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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등록 2003.04.24(목) 제456호

[표지이야기] 골치아프고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국제무대에서 급물살 타는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 인권문제는 ‘판도라의 상자’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판도라의 상자’란 말은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북한 인권문제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되어 있다.

물론 시민사회단체들도 북한 인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한 인권운동가는 “보편적 인권의 잣대로 보면 북한의 인권상황이 엉망인 게 사실이다. 사법권의 독립도 미흡하고 가족 연좌제 등 전근대적인 제도는 있는 그대로 문제제기를 하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혜택 등 일부 모범적인 것은 또 그대로 인정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북한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문제삼기를 꺼린다. 한국 사회에서는 반북이 아니면 친북이란 냉전시대 흑백논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북한 인권문제를 지적하면 남한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남한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면 ‘빨갱이’란 비난을 받곤 한다. 냉전 논리에서 비롯된 편의적 이해방식이 북한 인권문제의 합리적 소통을 막고 있다.

세계사의 모순이 압축된 현장

대부분 시민사회단체들은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는 단체나 개인에게 북한 인권에 대한 견해를 물으면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부족하다’, ‘남북 화해협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극우보수세력에게 악용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말을 아낀다.

시민단체는 아니지만 김창국 국가인권위원장의 발언에서 이런 고민이 잘 드러난다. 김 위원장은 4월17일 “미 국무부 보고서, 탈북자 증언 등을 통해 북한 인권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인데다 인권위 내부 논의도 없어서 최근 국회 법사위에서 답변하기 곤란했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인권위 차원의 입장 표명은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인권문제는 ‘세계사의 모순이 압축된 현장’이다. 얼핏 간단해보이는 이 문제 속에는 보편성과 특수성 같은 철학적 개념이 충돌하고,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란 국제정치적 개념도 대립하고 있다. 사회주의 가치, 북한체제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냉전시대 좌우 이념대결의 모습도 있다. 여기에 대북정책을 국내정치의 하위변수로 종속시킨 국내 정치세력끼리의 정략적 다툼도 치열하다.

이런 까닭에 국내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논의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반면 최근 국외에서는 북한 인권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특히 4월16일 제59차 유엔 인권위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북한 인권 상황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을 비롯한 인권기구의 지속적 감시를 받게 되며, 유엔 인권위에서는 먼저 의제로 다루어진다. 최근 유엔 안보리에서의 북한 핵문제 논의에 이어 유엔 인권위의 북한 인권결의안 채택은 국제사회가 안보문제와 인권문제를 똑같이 중요한 비중으로 다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기류를 반영한 듯 미국에서는 베이징 북-미-중 3자 회담에서 미국이 북핵 문제뿐 아니라 북한 인권문제도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국 민주주의 기부재단’(NED)의 칼 거시맨 회장은 4월17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만일 3자 회담이 핵문제 해결에만 집중한다면 실수다. 안보 위기는 문제의 핵심인 북한 정권이 주민들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범죄를 다루지 않고서는 영속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자대화는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 의제에 포함시키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첨예한 논쟁

북한 인권문제와 대량살상무기를 한 묶음으로 보는 시각은 “북한은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나라”라고 규정한 지난해 1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근 미국 등은 3자 회담을 앞두고 북한 인권문제를 원색적인 말로 집중 비난했다. 스콧 카펜터 미국 국무부 인권담당 부차관보는 4월1일 워싱턴 외신기자센터에서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소름 끼치는 체제 중 하나로, 최대 규모의 감옥체제”라고 말했다. 진 커크패트릭 미국 인권담당 대사도 4월1일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열악한 인권상황과 극심한 식량난은 북한을 지구상의 진정한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유엔은 가증스러운 북한의 인권침해 전력에 적극 대처하고 북한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은 3월31일 펴낸 2002년 국무부 연례인권보고서에서 “북한에서는 재판 없는 사형과 실종사건이 계속 보고되고, 많은 사람들이 임의로 정치범으로 구금돼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 당국은 외국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으로 규정하고 ‘우리식 인권’ 개념이 있다고 맞서고 있다. 아울러 북한은 적극적인 ‘해명’도 하고 있다.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사형조항 수를 33개에서 5개로 축소하고, 사형선고가 가능한 나이를 17살에서 18살로 높였다. 또한 1998년 개정헌법에 거주여행의 자유를 신설했고, 2001년 유엔 인권위에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인권보고서를 16년 만에 제출하는 등 국제인권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

북한 인권 관련 논의에서 ‘실태’뿐 아니라 인권 개념과 ‘인권의 보편성’ 명제도 첨예한 논란거리다. 인권이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에 지니게 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란 ‘소박한’ 생각은 도덕적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개념적·역사적·정치적 측면의 비판에 흔들리기 십상이다.

인권 개념은 △생명권·자유권·평등권·행복추구권·종교·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인 제1세대 인권 △교육권·노동권·최저생활보장 등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인 제2세대 인권 △민족자결권, 평화에 대한 권리, 발전권 등 집단적인 권리인 제3세대 인권으로 나뉜다. 미국과 유럽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소극적인 자유와 정치적 권리인 제1세대 인권만이 진짜 인권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해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 국가들은 제2세대와 3세대 인권이 진정한 인권이라고 주장해 인권 개념은 ‘내재적 불확정성’을 갖고 있다. 이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인권관련 논쟁에서도 쟁점이 됐다.

예를 들어, 천안문 사태 이후 1990년부터 미국은 중국 인권문제를 유엔 인권위에 의제로 올리려고 했고,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다. 세계적 인권단체인 ‘휴먼 라이트 워치’는 1997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결의안 채택과 관련한 중국과 서구 국가들의 외교적 노력을 분석한 결과, 이사회 막후에서 독일·프랑스 등은 중국이 내세운 경제적 유인책에 쉽게 순응하는 반응을 보였으며,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위선’이란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인권단체들의 ‘평화위협 악용’걱정

잭 도널리 미 덴버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는 <인권과 국제정치>에서 미국이 1989년까지는 인권에 대한 관심을 냉전에 종속시켰으며 1990년대 들어와서야 미국 외교정책에서 인권에 대한 관심이 확대·심화됐다고 분석한다. 그는 미국이 자유와 인권의 추구를 반공산주의와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이 북한 인권을 부쩍 문제삼는 배경은 무엇일까. 미국은 공식적으로 ‘인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 가치인데다 북한 인권상황이 워낙 나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에서 이런 모범정답식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북-미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노림수이자 ‘인권’을 명분으로 ‘북한 인민의 인권’을 옥죌 것이란 반론이 만만찮다.

미국이 이라크전 압승의 여세를 몰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 관계자는 “부시 행정부가 최근 북한 인권문제를 적극 거론하는 것은 북-미 협상에서 카드의 하나로 사용하려는 사전 포석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켰다는 미국 논리의 연장선에서 최근 북한 인권과 관련한 일련의 조처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 정권 교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국이 서서히 압박을 증가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실제 인권단체들은 북한 인권문제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도구로 악용될 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북한 인권결의안 채택에 대한 논평은 대표적이다.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불법 점령되고 전쟁의 먹구름이 다시 한반도를 드리우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미국의 북한 침략 명분으로 악용될 수 있는 문서가 채택된 것은 커다란 우려를 자아낸다. 그동안 ‘악의 축’ 운운하며 대북 압박을 가해왔던 미국이 이 결의안을 내세워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이라크전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미국이 또다시 ‘해방군’을 자처하며 한반도를 피의 전장으로 만들지 말라는 법이 과연 없겠는가.”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북한 인권에 문제가 있는 것은 그대로 봐야 하지만, 그동안 이 문제를 과도하게 정략적으로 다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인권문제를 ‘판도라의 상자’라고 했는데, 그럴수록 냉정하게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먹고살아야 시민적·정치적 권리도 행사하고, 문화적 권리도 행사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경제제재와 봉쇄로 삶의 기본적 조건을 훼손해놓고 결의안을 통해 국제사회가 북한에 인권을 강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고 말했다.

“극우세력이 너무 우려먹었다”

북한 인권을 강조하는 일부 세력은 정략적 이해가 앞선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한나라당은 4월17일 정부의 유엔 대북인권결의안 표결 불참에 대해 논평을 내 “너무나 무책임하고 비겁한 일로,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4월19일 북한의 ‘핵연료봉 재처리 진행 중’ 발언에 대해 “북한이 우리를 대화의 상대로 존중하는 가시적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어떤 구실의 대북지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과 관련해 국제평화 인권 난민지원 활동을 펴는 ‘좋은 벗들’은 4월18일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과 인권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서를 냈다. “북한 인권의 최우선 과제는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이다. 굶주림과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살아남는 것 그 자체다. 대다수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식량난의 해결 없이는 어떤 인권 개선 노력도 피부로 느껴지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 인권의 정략적 악용 우려에 대해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은 “그동안 북한 인권문제를 극우세력들이 너무 우려먹었다”는 농담을 한다. 윤 이사장은 “9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 인권 실상 파악이 어려웠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4천명에 이르는 탈북자의 증언과 북한을 방문한 국제기구, 시민단체의 북한 인권 관련 진술과 증언이 거의 차이가 없다. 정치적 이념이야 어떻든 진실로 드러나는 북한 인권 현실을 눈감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도 “인권을 정치에 한 묶음으로 붙여야 한다는 게 무리한 주장이라면 인권을 정치에서 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일부에서는 북한 인권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지만 북한 인권이 국제문제가 되자 북한 당국이 공개처형을 줄이고 먹고살기 위한 단순 탈북자에 대해 가벼운 처벌을 하는 등 실질적인 인권개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선입견 버리고 적극 논의해야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남쪽의 진보세력은 회피하고 보수세력은 악용하고, 북쪽은 부인한다. 이 바람에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논의에서 남북은 정작 당사자이면서도 비켜나 있다. 7천만 민족의 삶을 위협하는 미국의 북핵 관련 시설 선제공격 가능성이 남한 정부의 통제권 밖인 미 백악관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북한 인권문제 논의도 남북한 주민의 뜻과 무관하게 미국의 세계전략의 한 요소로 굴러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시민사회단체, 정치세력들이 냉전 논리에 뿌리를 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발언해야 할 현실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의 핵심은 사실을 밝히고 또 보편적 기준에서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이를 사려깊게 해소하려는 실천의 수준에 있는 것이지, 사실에 대한 외면이나 일부 사실만을 보려는 방식을 통한 회피에 있지 않다.”(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중에서)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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