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3월20일 제451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숨겨진 회계부정 덮는 데 급급…경제 여건 악화되면 한꺼번에 터져나올 가능성도

SK글로벌의 분식회계 파문에서 투자자들은 ‘엔론사태’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2001년 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미국 최대의 에너지기업인 엔론에 대해 분식회계 혐의를 조사하면서 시작된 엔론사태는 기업들의 회계부정 의혹이 월드컴·제록스·머크 등 기업으로까지 확산되면서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우려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엔론사태를 기억하라


사진/ 3월11일 서울지검이 SK그룹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엔론사태가 9·11 테러보다 미국경제에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2001년 8월 1200선에서 9·11 테러 직후 960선까지 추락했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500지수는 엔론사태 후유증으로 지난해 7월 말에는 790선까지 추락했다. 부르킹스연구소는 엔론사태가 3월 이후 전체 주가하락 요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월드컴 이후 회계부정 스캔들은 6월 이후 주가하락 원인의 80%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했다. 신뢰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은 엔론사태와는 다를 것인가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기업의 회계 투명성에 대해 외국인들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왔지만, SK글로벌 분식회계는 재계 3위의 재벌 계열사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한 기업의 비리를 넘어, 그동안 구조개혁 노력을 해왔다는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신뢰상실이 더 큰 타격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실제로 SK글로벌 분식회계는 모든 면에서 한국경제 시스템의 약점을 드러내보였다.

분식회계의 주범은 물론 기업이다. 그러나 이를 감시해야 할 회계법인의 감사 또한 너무도 엉터리였다. 검찰은 “SK글로벌의 분식회계는 은행 부채 잔액을 ‘0’으로 만드는 등 단순하고 적발하기 쉬운 것이었다”고 밝혔다. 회계법인은 정말 이를 몰랐던 것인가. 한 회계법인의 고위간부는 “5대 회계법인이 대재벌의 회계감사 시장 70~80%를 장악하고, 기업이 회계법인을 고르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회계감사 부실이 다시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고 말했다. 영화회계법인은 이 회사의 회계감사를 10여년간이나 맡아왔다.

은행들도 SK글로벌에 당했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검찰은 “SK글로벌이 2001회계연도 결산에서 1조1800억원대의 은행대출금을 누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은행이 대출잔액증명서 상의 ‘대출잔액’란을 공란으로 처리해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은행조회서는 기업의 장부상 금융거래 내역이 실제와 같은지 확인할 수 있도록 은행이 회계법인에 제공하는 서류다. 대출규모가 큰 은행들의 경우 이를 회계법인에 넘기지 않고, 회사쪽에 보내 서류 위조를 방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SK글로벌이 1조원이 넘는 여신을 장부에 ‘0’으로 적었는데도 은행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대출심사를 하면서 기업 재무제표조차 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은행·회계법인·신용평가회사도 책임


사진/ 3월14일 열린 SK(주) 정가주주총회. (연합뉴스)


신용평가회사도 예외는 아니다. SK글로벌의 회사채에 대해 한국신용평가는 그동안 A등급을 매겨왔다. A등급은 “원리금 지급능력은 우수하지만 상위등급보다 경제여건 및 환경악화에 따른 영향을 받기 쉬운 면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신평은 분식회계 사실이 발표된 3월11일에야 SK글로벌의 무보증사채와 기업어음 신용등급을 관찰리스트에 ‘하향 검토’로 등록했고, 이틀 뒤 CCC로 3단계나 떨어뜨렸다. 외국계 투자자들이 SK글로벌의 채권을 즉시 회수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SK글로벌만이 문제라면 사태는 간단하다. 정부는 SK글로벌 사태로 인한 파문을 모든 것을 덮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시장의 공포를 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진다면 불신의 골은 깊어지게 된다. 분식회계로 숨겨진 기업부실은 경제 여건이 나빠질 경우 한꺼번에 드러나고, 그로 인해 전체 경제가 받는 충격이 몇배로 커진다. SK글로벌 분식회계가 공표된 뒤 주식시장에서는 몇몇 기업들의 이름이 다음 검찰 수사 대상으로 오르내리며 해당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경제가 어려워질 경우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지난해 재계가 분식회계에 대한 ‘일괄공개와 면죄론’을 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에 종합상사들은 그룹의 주력이었고, 다른 계열사를 만들고 지원하는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외화부채를 안고 있다가 외환위기로 환율이 오르자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계열사 간 지원 통로가 막히자 부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분식회계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종합상사들이 모두 분식회계를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재계가 분식회계 면죄론을 내세운 것이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부실을 감춘 채 끙끙대고 있기 때문이었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금융감독원이 회계법인의 감사가 적절한지 감리한 결과들을 봐도, 회계 투명성이 그다지 개선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감리를 받은 1544개사 중 35%인 540개사가 분식회계를 했다가 적발됐다. 상장사들도 724개사 중 22.7%가 분식회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감리에서도, 감리를 받은 86개사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1개사가 분식회계를 했다가 적발됐다. 분식의 의심이 가는 기업에 대해 실시하는 특별감리 결과 35개사 중 2개를 뺀 33개사가 적발됐다. 기업의 부정회계 문제는 여전히 ‘판도라의 상자’라는 얘기다.

특단의 조처 취하는 계기 돼야

정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자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대로 회계부정 의혹이 SK글로벌만의 문제로 끝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엔론사태는 미국 의회가 지난해 7월 말 부정회계 경영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기업구조조정법을 통과시키고, 8월 중순 회계장부가 투명하다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서명하고 난 뒤에야 겨우 수습됐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엔론사태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회계제도 개혁방안을 마련하면서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에 최고경영자와 최고재무책임자(CFO)가 함께 서명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거짓이 있을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재계의 강력한 반발로 형사처벌 감수 조항은 제외됐다.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정부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를 기업들의 회계장부에 감춰진 분식을 청산하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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