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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수렁에 연대의 발판을… 가난과 부의 틈을 메우는 조세·복지 제도… 사회적 합의 바탕한 저소득층 지원책 마련
여태까지 우리는 빈곤을 ‘기다리면 해소될 대상’으로 여겨왔다. 경제성장이 빈곤을 없애줄 것이라는 개발도상국 시대의 소박한 빈곤관이다. 물론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운 뒤 운동장에 구르는 돌멩이만 차던 절대빈곤의 아픔은 어느새 먼 얘기가 되었다. 대신 상대적 빈곤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탓하는 상대적 빈곤은 빈곤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한국사회의 빈곤은 개도국 시절을 넘어 서구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산동네와 빈곤의 거리는 사라졌지만, 빈곤층이 일정한 층으로 굳어 사회 밑바닥에 은폐된 채 퇴적되었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이후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빈곤인구 1천만명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내걸고, 빈부격차 해소와 분배구조 개선을 복지철학으로 표방했다. “적어도 먹고살고 치료하고 공부시키는 데는 시장의 구매력이 아니라 공동체 연대정신이 밑바탕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적 연대정신에 기초해 고착화된 소득불평등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연대정신 발휘해야 풀린다
물론 빈곤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그러나 이런 통념은, 노 당선자가 내건 사회적 연대에 대한 중·상류층의 저항을 낳을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부소장은 “적어도 산업사회에서 빈곤은 그 사회가 지닌 자원의 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제도와 원칙 때문이다. 이것을 재구성하려는 적극적인 정책 개입 없이 빈부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빈부 격차를 좁히는 정책은 복지·조세·시장의 세 가지 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시장의 경우, 신자유주의 지배질서가 빈곤층을 양산하지만 그런 시장논리에 대한 전면 거부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동원 가능한 정책수단은 조세와 복지제도다. 조세와 복지정책을 건드리거나 뜯어고치지 않고서 빈곤 또는 노동시장에서의 소득 불평등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중앙대 김연명 교수(사회복지학)는 “시장에서의 차별적 임금이 빈곤층을 낳는 주요 원인인데, 조세정책으로 한번 소득 재분배를 이룬 뒤 복지제도를 통해 다시 소득 재분배를 이루면 시장에서의 차별과 빈곤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경우 소득 불평등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균등)는 본래 0.417이었으나, 조세제도 개혁 이후 0.241로 감소했고, 여기에 다시 사회보장제도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0.197의 큰 폭으로 줄었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빈곤층을 얇게 하려면 빈곤선을 약간 웃도는 이른바 ‘빈곤 근접층’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현재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에서 빠지는 차상위계층(최저생계비의 100∼120%)의 빈곤위험을 막아줄 장치가 전혀 없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전부 아니면 전무’ 개념에 따라 수급자한테는 생계·교육·의료·주거 급여를 모두 주지만 차상위층에게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김연명 교수는 “빈곤층에 가까이 있는 부류는 막대한 사교육비에다 큰돈 드는 암치료 한번 받으면 패가망신하고 결국 빈곤층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들이 위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은 병을 부르고 병은 가난과 함께 오면서 빈곤이 재생산되는데, 준빈곤층은 대부분 빈곤선을 드나들다 저수지처럼 고인 채 결국 빈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따라서 준빈곤층인 차상위계층에 대한 부분급여(의료비·교육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노동빈민을 빈곤정책의 대상으로 포함 주목할 점은 차상위계층은 주로 노동빈민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실업으로 인한 장기빈곤뿐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노동빈민’ 역시 빈곤정책의 주요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폭넓은 노동빈민의 존재가 보여주듯 요즘 빈곤은 단순히 실업문제와 동일시할 수 없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구사해온 생산적 복지, 즉 일을 통한 빈곤 해소는 한계를 드러낸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만으로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 노동빈민 감소방안으로는 미국의 근로소득공제제도(EITC·Earned Income Tax Credit)가 있다. 저소득층 노동자에 대한 소득향상 프로그램인데, 소득이 일정수준 이하면 세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소득을 보전해준다. 2001년의 경우 아동이 2명 이상일 때 가구당 연간소득이 3만1152달러(약 3700만원) 이하면 EITC 혜택을 받았다. 당시 공적부조 대상인 빈곤선은 4인 가구 기준으로 연간 소득 1만7650달러(약 2100만원)였다. 빈곤선보다 176% 더 위에 있는 노동자 가구까지 EITC를 적용해 가처분소득을 높여준 것이다. 2000년 당시 미국의 전체 1억 가구 가운데 1920만 가구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으며, 가구당 수급액은 연간 평균 1557달러(약 186만원)였다. 물론 면세점 이하 소득자도 EITC의 수혜를 받는다. 이는 면세점 이하는 환급혜택을 안 주고, 모든 근로소득자를 대상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연말정산제도와 다른 점이다. 보건사회연구원 최현수 연구원은 “정부가 근로소득 감세정책을 많이 내놓았지만 근로빈민문제를 해결하려면 중산층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근로소득공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통상적인 복지 시스템과 처방으로는 빈곤의 재생산을 막기 어렵다는 점이다. 빈곤이 경제적 결핍에 국한되지 않고 교육불평등, 집값 폭등, 비정규직 차별 등 중첩적인 박탈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은 빈곤의 대물림을 해소할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빈곤층 자녀에게 대입 특별전형을 도입하거나 취업에서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김수현 부장은 “엄청난 사교육비 때문에 학원에 다닐 수 없는 빈곤층 자녀들은 첫출발부터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 농어촌특별전형처럼 도시 빈곤층 자녀들에 대한 교육혜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빈곤층의 삶은 주거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영구임대주택단지·쪽방지역 등을 특별대책지역으로 선포해 지원하거나 △‘주거빈곤선’을 정해 사람이 살 만한 최소한의 주거공간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또 피부로 와닿지 않는 지니계수 대신 ‘빈곤지수’를 개발해 빈곤선 이하의 인구, 빈곤층 자녀의 진학률·취업률 등을 해마다 평가해볼 수 있다.
저소득층 방치하면 사회적 비용 더 들어
절대빈곤층조차 제대로 못 돕는 형편인데 차상위계층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 없는 빈곤층이 굳어지면 사회적 비용은 더 많이 든다. 예컨대 노숙자의 경우 발생 이후에 대처하면 예방하는 것보다 예산이 3배나 더 들어간다. 한번 노숙자 신세가 되면 죽을 때까지 빈곤에 갇히는 ‘빈곤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그러면 사회가 평생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김수현 부장은 “빈곤층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제시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우리 사회가 성장 등 다른 가치보다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내건 ‘사회적 연대를 통한 복지’는 어떻게 여론을 조성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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