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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 웃기지 말라 때리는 자들은 무뇌아에 가까운 가련한 축생… 맞는 자들은 그 어떤 매에도 항거하라
이름이 무슨 죄가 있으랴만, 아내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른 사내의 이름이 ‘광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나는 그 이름을 ‘광끼’라고 발음하련다. 광끼(狂氣)야, 어쩌자고, 대체 어쩌자고 한 멀쩡한 사내의 영혼을 파먹어버렸니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
“여펜네들이 꼭 맞을 짓을 한다니깐요!” 상무이사가 뒤에 붙인 말이 더 섹시했다. “그래도 난 마누라한테 손을 ‘잘’ 대진 않아요.” 순서를 잡아 생각의 가닥을 풀어가보자. 일단 방망이질을 넘치는 부부애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폭력은 폭력일 뿐 따라하지 아니, 변명하지 말자!) 아울러 이 사안이 범국민적 관심사가 되는 걸 보면 어떤 특이한 종자의 못된 행각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로 공분을 자아내는 현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즉각 이를 받아 ‘가정폭력 갈수록 심각해져’, ‘해마다 50%씩 증가해’ 등의 뉴스를 쏟아낸다. 진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지, 50% 증가라는 수치의 근거는 무엇인지를 따져봐야겠지만, 그에 앞서 이처럼 가정폭력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는 현상은 커다란 뜻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곧 국가와 등치관계기 때문이다. 비약이나 과장이 아니다. 방망이질을 특정 가정 ‘안’의 문제로만 들여다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 게 이 사안의 특징이고 핵심적 요소다. 폭력은 누가 행사하는가. 당연히 강자가 약자에게 저지른다. 왜 폭력을 휘두르는가. 물론 지배하고 복종시키기 위해서다. 폭력은 무엇을 낳는가. 공포와 불안과 인격파탄을 낳는다. 그런데 과연 이 공식은 참인가 광끼의 야구방망이 사건에 비춰보자. 그들 부부 가운데 누가 강자였는가. 알려진 사실대로 보면 남편은 뚜렷한 벌이 없이 성공한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내가 현실적 강자다. 하지만 남자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남편이고 가장이고 호주다!’. 이유 없이 부아가 치밀고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발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간간이 폭력을 휘둘렀지만 ‘지배와 복종’은커녕 외도를 의심하는 상황으로까지 사태가 악화됐다. 폭력을 행사한 쪽이 오히려 공포와 불안과 인격파탄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남의 부부 속사정을 어찌 알겠는가마는 갈비뼈·골반뼈를 뽀개놓은 과격한 열등감 폭발에 비춰볼 때 꽤 근거 있는 추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광기여, 부디 사랑을 말하지 말라
둘째는 이른바 외도 의혹건. 이 대목은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오해를 받은 피해여성쪽에서 너무도 억울해할 문제기에 언급하기가 정말 조심스럽다. 하지만 의혹이 있었다니 자체로만 보자. 자, 잘난 ‘싸나이’로서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 어쩐지 아내가 수상하다,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틀림없다, 이런 의혹에 사로잡히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슬프고 가슴 아파서 눈물이 난다. 엉엉 울어도 시원찮다. 그러고는 글쎄, 격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빠져드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물론 화도 나겠지만 자존심이 있는 사내자식이라면 다른 남자를 만나게 만든 자신의 모습부터 부끄러워해야 옳다. 그것이다. 슬픔과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라면 결단코 폭력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자기반성도 주제파악도 없이 흉기를 휘둘러대는 오묘하고 뻔뻔스러운 심리세계를 헤아릴 길이 없다. 물론 그러니까 광끼겠지만. 광기(光氣), 다만 광기여, 그 입에서 부디 사랑을 말하지 말라. 폭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평범하고 멀쩡한 곳에서 온다. 나치 학살자들은 대개 자상한 가장에다 학식도 높은 사람이 많았다. 사적 폭력이 유난히 많은 걸로 세계적 명성이 자자한 우리 사회 폭력성은 출발점이 국가에서부터 비롯된다. 국가의 기초단위인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또는 직장에서 폭력의 발톱을 감춘 복종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내면화시킨다. 인권에 선행하는 국가 공동체의식, 충효를 내면화시키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사적 폭력-린치의 주범이다. 이른바 ‘사랑의 매’를 맞으며 성장한 30~40대 이상 연배들은 폭력의 의미를 모두 경험적으로 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때리는 세상을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나이든 세대가 이상하게 되새김질하지 않는 진실이 있는 것 같다. 하늘 아래 ‘사랑의 매’란 없다는 것, 맞아야 하는 나이에서 때릴 수 있는 나이로 진입해보면 어떠한 매도 분풀이, 우월감 과시 또는 열등감의 반작용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맞은 자가 때리는 자가 된다. 왜 그럴까.
폭력의 대물림론, 말이 안된다
이에 대한 유구한 학설이 대물림론이다. 맞았기 때문에 때리게 된다는 논리 아닌 논리다. 말이 되는가. 정신과에서 ‘병적인 동일시’라는 증세가 그것인데 스스로 정신질환자라고 고백하는 건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맞은 기억을 연장시켜 자기 아이를 패고, 학교 때 선생과 선배에게 맞은 ‘빳다’를 후배에게 대물림하고, 군대 고참에게 맞은 대가로 신참을 패고 급기야 아내까지 팬다면, 그렇게 경험에서의 반성 없이 전 세대를 답습한다면 무엇 때문에 새로운 한 인생을 산다는 말인가. 결국 괴로운 개인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책에 그 이야기를 쓸 정도로 가혹한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일상적으로 도끼나 칼이나 가죽혁띠가 동원돼 생사의 공포를 느끼며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말 많이 맞아본 사람이라면 피멍이 붉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이며, 날아오는 주먹이나 발길질을 어떠한 각도에서 맞아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맞은 매는 전혀 대물림되지 않았다. 단순한 이유다. 폭력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결단코 없어져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때리는 자들은 들으라. 당신들은 무뇌아에 가까운 가련한 축생이다. 지금 때리는 자들을 양산하고 방치하는 국가는 들으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때리는 자들을 처벌하라. 현대국가에서 사적 폭력은 금기며, 공적 영역에 해당된다. 지금 매맞는 자들은 들으라. 이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 정당한 매는 더더욱 없다. 어떠한 매에도 항거하고 절대로 닮지 말라. 그리고 TV 드라마 제작자들이여, 남녀 사이에 정말 그렇게 걸핏하면 뺨 갈기는 장면이 나와도 되는 거요 게다가 광끼 앞에 눈물의 순애보 운운하는 신문들이여, 제발 주접 좀 그만 떠시라. 김갑수/ 시인·방송인 dylan@unitel.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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