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6월19일 제464호 

자신있게, 당당하게!

‘여성정치인’의 정체성 잊지 말기를… 페미니스트가 박근혜·추미애·강금실씨에게

추미애씨가 몇년 전 지역구 의원으로 당당하게 당선됐을 때는 세간의 비난대로 단지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환호한 것도 사실이다. 가뭄에 콩 나듯 뜨문뜨문한 귀한 존재, 여성 국회의원의 출현이 실로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여성권한지수는 세계의 바닥을 기고 있으니 한명이라도 여성이 정계에 진출해 수천만 여성의 현실을 대변해주길 가슴 깊이 바랐다.

‘여자’인 것을 숨기지 말라


사진/ “모든 여성이 걸어가는 어두운 길을 밝혀줄 수 있기를….” 선거연설회에 모인 여성청중들.(이용호 기자)


그러나 추미애씨는 자신이 그저 ‘국회의원’이면 됐지 ‘여성 국회의원’으로 불릴 필요가 없다며 복합적인 여성들의 기대(여성 정치인의 화려한 입성, 여성 입장 대변)를 저버렸다. 그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하여 한명이라도 더 성공한 여성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위 페미니스트들은 민망 혹은 무안해졌다. 몇몇 남자들은 추미애란 카드를 들이대며 여자임을 주장하지도 않고, 페미니스트임을 내세우지도 않는 여자가 더 멋지고 마음이 넓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 심지어 여성의 정계 진출을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적 ‘자궁’만 중요시하는 몰상식한 부류로 치부되었다.

이제 추미애씨는 자신이 ‘여자’인 것을 그만 숨겨도 된다. 굳이 여성이라는 것으로 행동반경을 좁힐 필요도, 그걸 거부함으로써 얻은 다른 지지의 변도 필요없다. 그만 그 강퍅한 ‘명예남자’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유연한 인간으로 돌아가도 될 시기가 되었다. 그 반환점을 돌아나오는 지점이야말로 진정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자유로워지고 입지를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씨는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혹자에겐 그의 딸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미 현세대들에게는 명예도 존경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아무도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만으로 존경하지 않는다. 더이상 그 고상한 귀족의 이름으로 고상함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인 박정희의 맏딸, 어머니 육영수의 환생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노하우, 자신만의 경력, 자신만의 정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늙은, 나이든 공주를 거부하고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와 정책에 대해 자신 있게 논하고 주장해야 한다. 지금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최보은씨의 ‘박근혜를 사유하자’라는 화두의 궁극점이 바로 그곳이다.

강금실씨는 추미애씨와 박근혜씨와는 태생도, 지점도 다르다. 그는 여성인 것을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은, 누구의 후광과 이미지로 굳혀지지 않은, 스스로의 삶 자체로 정치를 웅변할 수 있는 길을 걸어온 드문 사람이다. 그는 평화와 평등과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다. 부디 자신의 내공과 철학을 포기하지 말길 바란다. 현실정치의 논리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타협과 변절이 아닌 모습으로 더 깊어지면 된다.

장관이 됐을 때의 환호가 뜨거웠던 만큼 어쩌면 여자들의 기대가 너무 커서 같은 여성이 강금실씨를 더 많이 괴롭히고 할퀴어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이해해주길 바란다. 강금실씨는 여자들이 얼마나 아픈가를 가슴 깊이 아는 사람이니까. 제발 그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의 많은 여자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왜 뒤틀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빛나는 존재로 서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자신과 자신의 주장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첨예한 논란의 정점에 있는 것도 불편해한다. 세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바라는 것도 위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일에서 자신감 있게 당당하기를. 스타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그래서 스스로가 빛나는 존재인 것이 다른 여성이 걸어가는 어두운 길을 밝혀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권혁란 |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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