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2월13일 제446호 

평화, 돈으로 산다는 것은…

독일 통일 사례 분석에서 날카롭게 맞부딪친 찬반논란, 그 ‘선례’가 남긴 것


사진/ 89년 8월,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서독의 끈기 있는 동방정책이 독일 통일에 큰 몫을 했다. (GAMMA)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 번지가 없어진 것처럼, 현대그룹 대북 송금이 확인된 뒤 ‘돈으로 평화를 산다’는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뇌물이다’, ‘퍼준 돈이 핵폭탄 되어 돌아왔다’는 식의 날선 공격이 쏟아졌다. 궁지에 몰린 정부나 여권 인사들은 과거 서독이 통일 전에 동독에 우리보다 몇배나 많은 돈과 물자를 지원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클린턴, 중동 평화를 사다

얼마 전까지 “독일 등의 경험은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던 이른바 ‘햇볕론자’로 분류되는 학자나 전문가들의 태도도 조심스럽다. 평소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 정도가 아니라 ‘돈으로 평화를 사야 한다’는 주장을 펴던 사람들이 실명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한사코 꺼리기도 했다. 한 북한 연구자는 “학자적 양심과 소신에서 나온 주장마저 ‘정신나간 소리’ 정도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는 지원하되 돈의 사용에 관한 투명한 검증을 전제로 한 새로운 대북 지원 틀을 세우라는 요구도 한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한반도 평화라는 총론이 옳다고 각론에 해당하는 햇볕정책 추진과정에서 국민을 속이고 진실을 덮어두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판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 반대로 각론에 하자가 있고 투명하지 않으니 총론까지 폐기하자는 것은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사진/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아라파트 수반. 돈으로 평화를 사는 방식은 국제정치에서 드물지 않다. (SYGMA)


돈으로 평화를 사는 방식은 국제정치에서 드물지 않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중동평화협상에도 돈이 걸려 있다. 이 돈은 미국 주머니에서 나온다. 미국 처지에서는 중동이 평화로워지면 기름값이 안정되고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가 진출할 중동 시장이 넓어진다. 1979년 3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집트는 대가로 매년 20억달러가량을 받는 알려졌다. 이스라엘 역시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매년 28억달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7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평화협상 때 협상을 중재하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양쪽에 영토를 양보하는 대가로 수년 동안 150억달러를 제의했다. 이를 두고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돈으로 평화를 산다’는 주장에 대한 찬반 논란은 특히 독일 통일 사례 분석에서 날카롭게 맞부딪친다. 그동안 통일부 등 정부당국은 독일 통일이야말로 화해와 협력- 다시 말해 돈으로 평화를 산- 의 대표적 ‘선례’라고 주장해왔다. 보수세력은 서독의 지원은 △현금을 피하고 물자로 지원했고 △동독에 지뢰제거 등 대가를 꼭 챙겼고 △투명하게 동독을 지원했다고 맞섰다. 한마디로 한국과 서독의 사정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한나라당 등이 이런 주장을 폈다.

하지만 동서독 관계를 따져보면 이런 주장은 빈틈이 많다.

1969년 10월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동방정책을 펼치자 반발이 심했다. 1970년 5월 제2차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리자 서독 우익세력은 “민족 반역자 (당시 동독 수상) 빌리 슈토프와 빌리 브란트, 손에 손잡고” 등의 깃발을 앞세우고 규탄 시위를 벌였다. 동방정책에 반대하는 ‘슈프링어’ ‘바우어’ 출판사 계열의 <바이에른 쿠리어> <도이칠란트 매거진> <나치오날 차이퉁> 등 언론들은 ‘브란트가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었다’, ‘국가와 민족, 유럽과 세계에 대한 죽음의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남쪽에서 벌어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불리는 에곤 바르(81) 전 서독 연방장관은 2001년 방한 기자회견에서 “사실 동방정책은 ‘서독이 동독을 지원하면 동독 정권 집권기반만 굳혀줄 것’이란 비판에 부딪혀 별 인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정말 서독은 현금 피하고 물자로 줬나




일부에서는 서독 정부가 정치범 3만3755명의 석방비용 34억5천만마르크를 동독 정권이 아니라 동독 주민을 위해 쓰이도록 현금이 아닌 물자로 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독 정부가 민간 차원에서 동독에 지원한 1044억5천만마르크는 정치범 석방비용을 빼면 대부분 현금으로 지원됐다. 서독 정부는 1959년부터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주민에게 환영금으로 1인당 30마르크를 지원하였으며, 1987년부터는 연간 1번에 한해 100마르크를 지원했다. 서독 정부는 서독이나 서베를린을 방문한 동독 주민들에게 1959년부터 1989년까지 20억마르크를 지원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동독은 갖가지 명목으로 서독으로부터 돈을 챙겼다. 동독은 1951년부터 서독-서베를린 도로이용료를 받았고 입국비자료 15마르크, 통과비자료 5마르크를 받았다. 서독의 추산에 따르면 서독 국민이 1968년부터 1989년까지 약 10억마르크를 비자발급료로 동독 정부에 지불했다. 동서독 경제교류를 전공한 한 연구자는 “동독 정부에 지불된 금액의 유용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서독으로서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서독으로서는 유용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치범 석방비용만큼은 현금 거래가 아닌 물품지급 방식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이런 전략은 기본적으로 냉전시기 대공산권 주요 전략인 경제봉쇄의 일환으로 동구권이 현금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서독은 지원 내역을 검증했나


사진/ 민간단체 회원들이 분유를 싣고 북으로 향하는 배를 인천항에서 배웅하고 있다. (연합)


서독이 동독에 지원한 현금이나 물자는 동독 국민경제에 쓰였지만 통일 이후 동독 지도자들의 사생활에 사용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지원한 금액은 1974년부터 동독 당 총비서계좌로 넘어갔고, 국민경제를 위한 용도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서독사람들이 이용한 동독의 외화면세점 수입은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으로 흘러들어가 서독이나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도홍 박사는 논문 ‘독일 통일 전 동서독 교회의 역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독 교회는 도움을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단 한번도 도와준 돈의 사용처를 확인하지 않았다. 서독 정부는 교회의 재정적 지원 프로그램을 막후에서 도왔다. 서독 교회가 시행한 동독을 위한 재정지원 프로그램은 동독 교회를 돕는 A형과 정치범 등의 석방을 위한 B형이 있었는데, A형을 위해서는 반액에 해당하는 재정지원을, B형을 위해서는 전액을 담당하였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생색을 내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확실한 점은 동독이 주권국가의 실체로 사실상 인정받고 있었던 통일 전 동서독 관계에서 동독이 받은 돈을 서독이 용도를 지정해 사용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접촉을 통한 변화’란 동서독 관계에서 서독이 감내해야 할 한계였다.

서독은 상호주의를 지켰고 지원 절차가 투명했나

보수세력은 서독의 동독 지원이 얼마나 철저하고 까다롭게 이루어졌는가의 사례로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 있었던 차관 지급보증을 꼽는다. 서독이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동서독 여행규제 완화와 동독 탈출자를 사살하기 위해 동독이 국경에 배치한 기관총의 철거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1982년 10월 외환위기에 빠진 동독은 대서방 무역수지 적자와 누적된 대외 빚을 갚기 위해 서독에 도움을 요청했다. 1983년 6월까지 이어진 비밀 협상과정에서 당시 서독 콜 수상은 차관공여에 대한 동독의 반대급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하지만 동독 협상 대표는 이 문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고 결국 차관 공여와 정치적 반대급부를 연계하려는 서독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1983년 7월 콜 서독 수상은 동독이 취할 인도적 분야의 대한 약속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10억마르크를 차관으로 공여했다. 법적으로 민간은행이 대출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동독이 갚지 않을 경우 최종 책임은 서독 정부가 져야 했던 만큼 명백한 정치적 거래였다.

동독쪽의 반대급부가 문서화되지 않은 까닭에 1983년 7월 서독에서는 의회 차원에서 차관공여 과정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고, 서독 정부 안에서도 일부 장관들은 차관 공여가 주무 부서인 내독거래청과 고려 없이 결정됐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콜 수상은 비밀협상을 통해 차관공여를 성사시켜 뒷말이 많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협상대표를 위임했고, 협상방식도 관계자의 메모나 진술에 따랐다. 공식계통을 밟지 않는 음모적 일처리였다. 차관공여 관련 모든 결정이 내려진 뒤에야 내각과 관련 당국에 통보됐다. 게다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부대조건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동독의 반대급부를 기약할 수 없었던 서독에 호기가 찾아왔다. 동독의 외환사정이 더 나빠져 83년 12월 제2차 차관 공여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돈이 급한 동독은 2차 협상에 맞춰 국경지역의 기관총 철거, 가족결합조건 완화 등의 조처를 취했다. 그리고 1984년 7월 제2차 차관으로 9억5천만마르크가 동독으로 갔다.

전문가들은 차관공여와 관련해 동서독 상호주의가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1차적으로 서독이 문서에 의한 반대급부를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 점을 꼽는다.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면서도 정권에 위협적인 파급효과를 막으려고 했다. 만약 서독이 엄격하게 상호주의를 적용했더라면 오히려 동서독 관계를 후퇴시켰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것은 차관 공여 이후 서독의 정책이 ‘급부 대 반대급부’란 유형적 상호주의에서 ‘신뢰 대 신뢰’란 무형적 상호주의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동서독 교류와 협력의 속도가 붙을으면서 동독 경제의 서독 의존도는 40%까지 이르렀다. 위기감을 느낀 동독은 갖가지 정책으로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서독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구조적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6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독일은 통일됐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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