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지난 1월 8일 열린 반전 시위에서 촛불 앞에 앉아 있는 이라크 어린이. 전쟁이 터지면 이 어린이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AFP연합)

국경을 넘어온 이라크 이주노동자들이 요르단 사람들조차 기피하는 온갖 허드렛일들을 도맡아하고 있다. 91년 걸프전 이전까지 요르단 사람들을 수족부리듯 한 강대국 이라크는 없었다. 마치 한국 기업인이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 막노동시장에서 품팔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걸프전 이후 가해진 잔혹한 경제제재는 이라크인의 삶을 현기증나는 속도로 추락시켰다. 싱글싱글 웃는 이라크인들의 표정에선 자기 연민마저 찾아볼 수 없다. 절절한 신세한탄도 하지 않는다. 요르단 암만에서 흔히 봐온 풍경이다.

테러-대량살상무기-후세인 제거

이라크의 곤궁한 처지를 충분히 연상케 한다. 그런 이라크를 향해 부시 미국 대통령은 “더 이상 인내심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수주 안으로 걸프지역 미군은 완벽한 임전태세를 갖추게 된다. 미국은 전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한스 블릭스 유엔 무기사찰단장이 3월에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도, 사찰단이 발굴한 낡은 화학탄두를 문제삼는다. 이라크의 낡은 재래식 무기와 생화학 무기들이 실은 이란-이라크전 당시 미국에게서 받은 것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이라크는 물론 인접국가 상사 주재원이나 외국인들이 속속 철수하고 있다. 동요하지 않는 건 오직 ‘인내심 많은’ 이라크인들뿐이다. 집단탈출 움직임도 없고, 생필품 사재기는 불가능한 만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참상을 겪어오면서 전쟁은 언제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걸프지역에 배치된 미 항공모함. 미군은 수주 내로 완벽한 임전태세를 갖출 것으로 보인다. (AFP연합)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반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세계는 바그다드에서 첫 포성이 울리기 전에 다시 한 가지를 되물어야 한다. 지금, 왜 이라크인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목표가 아프가니스탄, 두 번째 목표가 이라크라는 사실은 중동문제 전문가들 상당수가 동의했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9·11테러가 터지자 미 정보기관들과 매체는 놀라울 정도의 민첩성을 발휘하며 사담 후세인과 빈 라덴의 연루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2001년 9월14일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인 제임스 울시는 “사담과 빈 라덴의 협력은 아주 많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들의 억척스러운 노력과 공작에도, 사담과 빈 라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다시 문제삼기 시작했다. 지난해 초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악의 축 국가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대량살상무기로 세계 평화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1월27일 유엔 무기사찰단의 1차 보고를 앞둔 시점에서, 낡은 화학무기 탄두 몇개라는 가시적인 성과만을 거두자, 미국은 사찰단의 조사결과와 상관없이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인 논리마저 무시한 종교적인 신념에 가깝다. 현실적인 대의명분에서 종교로. 미국의 불타는 전의에는 이라크전이 세계의 악인 후세인을 징벌하는 ‘성전’이라는, 미국내 보수 기독교계의 믿음이 투영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악 개념만으로 흔쾌히 설명되지 않는다. 테러연루-대량살상무기 개발-후세인 축출로 명분을 바꿔가면서까지 미국이 절호의 기회에 이라크를 치지 못해 안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운 짓을 해도 북한처럼 ‘왕따’시키는데 만족 못할 절실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석유는 매력적이다

사진/ 1월 17일 걸프전 12주년 기념 연설에서 대미 항전 의지를 밝힌 후세인. (AP연합)

미국의 격주간지 <포브스> 2002년 10월28일치는 ‘바그다드를 통해 석유수출국기구(OPEC) 때리기’라는 기사에서 “부시 행정부가 후세인을 축출하려는 이유는 이라크에 친미정부를 세워 석유가격을 떨어뜨리고 OPEC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은 필자가 그동안 만나온 이라크 관계자들의 주장과 완벽히 일치한다.

이라크를 제외한 OPEC 회원국들은 하루 2900만 배럴의 원유생산량을 확보하고도 고유가 정책을 위해 생산량을 2170만 배럴로 묶어두고 있다. 이라크의 원유매장량은 세계 2위로 사우디아라비아(2600억 배럴) 다음으로 많은 1220억 배럴(잠재 매장량은 2천억 배럴로 세계 최대)이다. 이는 미국 석유 매장량의 5배에 이른다. 이라크는 여기에 110조 입방피트의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라크산 원유는 황 함유량이 낮고 유정은 지표면에 가까이 위치해 퍼올리기 쉽다. 원유에서 물이나 가스를 제거할 필요도 없다. 사우디의 채굴단가가 배럴당 2.5달러, 멕시코만과 북해의 채굴단가는 각각 3달러, 4달러인 데 반해 이라크는 1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란과의 전쟁과 걸프전 이후 유엔의 감시를 받아, 생산량이 200만 배럴 아래로 낮아졌지만 석유산업 재건에 300억달러가 투입되면 하루 80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후세인 이후 친미 정부가 들어서면 현재 30달러선에서 형성되는 유가가 15달러로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이라크와 미국의 우여곡절은 20세기 말부터 시작된다. 1958년 영국의 괴뢰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장악한 후세인은 미국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긴 했어도 ‘절대 악’은 아니었다. 심지어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우방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1982년 여름 이후 수세에 몰리는 이라크를 돕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이라크를 삭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라크의 패배를 막았다. 미 상무부는 1980년대 중반 탄저균 등 생물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몇십종의 품목들을 이라크로 수출하도록 허가했다. 1987년 이라크가 북부 쿠르드족에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난 뒤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을 때도 미 행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후세인과 미국의 동거와 별거

사진/ 지난해 10월 15일 이라크 대선 투표소 앞에서 사담 후세인을 연호하고 있는 이라크 군인들. (GAMMA)

문제는 그 이후였다. 미국의 석유에 대한 탐식만큼이나 이라크의 아랍 지배의욕이 높아지는 시점에 1991년 걸프전이 놓여 있다. 중동장악을 위해 걸프지역 위기를 애타게 바라던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영토분쟁이 거의 한달여 계속되는 동안 방관했다. 당시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와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아랍국가끼리의 영토분쟁에 미국은 개입의사가 없음을 여러번 강조했고, 미 정보기관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을 사전에 알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미국은 뒤늦게 분노했으며, ‘사막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걸프지역에 미군을 항구적으로 주둔시킬 수 있게 된다.

미국은 걸프전부터 줄곧 독재자 후세인을 맹비난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지키려 한 쿠웨이트와 사우디는 노예제도와 고문·여성억압이 남아 있는 사회다. 물론 후세인의 강압정치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중동의 영원한 강대국 이라크에 대해 적대감이 있는 주변 아랍국 주민들도 후세인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10만t 이상의 폭탄을 이라크와 쿠웨이트인들의 머리 위에 퍼붓고 유전지대를 장악한 미국, 1991년 이후 경제제재 조처로 이라크 어린이 12~30%가 발육장애일 정도로 빈곤을 강요한 미국을 해방자나 정의의 수호신으로 부를 생각은 없어보인다.

9·11은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테러 이후 반미를 외치는 중동 민심과 각국 정부의 움직임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미국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고 있던 국가들이 서둘러 미국의 품에 안겼다. “이번 사건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미국은 전 세계에 그들의 지도자들이 심어놓은 가시를 수확하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두대의 비행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돌진한 뒤 이렇게 논평하는 지도자는 중동에서 사담 후세인밖에 없었다.

친미바람 부는 중동

특히 ‘깡패국가’들의 변신이 주목된다. 1991~96년 오사마 빈 라덴에 은신처를 제공한 수단은 정보를 적극 제공하며 대테러전의 확실한 동맹국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은 존 댄퍼스 전 상원위원을 평화특사로 임명해 이에 보답했다. 카다피의 영향력이 쇠진한 리비아는 팬암기 폭파 혐의자에 대한 수사에 협력하면서 대미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고 있다. 걸프전 때도 부분적으로 미국에 협조한 시리아는 2000년 바샤르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친미색을 노골화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시리아는 미국의 대이라크 결의안에 동의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테러지원국가로 지목된 예멘도 마찬가지 경로를 밟았다. 미국은 지난해 12월10일 스커드 미사일을 선적한 북한 선박을 나포했을 때 예멘의 항의를 받고 풀어줄 정도로 관대해졌다. 2001년 11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 대가로 1억3천만달러 상당의 원조를 받아냈다. 아프가니스탄전 이후 중동 전 지역에 성조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오직 이라크만이(보수파와 개혁파가 입장을 달리한 채 잠잠한 이란을 제외한다면) 홀로 서 있는 것이다.

사우디, 너 조심해!

미국이 이라크를 차지하면서 중동의 질서개편을 시도한다기보다는 중동이 완전히 친미 일색으로 질서가 개편되었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인 이라크를 친다는 설명이 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로 식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동질서 개편의 마무리 대상은 사우디아라비아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8월 미국과 사우디 사이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미국의 보수적 민간연구소인 랜드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악의 핵심이자 중동지역 내 미국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보고서를 썼기 때문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아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앗사우드 왕조를 중심으로 사우디 부족들이 통일왕국을 이룬 것은 1932년. 영국이 한동안 이 신생국가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했고 2차 대전 이후론 미국에게 넘어갔다. 미국이 1940년대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군기지를 사용하고 사우디 군대의 훈련과 무기 공급을 거의 독점하면서 아라비아반도에 대한 군사적 통제권을 장악했다. 아람코가 사우디에 의해 국유화된 1988년까지 사우디의 석유산업은 실제로 미국 대자본의 것이었다. 왕실에 지불된 로열티는 왕실이 거액의 무기를 구입하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프간전쟁을 겪으면서 폭발하는 반미정서를 감당 못한 사우디 왕실이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사우디는 최근 들어 이라크와 국경을 개방하고 국제전화를 허용하는 등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이라크전이 일어난다면 사우디의 변화는 가시권안에 들어올 것으로 보인다. 미국 편에 선다면 성난 민심에 의해 왕조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고, 이라크 편에 선다면 미국이 후견인 역할을 내던지며 정권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타깃’으로 선정한 과정은 이전의 제국주의자들이 이라크를 유린한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1차 대전을 통해 터키를 굴복시킨 영국은 스스로 해방군이 되어 이라크를 접수했다. “자주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은 여러분의 것입니다”라는 영국 정부의 호언장담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은 1901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유전은 물론이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중심지라는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19년 파리강화조약에서 15개 승전국들은 중동의 지도를 놓고 나눠먹기를 했다. 자로 잰 듯한 중동지도는 이때 탄생했다. 당연히 노른자땅 이라크는 영국이 독차지였다. 이듬해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아랍민족 무장투쟁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이 시작된 이래 수개월 사이에 1만명 이상이 학살됐다. 1956년 2차 중동전 이후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누리 앗사이드 정권은 위기에 빠졌고 결국 1958년 압둘 카심 여단장이 이끄는 쿠데타로 몰락했다. 그리고 권력투쟁을 통해 집권한 후세인은 미국과 만나게 된다.

‘야만의 시대’를 인정하라

이라크인들은 종종 자신을 대추야자에 비유한다. 대추야자는 뿌리가 물줄기를 찾아 반경 수천m까지도 뻗어나간다. 그들은 대추야자처럼 오랜 역사 속에 풍상을 겪어오면서도 생명력이 뛰어난 불굴의 민족이라고 자부한다. 지지리 복도 없는 현대사에서 그들은 대추야자의 자존심으로 살았다.

왜, 지금 이라크인가라는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문제에서 상식과 법과 세계여론은 무력하기만 하다. 이라크에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를 보면서, 전쟁 찬성론자들은 최소한 우리가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폭력의 세기라 불린 20세기 야만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