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재미언론인의 편지… 미국의 대북압박 전략 포기만이 우리의 살길
사진/ 김민웅 재미언론인·목사
대통령께서는 집권 뒤 최초의 외교적 중대행보인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간 깊은 고뇌와 폭넓은 구상에 몰두해오셨을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현실을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최대 관건은 실로 미국과 우리, 즉 남북을 아우르는 우리 민족 전체가 어떤 관계로 변화해나갈 것인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관계가 장래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심각하게 각성한 결과입니다.
굴종적 한-미 공조는 자해
그리고 그 관계변화의 핵심은 미국이 우리 민족의 평화적 발전 경로에 더 이상 부정적 역할을 중지하고, 분단의 역사적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한반도 문제해결에 우리 민족의 주도권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미국이 우리 민족의 운명에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덫을 놓거나 간섭, 개입하려 든다면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 아니라 ‘지배자’ 또는 ‘적’으로 인식되는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반도 전체를 미국에 적대적 반감을 갖는 지역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미국은 속히 선제공격 정책을 포함한, 북한을 겨냥한 압박붕괴 전략을 포기해야 할 것임을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방미 과정에서 최대한의 노력과 지혜를 동원해 상대에게 주지시켜야 할 바입니다. 이른바 ‘한-미 공조’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를 훼손하는 것은 공조가 아닌 우리의 일방적 굴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족적으로 자해조치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미국의 요구는 그것이 때로 아무리 부당하고 우리의 주권적 존엄성을 유린하는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우리에게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미국 자체가 우리에게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노 대통령께서 취임 전 대미관이나 대미 자세가 취임 뒤 달라진 까닭도 이러한 현실의 냉엄함에 대한 절박한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만 인식이 고정되어 있고 미래를 향한 전망에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현실은 미국의 구상과 기획에 끊임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 뜨거운 정치적 소용돌이를 통과하여 이루어낸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타개하고 한반도의 평화구조를 더욱 확고하게 세워나가는 지도력을 기대한 민심의 저력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또는 실망스럽게도 노 대통령께서 정작 취임 뒤 우리의 이러한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의 부당한 힘에 쉽게 굴복하지 말라는 우리 사회 내부의 목소리를 껴안으면서 그것을 외교적 역량으로 활용하는 과정과 노력이 매우 부족했던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차를 중요시하는 분이 절차적 공론형성 과정을 밟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방미 과정에서 정상회담의 실질적 내용을 제대로 채워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한편에서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길한 예측이 들어맞으면, 그것은 반드시 귀국 뒤 내부적으로 정치적 도전이 되어 노 대통령의 앞날에 중대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북핵, 동북아 패권의 고리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방미 과정에서 정상회담의 실질적 내용을 채워 돌아올 수 있을까. 지난 4월15일 청와대를 방문한 부시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청와대사진기자단)
미국은 오늘날 자신의 제국주의적 패권체제 확립을 위해 내부의 민주적 기준과 원칙들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계에서 존경받는 셸던 월린 같은 온건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조차 오늘날 미국 부시 정권이 과거 독일 나치스의 파시즘적 전체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입니다. 제국은 공화정을 파괴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미국은 공화정의 약화 내지 해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주적 기본권한이 제한되고,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법적 정당성이나 합리적 원칙 같은 가치들은 버림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을 상실한 권력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 부시 정권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초강대국 정권을 상대로 하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와 의지입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고, 설득을 기대할 수 없으며, 아무리 그럴싸한 대안을 제시해도 관심이 없는 강자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건 안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당신의 생각대로 문제를 처리하려 들면 사태는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올 수밖에 없다 등의 입장을 강력하게 유지하여 아무리 약자라 해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이른바 ‘북핵 위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북한의 핵무장 상태에 대한 대응과 반격의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틀에서는, 동북아 지역의 독자적 생존환경과 행동반경의 확대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차단·봉쇄 정책에 활용되는 군사적 고리인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리를 적절하게 쥐고 한반도 정세를 장악하는 한 미국은 이 지역의 패권적 질서를 자신의 제국경영 구상에 따라 맞춰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핵 문제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한-미 공조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 자세를 취한다면,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생존환경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동결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북의 핵무장은 저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드는 환경조성이 일차적입니다. 북이 여전히 포기되지 않은 초강대국의 선제공격 정책 위협 앞에서 핵무장의 길로 갈 이유가 없는 현실을 만드는 일, 이것이 우리가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달성해야 할 당장의 목표입니다. 북한은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호적 관계개선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적 관계를 만들자는 메시지를 이미 오랫동안 내놓아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북한의 생존을 위협해온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진실입니다. 위협적 정책은 북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생명에 대한 도발입니다. 그 발상 자체가 가공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우리에게도 뼈대 있는 지도자가…
사진/ 3월13일 전화통화를 통해 이라크전 지지 입장을 밝히는 모습(청와대사진기자단)
미국에게 할 말은 하겠다고 공언해온 노 대통령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진실의 기초 위에서 외교의 원칙을 관철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상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장이 아닙니다. 진실에 뿌리박은 정책을 지원하고 밀어줄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외교적 굴종은 시작됩니다. 생존의 문제는 애매모호한 외교적 수사 속에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디, 인식의 틀, 정책의 구도를 변화시키는 일에 주력하기 바랍니다. 미국에는 부시 대통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는 전쟁의 승리로 제국의 힘을 과시하려 드는 세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국제질서의 정의를 추구하며 오늘의 제국 미국의 장래에 대하여 개탄해 마지않는 이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들의 목소리와 만나고 힘이 자라나도록 노련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외교적 지혜입니다. 미국 내부의 여론에 의미 있는 충격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방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노 대통령을 보면서, 아, 우리에게 이런 뼈대 있는 지도자가 있구나, 이제 이 민족은 이러한 지도자와 함께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민족의 미래를 타개해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감격이 솟는, 그런 기쁨이 주어지기를 고대합니다. 부디, 크고 강한 것에 압도당하지 말고 민족의 양심과 인류적 정의감을 가슴에 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마음이 뜨겁고 지혜가 총명한 외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많은 것을 얻으려 들지 말고, 정작 얻어야 할 바를 얻는 것이 외교의 알맹이입니다. 그 알맹이의 이름은, 자주와 평화, 그리고 민족의 생존과 주도권입니다.
김민웅 재미언론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