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2월13일 제446호 

대북 비밀송금의 진실과 거짓

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던 정상회담… 김대중과 김정일, 정주영의 운명적 관계

김대중, 정주영 그리고 김정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2억달러+α 송금’의 비밀은 세 사람의 운명적 만남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햇볕정책이 한반도에 몰고 온 광풍도 따지고 보면 이들의 궁합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져 가능했다. 대북사업을 총괄해온 현대아산의 고위 관계자들은 지금도 “정주영 명예회장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참담한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텐데…”라며 짙은 아쉬움을 토해낸다.

북한, 현대의 사업구상을 역이용하다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2억달러 비밀 송금의 속사정을 캐기 위해서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얘기부터 끄집어내야 할 것 같다. 정 명예회장은 92년 대통령 선거 낙마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 보복은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고 말할 정도로 5년간은 숨죽여 지내야 했다. 그를 더 곤경에 빠뜨릴지 모를 대북사업의 재개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98년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그에게 ‘가뭄 끝에 만난 단비’와 같았다. 더구나 김대중 정부가 기치로 내건 햇볕정책은 실향민 정주영의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금강산 개발사업의 꿈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대북접촉을 시작한 정 명예회장은 마침내 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앞세운 판문점 통과라는 초유의 이벤트를 연출하게 된다.

그 뒤 10월 정 명예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만남을 갖고,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두 차례 더 손을 맞잡았다. 김 위원장은 자신 못지않게 시원시원하면서 통 크게 나오는 정 명예회장에게 깊은 신뢰감을 갖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북한 지도부 앞에서 그들의 구미에 맞는 대담한 경협구상들을 펼쳐놓았어요. 당시 달러에 목말라 있던 북한으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바와 다름없었던 셈이죠. 북쪽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도 점차 ‘이제 우리도 잘 살 수 있겠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들떠 있었죠.” 정 명예회장을 가까이 보좌했던 현대 관계자의 말이다.

정작 옆에서 지켜보던 실무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무리 외자를 유치해서 북한 사업을 벌인다 해도 당장 조달해야 할 엄청난 사업 비용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수익성도 불투명해 보였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늘 같은 왕회장의 뜻이 워낙 확고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북한이 현대의 사업구상을 역이용한 데서 불거졌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사업 등이 그처럼 괜찮은 사업이라면 사업대가를 크게 요구해도 되리라고 판단한 듯하다. 현대의 다른 관계자는 북쪽의 이런저런 요구사항은 끝이 없었고,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고 회상한다.

현대 관계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정 명예회장은 애초부터 돈을 크게 벌 목적으로 대북사업에 손을 댄 것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북쪽의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는 이런 노력들이 장기적인 투자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지난 2월5일 경기도 하남시 고 정 명예회장의 선영에서 “(2억달러 송금은) 명예회장께서 남북 평화사업의 입장에서 제기한 것”이라고 밝힌 대목은 당시 정 명예회장의 의도를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다른 고위 관계자는 이 대목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우리가 첫 단추를 잘못 꿴 측면도 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당시 정 명예회장이 분에 넘치는 사업 구상과 그에 상응한 대가를 제시했다. 그 뒤 북한은 정 명예회장의 ‘구두 약속’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바람에 자금난으로 그룹 전체가 흔들릴 때조차 계약조건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목소리도 있다. 정 명예회장 최측근은 이렇게 강변했다. “정 회장은 절대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인 게 아니다. 원래 일본 기업들이 금강산 관광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몇십년의 독점 사업권을 다 가져가면 우리는 어떡하느냐. 정 회장은 순수 민족 동포애로부터 관광대가가 9억달러가 아니라 30억달러라도 쓰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을 갖고 있다.”

군부의 마음 열기 위한 상상 밖 노력들


사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98년 6월 판문점을 경유한 소떼몰이 방북으로 남북관계의 새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북한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현대의 큰소리도 정 명예회장이 살아 있을 때 통하는 얘기였다. 현대는 정 명예회장 사망 뒤 금강산 관광 대가를 제때 북한에 지급하지 못해 쩔쩔매야 했다. 2005년 초까지 단계별로 9억4천만달러를 건네줘야 하나 금강산 관광의 수익구조가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한 이 금액을 조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북쪽 사업 파트너가 현대 사정을 헤아려 금액을 깎아줄 수 있을까. 미리 결론지으면 쉽지 않아 보인다. 돈이라는 실리 때문에 군사적으로 민감한 금강산을 양보한 북한 군부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사정 탓이다.

북한 군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 명예회장이나 현대쪽에서 쏟아부은 노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현대쪽 사람들은 얘기한다. 물론 금강산과 개성공단 등의 사업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지 않은 뒷돈도 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뒷돈을 대지 않고는 대북사업 시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뿐 아니라 분단 대치상황에서는 모든 사업이 북한 군부의 이해와 직결돼 있다. 따라서 이들의 양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뭔가 실리를, 그것도 사전에 보장하지 않으면 더는 사업을 진척시킬 수 없다. 이는 대북사업의 철칙처럼 지금도 강고하게 굳어져 있다. “북한이 그저 정 명예회장의 얼굴 봐서 50년 넘게 굳게 닫아놓았던 판문점을 열고, 금강산 관광길을 열었겠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은 돈 때문으로 봐야 한다.” 현대의 대북사업을 죽 지켜봐온 정보당국자의 말이다. “아마 판문점 통과하는 데 1억달러, 김정일 국방위원장 만나는 데 1억달러 식으로 북한이 요구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북한의 요구사항이 까다로워지고, 초청료·인사비 등과 같은 이름의 뒷돈도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사진/ 올 1월27일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특사 일행. 경협을 통해 안보위협을 해소하려고 대북 비밀송금을 주도했던 임 특보가 언제 입을 열 지가 관심사다. (AP연합)


정상회담을 한해 앞둔 1999년은 금강산 호화 유람선이 순풍을 타고,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 가며 통일농구대회가 열리는 등 북한과 현대의 밀월관계가 정점에 다다른 시기였다. 이미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속셈을 알 정도가 된 현대와 북한 실무자 사이에서 남북정상회담 얘기가 농반 진반 솔솔 나오게 된 시점도 이때부터다. 흥미로운 대목은 정상회담의 개최 필요성을 대남 창구인 북쪽 아태 실무자들이 먼저 제기했다는 사실이다. 정상회담이 적게는 자신들이 추진하는 남북경협을 보장하고, 크게는 민족통일을 앞당겨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같은 해 10월1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서해공단 개발 기본합의서를 맺는다. 하지만 양쪽은 협상을 진전시키면서 일찌감치 벽에 부닥치게 된다. 경협사업을 논의하다 보니 남북 당국 차원의 합의가 선행돼야 하는 사안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햇볕정책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남한 당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남쪽 당국과 대화에 나서라고 김 위원장의 등을 떠밀었고, 남쪽의 김대중 대통령도 화해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간 정부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밝히고, 정 명예회장 방북 귀환 직후인 10월19일 국정연설 때는 남북민족공동체 건설을 강조했다.

정상회담 막전막후


사진/ 대북 비밀송금의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금강산 육로관광. 정부와 현대의 출혈이 컸던 만큼 남북관계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김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정 명예회장과 현대쪽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북한 김 위원장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몰두했고, 점차 자신감도 커져갔다. 김 대통령은 2000년 1월1일 신년사에서 또 한번 남북경제공동체 구성을 제의하더니, 3월9일 독일 베를린에 가서 북한에 대규모 인프라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김정일 위원장을 ‘합리적인 지도자’로 추어올리고, 북한 특수를 예고하는 등 북쪽 지도부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했다. 북한이 나중에 정상회담을 수용한 이유가 단지 남쪽의 갑작스런 거액의 대가 제시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전 2년 동안 일관성 있게 전개된 햇볕정책과 현대의 금강산 관광 등을 통해 양쪽 사이에 쌓인 신뢰관계 등의 분위기 조성이 무르익고 있었기에 정상회담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김 대통령과 현대의 합작 노력은 북한 지도부의 경계심을 크게 누그러뜨렸고 마침내 3월17일부터 4월8일 사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에서 남쪽에서는 청와대(김대중-박지원), 국정원(임동원-김보현), 북쪽에서는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김용순-송호경-강종훈-황철) 중심으로 본격적인 정상회담 막후 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다들 이때 현대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궁금해하는데, 이는 상식적인 얘기 아니냐. 진짜 우리가 속시원히 이런저런 측면지원을 했다고 속시원히 까발리고 싶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할 얘기들이 많다. 지금 언론에 나오는 얘기들 가운데는 소설처럼 쓰여진 것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공법이 필요하다면 진상을 어느 정도 밝힐 수도 있지 않겠느냐.” 기자 못지않게 답답함을 호소한 현대의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아예 큰맘먹고 진상을 다 공개했으면 하는 바람도 숨기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현대가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정상회담 합의 발표 당시 황원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우리 베를린 선언이 영향을 미쳤고, 기폭제가 됐다. 또 그 이전에 절박한 북한의 경제사정이 회담 성사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상회담이 열리면 사회간접자본 논의가 있을 것이고 단계적으로 가능한 분야부터 협력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북한과 인프라 경협 사업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던 대기업은 현대뿐이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이 30억달러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막후 협상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북한이 베이징 비공식 접촉라인을 통해 3월17일 상하이에서 특사회담을 열자는 제의가 왔다. 물론 그 이전에 구두 협의는 여러 차례 오갔다. 첫 특사회담 뒤에도 몇 차례 특사회담과 비공식 접촉이 진행됐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4·13 총선 전에 정상회담에 합의해주는 대가로 여러 가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는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라 수용할 수 없다며 총선 이후에 본격적으로 다시 얘기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북한이 이왕 정상회담에 합의해줄 거면 총선 전이 나으리라는 판단을 한 듯하다. 4월8일 특사회담을 열자는 제의가 다시 왔다. 그래서 정상회담 합의가 극적으로 타결된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조심스런 설명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를 분명히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이 요구한 만큼의 터무니없는 액수는 아니고 남쪽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수준과 명분으로 타협에 이르러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음을 강하게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애초 북한이 30억달러까지 요구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극소수 연루된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사실을 확인하긴 어렵다. 남쪽 정부로서는 그냥 정상회담 대가로 거액을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현대의 굵직굵직한 대북사업의 원활한 이행을 조건으로 지불했다는 게 정부와 현대쪽 관계자의 일치된 견해다. 김대중 정부는 베를린 선언을 통해 정상회담에 응한다면 대규모 인프라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터이기에 현대의 대북사업 지원은 곧 북한과의 베를린 선언 약속을 실천하는 의미도 있었던 셈이다. 실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온 5대 핵심 경협사업인 경의선·동해선 도로·철도 연결, 개성공단 건설, 금강산 특구개발 및 육로관광 등은 모두가 현대를 떼놓고 추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 2억달러 어떻게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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