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3월20일 제451호 

STOP ‘셀 코리아’

SK 분식회계를 계기로 기업투명성 높이기 보다 재벌 달래기에 나선 정부 경제팀이 불안하다


사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실이 알려지자 외국인 투자가들의 ‘셀 코리아’도 거세졌다. 한 증권사 직원이 주가를 체크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검찰에 전화를 건 것은 사실이다. SK의 분식회계에 따른 시장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3월11일 아침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이틀 전 대통령과 평검사들과 토론회에서 제기된 SK그룹 수사 외압설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이때만 해도 관심의 초점은 ‘외압’이었을 뿐, 분식회계라는 말에 큰 무게를 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어 시간 뒤 검찰이 발표한 SK그룹 수사결과는 금융시장에 실로 메가톤급 폭탄이 돼 터졌다. 검찰은 SK글로벌이 2001회계연도에 이익잉여금을 1조5587억원이나 부풀린 사실을 새로 공개했다. 부도기업을 제외하고는 단일기업으로 사상 최대규모 분식회계였다.

구조개혁의 초라한 성과 드러나

SK글로벌을 중심으로 이날 SK 계열사들의 주식값이 하한가를 향해 치달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채권시장에서는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투신사에서는 투자가들의 펀드 환매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가들의 ‘셀 코리아’도 거세졌다. 주식과 원화를 팔아치우면서 종합주가지수는 떨어지고 환율이 치솟았다. 우리 경제에 대한 신용도를 반영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의 가산금리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대우사태’가 재현되는 모양새였다.



시장을 큰 충격에 빠뜨린 이번 사태가 전적으로 SK글로벌의 분식회계 파문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 아니다. 시장에는 오래전부터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앞두고 유가상승에 따른 한국경제의 타격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불안감이 외국인들에게 ‘셀 코리아’ 계기를 제공했다. 환율과 외국환평형기금채권 가산금리의 움직임을 보면, 2월 말부터 슬슬 상승세를 보이다 3월6일부터 상승곡선이 갑자기 가팔라진다. 북한이 2차 미사일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언론을 통해 공개된 날이다. 그런 상황에서 재계 순위 3위의 재벌 계열사가 천문학적 규모의 부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곡선의 기울기는 더욱 가팔라졌다.

금융시장 움직임은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당장 공황상태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한데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밝힌 것이 안정제로 작용했다. 김승식 삼성증권 연구원은 “1997년 말 외환위기는 기업부문의 부실화가 금융기관 부실화와 외환고갈로 이어지며 발생한 구조적 경제문제였다면, 지금의 경제상황은 이라크 사태와 북한 핵위기 등 지정학적 요인과 새 정부의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장기화되면서 나타나는 비구조적 문제”라고 평가했다. SK글로벌의 부채규모(8조2천억원)도 대우그룹(60조원)의 부채규모보다 작고, 은행권 손실부담 능력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태의 파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가 다시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먼저 지난 5년간의 구조개혁 성과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드러나버렸기 때문이다. 권태신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은 “무디스의 신용등급 유지 결정은 SK글로벌 분식회계 발표 이전에 결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실은 총수의 비리를 수사하다 우연히 불거져나온 것이다. 검찰수사가 없었다면, 상당기간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는 다른 기업의 분식회계도 얼마든지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검찰이 다른 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축소함으로써 문제를 일시적으로 감출 수는 있겠지만, 국내 기업에 대한 신뢰는 다시 추락하고 있다.

정부가 투자자들은 내버려두고…


사진/ 외국 경재계 인사들과 만나는 김진표 경제부총리(맨 오른쪽). 정부는 SK사건 발표 뒤 투자가들이 아니라 비리가 적발될까봐 두려움에 떠는 재계에 더 신경을 썼다. (박승화 기자)


SK 분식회계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은 더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 경제팀이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실을 안 것은 언제일까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정부의 대기업 동향 파악능력 정도라면 이미 오래전에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것이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해도,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이근영 전 금감위원장과 함께 검찰 관계자를 만난 것은 3월4일이었으므로 그 전에 안 것이 분명하다. 검찰 관계자는 “분식회계 문제는 워낙 복잡해 금감원에 분석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그 정도 기간이라면 대응책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발표 뒤 시장의 투자가들이 아니라 비리가 적발될까봐 두려움에 떠는 재계에 더 신경을 썼다.

정부의 대책은 한국은행이 시장에서 채권을 사들이고, 기관 투자가들로 하여금 펀드 환매를 자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우사태 때 써먹은 일방통행식 대책이었다. SK글로벌 사태가 SK그룹 전반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투자가들을 안심시키는 가장 핵심적 노력은 없었다. 소액주주운동을 이끈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SK 사태와 관련해 참여연대의 대응을 묻는 외국계 투자회사와 증권사의 전화가 나한테만 7~8건 걸려왔다”고 말했다. USB워버그증권쪽이 13일 SK텔레콤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2’에서 ‘매수2’로 올린 것도 참여연대가 “SK텔레콤으로 어떤 악영향이 파급되는 것에도 반대한다”는 분명한 태도를 전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경제지표들이 모두 불안하게 움직이는 가운데도 SK텔레콤 주가는 이날 큰 폭으로 반등했다. 정부가 이번 사태 해결에서 가장 역점을 둬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최근 외국인들의 움직임은 새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을 시험한 것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정부가 동요하는 투자가들은 내버려두고 채무자에 지나지 않는 기업대표들을 다독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투명하고 건실한 경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고건 총리는 3월12일 열린 경제단체장들과의 간담회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내부거래 일제 조사를 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며 한꺼번에 기업을 몰아치는 일이 없도록 속도조절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미 예정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공정위와 사전 상의 없이 없던 일로 한 것이다. 다음날 열린 경제단체의 경제부처 장관 초청행사는 재계 총수들이 장관들을 몰아치는 듯한 분위기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기업의 불법·탈법 거래에 대한 시장감독기관의 속도조절이란 말 자체가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했다. 한 증권사 리서치팀 간부는 “기업비리가 공개되면 증권사는 ‘단기 악재, 장기 호재’라는 표현을 써왔는데, 이제 그런 말을 하기도 머쓱하다”고 말했다.

SK글로벌 처리에 관심 집중


사진/ 외국인 투자가들의 반응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싸늘해졌다. 외환은행의 외환 딜링 룸. (박승화 기자)


북한 핵문제 등 아직 불확실한 변수가 많지만, 시장의 악재에 급히 반응하는 투자가들은 분위기만 안정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문제는 큰 흐름으로 움직이는 외국인 투자가들의 반응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싸늘해졌다는 점이다. 손성원 웰스파고은행 수석부행장은 14일 문화방송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 정부는 SK사태를 기업 투명성을 확실히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오히려 빨리 끝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자꾸 미루다 뒷날 다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면 그때는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주문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3월14일치)은 “SK그룹에 대한 수사가 혼란을 야기했지만, 재벌개혁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 투자가들의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러나 정부 경제팀은 정반대의 길로 벌써 발을 들여놓았다.

지난해 우리 경제가 높은 성장률로 ‘우등생’이란 소리를 들었던 것은 결코 경제 체질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실한 대기업 문제를 공적자금을 투입해 미봉하고, 돈을 풀어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한 데 따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외부여건이 나빠지자 후유증이 카드대란 등으로 계속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 경제팀의 정책방향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으로 카드사에까지 불똥이 튀자 정부가 카드사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카드사의 이익기반을 늘려주기로 한 것도 반시장적인 조처로 꼽히고 있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4월에 외국계 투자가들이 참여연대를 방문해 현 정부의 재벌정책 방향에 대해 물어보겠다고 한다. 그때 현 정부가 과거와는 달리 재벌개혁 등에 엄정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SK글로벌의 처리 방향이 새 정부 경제팀에 대한 또 한번의 시험무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주문은 SK글로벌을 시장논리에 맞게 처리하라는 것이다. 정부가 SK글로벌을 무리하게 살리기 위해 다른 계열사와 주주들에게 손실을 강요하는 쪽으로 움직이면 ‘셀 코리아’ 물결은 막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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