한 나라의 최고 사법기관 건물답게 위엄이 있어 보인다. 무엇인가 ‘적극적인 힘’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느껴진다.

이승만의 압력을 막은 김병로

헌법학이나 정치학에서 한 나라의 사법부를 분석·평가하는 여러 잣대 중에 ‘사법 적극주의·사법 소극주의’가 존재한다. 삼권분립의 원리 아래 ‘사법 적극주의’는 “권력분립의 원리가 기초하고 있는 ‘견제와 균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부나 입법부의 의사나 결정에 곧잘 반대를 제기해 두 부(府)에 의한 권력의 남용을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사법부의 태도나 철학"으로, 사법 소극주의는 “판결을 통해 다른 두 부(府)의 의사나 결정에 개입하고 반대하기보다는 자주 ‘사법부 자제’의 미명 하에 심리 자체를 회피하거나 두 부(府)의 의사나 결정을 존중하고 이에 동조하는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태도나 철학”으로 정의된다.

사진/ 57년 12월 김병로 대법원장의 정년퇴임식. 그는 소신있는 대법원 판결의 전통을 남겼다.

간단히 말해서 ‘사법 적극주의’는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의 결정 판결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법 반대주의’를 의미하고, ‘사법 소극주의’는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의 결정에 쫓아가는 ‘사법 동조주의’를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적극’과 ‘소극’의 사전적 의미에 이끌려 ‘사법 적극주의’는 ‘사법 진보주의’와 같고 ‘사법 소극주의’는 ‘사법 보수주의’와 같다고 보는 성급한 도식화이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행정부와 입법부 하에서 반대를 제기하는 적극적인 사법부는 진보적인 사법부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인 사법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법 적극주의와 사법 소극주의의 관점에서 우리 대법원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거시적으로 간략히 그려보는 것도 자못 뜻깊은 일이 될 듯하다. 대법원과 관련해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열보다는 일정한 관점에 입각한 대법원의 성향 분석과 이해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광복 후 정부수립 때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이전까지인 제1, 2공화국 시기는 우리 대법원이 그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과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사법 적극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의 ‘사법부 독립’에 대한 투철한 사명의식은 이승만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행정부의 압력과 간섭을 효율적으로 차단해주는 방패막이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것이 상당 기간 사법부의 전통이 되었다. 그래서 적극적인 법해석으로 행정부나 입법부의 결정에 제동을 거는 소신있는 대법원 판결들이 나올 수 있었다. 대법관 개개인에게도 선비적인 지조와 기개가 충만해 있었고, 대법관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가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의 헌법과 법원조직법 하에서 ‘법관회의’가 대법관의 실질적인 임명권자였다는 점도 대법원의 사법 적극주의적 경향의 한 원인이 되었다.

김재규 사건, 대법관의 기개를 말살하다

이러한 대법원의 사법 적극주의 기조가 위기를 맞고 사법 소극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은 제3공화국의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이후, 더 정확하게는 1969년 삼선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헌법위원회로부터 위헌법률심사권을 넘겨받게 된 대법원은 월남파병이 결정된 이후 월남전 부상병들의 막대한 보상금과 배상금으로 국가재정이 고갈될 것을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놓은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단서의 군경 등에 대한 ‘이중배상금지규정’에 대해 1971년에 위헌결정을 내려, 박정희 대통령의 진노를 사게 된다. 그리고 위헌결정에 가담했던 대법관들이 갖가지 명목으로 이후 대법원에서 축출된다. 이것이 ‘국가배상법 위헌결정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 대법원은 큰 충격 속에서 사법 소극주의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사법 소극주의적 경향은 10·26 대통령 저격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 판결은 김재규 등의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김재규를 사형에 처했으나, 임항준 대법관 등 당시 소수의견으로 무죄쪽 의견을 개진한 대법관들은 판결 뒤 보복성 축출의 수모를 겪어야만 했고, 이것이 대법관들의 기개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5공화국 하의 대법원에서도 사법 소극주의적 경향은 계속되었고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은 대법원을 더더욱 위축시켰다.

6월 민주항쟁과 그 항복선언인 6·29선언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의 주요 뼈대로 하는 제6공화국 헌법이 1987년에 만들어지면서, 헌법위원회가 다시 없어지고 위헌법률심판권을 어디에 주느냐가 문제되었다. 그때 대법원은 제3공화국 때처럼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갖길 원했으나, 1970년대부터 보여준 대법원의 사법 소극주의적 행태에 실망을 느낀 우리 국민은 독일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도입하면서 위헌법률심판권을 위시한 5가지 헌법재판 권한을 헌법재판소에 부여한다.

1988년에 세워진 헌법재판소는 상당수의 사법 적극주의에 입각한 위헌결정과 헌법소원 인용결정 등을 통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고, 권위주의적 군사통치에 억눌려 곪아왔던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면서 지금까지 많은 국민적 지지와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헌법재판소라는 ‘라이벌’을 갖게 된 대법원은 그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건’에서의 유죄판결을 통해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자못 진보적인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은 당시 ‘역사 바로 세우기 선언’을 통해 과거청산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던 김영삼 대통령과 입법부 의사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합치’되는 것이어서, ‘사법 진보주의’에 입각한 것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사법 소극주의적 판결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79년 3월의 이영섭 대법원장 임명식(왼쪽)과 81년 4월 유태흥 대법원장 취임식. 박정희 정권 이후 대법원은 급격히 굴절을 겪었다.

사회변화 물꼬 트는 진보적 판결을

그 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법원의 성향에서 큰 변화를 읽을 수는 없다. ‘법무사법 시행규칙 사건’을 통해 명령·규칙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놓고 헌법재판소와 신경전을 벌인다든가, 법원의 ‘재판’을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 심판대상으로 할 수 있느냐를 두고 헌법재판소와 판결을 통해 권한다툼을 보이는 등 몇몇 ‘권한 고수’를 둘러싼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 대법원은 사법 소극주의적 경향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분명 단일단색의 보수적 성향을 가진 대법관들이 보여주는 ‘사법 보수주의’에 입각한 ‘사법 소극주의’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법보수주의’에 입각한 ‘사법 소극주의’가 적어도 2003년의 대한민국 땅에서 기대되는 바람직한 대법원의 모습은 아니라는 데 있다. 보수화한 소극적인 대법원은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무한경쟁 시대에서 사회변화를 리드할 수 없다. ‘사법 적극주의’에 입각한 진보적 성향의 강력한 사법부만이 입법부나 행정부에 앞선 진보적 판결을 통해 사회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또한 안타깝게도 대법관은 선거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임명’되기 때문에 ‘다수 국민’의 의사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판결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소수자와 약자’의 이익을 대변해내는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

권력분립 원리 아래 다수 국민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다수파 기관인 입법부와 행정부가 존재하듯 ‘소수자와 약자’의 이익보호를 위해서는 비다수파 기관인 사법부가 존재한다는 공평한 섭리는, 행정부나 입법부보다 한발 앞선 진보적 사고를 판결에 담아내면서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 보호’를 선구적으로 이루어내는 사법 적극주의적 성향의 대법원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보수적이고 사법 소극주의적인 대법원은 사회의 흐름을 판결에 담아낼 수도 없고, 심지어 뒤쫓아가지도 못한다. 오히려 사회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다.

서초동 대법원 건물에서 느낀 위엄과 ‘적극적인 힘’을 우리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