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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라크는 순종하지 않으리 후세인 반대자들마저 분노케 하는 미국의 침략행위… 요르단 암만의 이라크인들을 만나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고작 한다는 짓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일이냐. 그러고도 이라크를 해방시키겠다고 말하다니. 미국은 우리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3월20일 새벽(현지시각) “미국이 바그다드를 미사일로 공격하고 있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보던 무하마드 아가(27)가 흥분해 쓴소리를 뱉어냈다. 아가를 처음 만난 것은 미국의 공격이 있기 전날인 3월19일 밤 요르단 암만 시내의 한 인터넷 카페였다. ‘이라크 사람을 찾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나도 넉달 전에 바그다드에서 왔다”며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인터넷 카페의 참담한 침묵
미국의 공격이 시작된 다음날(3월20일) 새벽 4시 인터넷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아가는 바그다드를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쌍둥이 여동생 걱정으로 속을 태우고 있다. “5명의 누나는 모두 가족과 함께 엊그제 바그다드 외곽으로 피신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여동생은 시부모가 아파 바그다드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최근 이사를 해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다는 그의 여동생에게서 잠시 뒤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죽음의 땅에 있는 여동생은 오히려 객지에 나와 있는 오빠 걱정을 했다.
그는 11남매 가운데 막내라고 했다. 고위 공무원을 지낸 아버지는 그가 6살 되던 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자 친구고,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는 어머니도 4년 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5명의 형제는 모두 흩어져 살고 있다. 어머니가 다른 맏형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나 소식이 없고, 둘째형은 이라크 북부 슐레이만에 살고 있다. 셋째형은 아랍에미리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고, 넷째형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방공포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가의 27년 삶에서 평화로운 시절은 고작 6년여뿐이었다. “내가 4살 때인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8년여를 전쟁으로 보내고서야 2년 간의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온 평화는 1991년 1차 걸프전이 터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보다 끔찍한 경제제재가 이어졌다. ”
아가와 함께 인터넷 카페에 있던 10여명의 이라크 젊은이들은 주먹을 불끈 쥔 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일부는 눈물을 떨궜다. “돌아가서 싸우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참담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오랫동안 예견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라크전은 이라크 국민을 위한 ‘해방전’이라는 점을 강조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분노로 몸을 떨던 이라크 청년들은 4시간이 조금 지난 뒤 후세인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연설 도중 ‘지하드’(성전)라는 단어가 거푸 들려왔다. “이라크 만세! 팔레스타인 만세!” 연설이 끝나자 젊은이들은 박수와 함께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다. 전날 밤 후세인 대통령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어젯밤 이들은 후세인 대통령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고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전쟁은 길게 이어져야 한다”
날이 밝자 이라크 침공에 대한 아랍 젊은이들의 반응을 듣기 위해 요르단대를 찾았다. “이번 전쟁은 길게 이어져야 한다. 이라크의 형제들이 당하는 고통만큼 미군들도 괴로워야 한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대학생들은 저마다 격한 감정을 토해냈다. 앳된 얼굴의 무하마드 바르구제(약학2)는 “반미감정은 이미 최고조에 달했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반감이 더 거세질 것도 없다”며 차갑게 웃었다. 하셈 자바지(공학3)는 “미국은 독재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독재자를 세울 것이다. 하지만 이번 독재자는 미국의 이익에 충실히 따르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히자브를 둘러쓴 여학생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극명한 반미감정만은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가족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살고 있다는 파티마(정보통신2)와 리마(영양학2)는 “미국은 바라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27살 이라크 청년 아가는 교사가 꿈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지독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명문 바그다드대 불문과에 입학했을 때 그가 꿈꾼 미래는 화려하지 않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고 학교에 가서 내가 잘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적당한 때 결혼해 아이를 낳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주고받고….” 그러나 그런 평범한 삶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의 세대에게 ‘평범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과 경제제재가 이라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물음에 아가는 이렇게 답했다. “40~50대 이라크 여성 가운데 상당수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 할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은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다.”
어디 그뿐일까. 한때 아랍권을 호령하던 선진국 이라크는 불과 20여년 만에 엄청난 원유매장량에도 제3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이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00년 전체 취학대상 어린이의 약 4분의 1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있다. 1985년 89%에 달하던 문자 해독률은 1998년에 57%로 급격히 떨어졌다. 1991년 62살이던 평균수명도 2001년에는 56살로 줄었다. 1990년 1천명당 50명에 지나지 않던 5살 이하 어린이 사망률이 2001년에는 1천명당 133명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전체인구의 60%에 이르는 1600만명가량은 정부의 배급식량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아가는 1999년 6월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학업성적은 상위 10명에 들 정도로 탁월했지만, 진학 기회는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공무원이나 군 장기복무자가 특별우대를 받은데다, 부모가 쿠르드족이라는 게 결정적인 탈락사유였다. 군복무가 끝나고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주변에 부탁해 어렵사리 요르단행에 필요한 비용 700달러를 빌렸다. 그리고 2002년 10월1일 새벽 새 삶을 찾아 바그다드를 떠났다.
슬픈 듯 달관한 듯 처연한 코란
그는 “그리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요르단에 도착해서는 사나흘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막상 도착한 요르단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숙식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한 임금도 “견습기간을 거쳐야 한다”며 3개월 동안 3분의 2만 지급됐다. 매달 이라크로 보내야 할 돈을 빼고는 한달에 15디나르(약 20달러)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하루 14시간씩 휴일도 없이 밤샘근무를 하기 넉달여. 그는 아직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
3월21일 오전 11시30분께 알 후사이니 대사원 앞. 날씨가 다시 변덕을 부리려는지, 하늘이 검게 바뀌고 있었다. 이슬람의 성일인 금요일을 맞아 하루 동안 고된 노동을 접고 암만 시민들이 사원으로 모였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 속세의 때라도 벗어내듯 손과 발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리는 무슬림의 모습은 경건했다. 슬픈 듯 달관한 듯 처연한 목소리로 코란을 읽어내려가는 이맘의 독경소리가 사원 앞 광장을 가득 메울 즈음 인파도 불어나 사원 안에는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아들(9)의 손을 붙잡고 기도회에 나온 초등학교 교사 아흐마드 아볼레스(42)가 다가왔다. 7살 때 요르단으로 이주해온 그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오늘도 이스라엘의 폭력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미·영 두 나라의 무자비한 폭력을 신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게다.”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기도회가 시작되는 12시가 되자 미처 사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광장 여기저기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내리고 꿇어앉았다. 때맞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사원과 광장을 메운 무슬림들이 조용히 신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기도회가 끝남과 동시에 추적추적 비를 뿌려대던 하늘도 맑게 개기 시작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마지막 기도를 마친 무슬림들은 고대 율법에 따라 좌우로 고개를 돌려 서로에게 평안을 기원했다.
“손을 들어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기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흐마드는 “우리는 인간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줬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목수 출신 아흐마드 살렘의 사연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젊은이가 사원 앞에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까지 몰려들면서 삽시간에 군중 수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사원앞 알 하시미 거리를 점령해버린 시민들이 하나가 돼 외쳤다. “미국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이라크와 함께한다”. 조금 전까지 한없이 조용하고 경건하던 이들이 이렇게 쉽게 성난 파도가 돼버린 것이 믿기지 않았다.
행진이 시작되고 주변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하면서 외침의 내용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여 영원하라”, “아랍의 군대여, 어디에 있나”, “부시에게 죽음을”. 2시간여 전부터 사원 주변을 맴돌던 사복경찰과 시위진압경찰 100여명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고, 최루탄이 터지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불과 10여분 만에 시위는 막을 내렸다.
아흐마드 살렘(38)이 요르단으로 옮겨온 것은 심장병 치료 때문이다. 이라크에서 목수일을 하며 5남매를 키우던 그는 가벼운 심장발작으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수술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91년부터 계속된 경제제재로 병원에는 수술에 필요한 마취제조차 없었다. 의사가 빨리 수술받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이주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살렘은 이란-이라크전이 격렬해질 무렵인 18살 때부터 만 9년 동안 군복무를 해야 했다. 군생활을 마치고는 어려서부터 원하던 대로 목수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각종 수입목재를 가공해 가구를 만들었다.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희망을 키워나갔다. 그러다 제1차 걸프전이 터졌고 경제제재가 이어졌다. 1993년부터 사정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통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일감도 급격히 줄었다. 더구나 재료용 목재마저 경제제재로 수입길이 막히면서, 그나마 들어오는 주문마저 취소되기 일쑤였다. 끼니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살기 위해서는 가족끼리 뭉쳐야 했다. 형제자매와 사촌들까지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냈다. 살렘의 부인 사라(35)는 “시장에 갈 때는 돈을 다발로 들고 다녔다. 처음에는 못 견디게 힘들었지만, 점차 궁핍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가족·친지들과 적은 것을 나누는 지혜를 배워갔다”고 말했다.
살렘은 “이란-이라크전 때는 도심에 대한 폭격이 거의 없었다. 전쟁은 국경에서 벌어졌다. 누구나 가족 가운데 1~2명이 죽었지만, 일상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1년 1차 걸프전 뒤 상황은 달랐다. 전쟁은 아이들의 침실 곁에서 굉음과 함께 다가왔고, 경제제재는 장바구니부터 가볍게 했다.
베란다에서 폭격을 구경하는 아이들
전쟁과 배고픔을 처음 겪는 이들은 지옥 같은 삶의 조건을 못 견디지만, 한두해가 지나기 전 바뀐 환경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공습이 계속되면서 아이들까지 베란다에서 폭격을 구경할 정도가 됐다. 밤에는 외출을 삼가고 집에 있다가,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하러 나가는 게 일상이 됐다.
요르단으로 이주한 뒤, 살렘은 심장수술을 두번이나 받았다. 더 이상 힘든 목수일을 해내기 불가능해졌다. 피붙이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몸마저 성치 못한 가장은 고향땅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슬람 교도들은 “아이들은 신이 돌봐준다”고 믿는다. 살렘의 걱정이 하늘에 닿았는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일자리를 구했다. 4년 전 아이들을 데려왔고, 생활은 차츰 안정돼갔다. 그러나 살렘의 얼굴에 드리운 깊은 그늘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언덕과 산이 많고, 겨울이면 폭설이 내리는 요르단과 달리, 이라크는 거의 평지고 날씨가 조금 추워져도 눈이 내리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강을 끼고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막내아들 함자가 2살 때 고향을 떠나왔는데, 이 아이에게 언제쯤 고향땅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향얘기가 이어지면서 그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 살렘의 대답은 매우 평범했다. “글쎄, 지금쯤이면 월급쟁이 생활을 접고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겠지. 가족과 함께 조금 더 여유 있는 삶을 살았을 테고, 친척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눈가에 아련한 물기가 맺혔다.
한국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를 방문하고 돌아온 임영신 활동가는 방문기간에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이라크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낮이면 일터로 나가고 밤이면 가족과 집을 지킬 것이다. 그들에겐 무기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대꾸했다. 그는 “티그리스 강변에서 숯불화로를 들고 나와 차를 끓여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던 이라크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한 이라크인은 ‘전쟁이 두렵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는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는 날에도 가족과 함께 여기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인샬라…
이라크 사람들에게 전쟁은 삶의 일부가 됐다. 20여년의 모진 세월을 버텨오며 인내는 제2의 천성으로 굳어졌다. 미국의 침공이 시작된 날 아침에도 바그다드 시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낡은 차를 몰고나와 출근길을 서둘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삶은 계속돼야 한다. 죽음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그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즐겨쓰는 말처럼 ‘인샬라’(신의 뜻대로)다.
이라크의 사막을 비추는 해가 지면 또다시 최첨단무기가 도시를 때려댈 테지만, 바그다드 사람들은 오늘도 티그리스 강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암만=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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