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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경제를 쏘았는가 구조개혁 늦추고 재벌과 손잡은 정부… 인위적 경기부양이 끝없는 추락 불러와
올라가는 때가 있으면, 내려가는 때가 있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마냥 확장을 계속할 수는 없다. 끝없을 것처럼 보이는 호황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경기순환이 사라졌다’는 주장까지 불러일으켰던 미국의 ‘신경제’ 호황도 단지 확장국면이 길었던 것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평범한 이치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얘기는 다르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친다. “IMF 때보다 더 하다.” 엄살인가?
산산이 부서진 ‘신용카드 거품’
지난해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경기확장국면이 이라크 전쟁이나 북핵 문제 등으로 잠시 주춤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경제는 도대체 좋아질 기미가 없고, 계속 나빠지기만 한다. 앞으로 몇달 뒤 경기전망을 보여주는 선행지수 전년동월비는 지난해 5월부터 12개월 연속 낮아지고 있다. 정부, 한국은행, 국책·민간연구소들은 이미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하향조정했다. 경제주체들이 더욱 움츠러들까봐 ‘하반기부터는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립 서비스’로 낙관론을 내세우는 형편이다. 무엇이 우리 경제를 지금 이 상황으로 몰고 왔는가 회복되지 않는 세계경제,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긴장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은 내수소비의 급격한 위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소득은 그다지 늘지 않았으나 열심히 빚을 내어 소비하도록 유도한 결과 조장된 거품이 붕괴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총선 앞두고 구조개혁 늦춘 김대중 정부
경기가 나쁠 때 정부가 나서 소비를 증가시키고 투자를 촉진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금리를 낮추고 재정지출을 확대한다. 그러나 경기부양책이 경제를 반드시 되살려놓는 것은 아니다. 경기후퇴의 원인이 치유될 때에야 경기는 자기 힘으로 상승한다. 경기회복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온존시키는 부양책은 마약과도 같다. 약발이 떨어지면 더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일부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소비부양정책을 ‘길거리에서 카드를 찍어 마구 나눠주는 기상천외한 케인지안 정책’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진단은 명쾌하다. “2003년 이후의 경제성장률은 신용카드 과소비 버블붕괴 효과를 고려하면 최소한 2% 이상의 성장률 감소가 예상된다. 신용카드 연체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용카드 과소비 버블붕괴로 인한 성장률 감소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뚝 떨어지는 것은 외부요인 탓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정책에 대한 시장의 보복인 셈이다.
IMF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에 나섰던 김대중 정부가 구조개혁을 늦추고 본격적 경기부양에 나선 것은 4·13총선을 앞두고서였다.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기보다는 당장 화려한 성과를 위해 재벌 다독거리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부실기업 문제는 결국 대우사태로 현실화되면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둔 상황에서 9·11테러가 터지자 정부는 금리를 낮추고 특소세를 인하하는 등의 방식으로 내수소비를 더욱 진작시켰다. 한편으로 건설경기를 적극 부양하고 나섰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성장률 지표를 높였지만, 지금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키우고, 한편으로 부동산 버블붕괴 위험이란 또 하나의 짐을 우리 경제에 얹어놓았다. 김대중 정부 경제팀을 그대로 계승한 참여정부의 경제팀은 해외경제가 호전되면 이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말 올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을 5.6%로 잡았다.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다. 요즘은 4% 성장도 힘들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외국계 증권사들은 3%대의 성장률을 점치고 있다. 성장률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김대중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택할 길은 이제 무엇일까?
참여정부도 벌써 재계에 무릎 꿇었나
이 때문에 정부는 ‘투자’에서 성장률 제고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통한 정부지출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투자 활성화를 명분으로 재벌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방문 때 재벌들의 도움에 매우 고마워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5월27일 손길승 전경련 회장을 국무회의에 참석시켜 재벌의 목소리를 듣는 파격을 연출했다. 재계는 이에 즉각 화답했다. 경제5단체 상근부회장들은 5월29일 서울 롯데호텔에 모여 14개 대기업이 올해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3.1% 늘린 25조9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재벌들의 투자액이 5월까지 애초 계획의 33%에 그쳤던 만큼, 3.1%를 오히려 늘리겠다는 것은 투자를 대규모로 늘리겠다는 약속이다. 경기상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재계가 이토록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를 해서 정부를 도울 테니 다른 요구들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6월1일 재벌 회장들을 삼계탕집에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사실상 재계에 무릎을 꿇었음을 공식화한 셈이다. 이틀 뒤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이 30대 기업 기획조정실장과 조찬간담회를 가진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개혁을 표방한 정부와의 샅바싸움에서 일찌감치 승리를 확인한 재계는 이제 6대 그룹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벌이기로 한 공정거래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다음 요구가 무엇일지도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정부가 재벌에 손을 벌리는 상황에서 경기부양과 구조개혁을 병행한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높이고 남은 부실을 정리할 기회는 다시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다. 투자를 늘려 경기를 활성화하자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김영삼 정부의 정책이, 그리고 그 결과 맞은 IMF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비가 결국 파국을 맞듯이, ‘효율성’이 담보되지 않은 투자의 결과는 파산이다. 투자증가는 단기적으로는 고용창출과 소득증가, 그리고 이에 바탕한 소비증가를 낳지만 거품성장은 반드시 큰 후유증을 남긴다.
일본의 침체, 남의 일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시절 강력한 재벌개혁을 내세웠지만, 출범 뒤 경제문제에 대해 ‘안정’을 내세워왔다. 대규모 분식회계가 불거진 SK글로벌에 대해 채권단이 총수의 지배권을 유지시켜주는 대가로 계열사들의 불공정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나, 정부가 카드사들의 부실을 덮은 채 시간을 벌고 있는 것도 이런 ‘안정’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가운데 내년 총선을 의식한 정부와 지배권의 안정을 바라는 재벌은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다. 90년대 초 거품붕괴 뒤 일본은 구조조정을 미적거리다 이른바 ‘잃어버린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1인당국민총소득(GNP)은 지난 96년 1만1385달러로 최고치에 이른 뒤 지난해(1만13달러)까지도 그때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미 ‘잃어버린 6년’을 보낸 셈인데, 그 세월이 연장될 위험은 자꾸만 커지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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