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노동자가구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늘어가고 있다. 가난이 대물림되면서 가난한 계층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김종수 기자)

“펴, 펴, 평균 얼마라고요”

박은석(38·가명·경기 안산시)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를 말더듬이로 만든 것은 2002년 3분기 도시 노동자가구의 월평균 가계소득이 286만원이라는 언론보도였다. “숫자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닙니까” 그는 통계가 잘못된 것은 아니냐고 따져물었다.

그는 물론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가계소득 통계는 모든 가구 구성원 소득을 더한 것인데, 그는 가구주만의 소득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가구당 취업자는 평균 1.5명이다. 또 통계에 나타난 소득은 월급 실수령액이 아니라 세금이나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을 원천징수하기 전 소득이고, 여기에다 이자소득이나 경조금으로 받은 것까지 모두 포함돼 있다는 사실도 간과했다. 그래도 박씨는 도저히 믿지 못한다고 했다.

커가는 아이들, 늘어나는 가계빚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소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서 생산직으로 13년째 일하는 그의 가계소득은 월 190만원 정도다. 여기에는 아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시내 백화점에서 일을 해 버는 25만원가량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저축 한푼 못하는 인생이다. 그동안 헛살았다”고 한탄했다.

삶이 늘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만 해도 제법 저축을 해 언젠가는 집을 사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비에다 전셋값 올려주느라 빌린 돈 이자를 내고 나면 저축할 돈은 거의 남지 않는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빚은 어떻게 갚고, 앞으로 전셋값이 더 오르면 어떻게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의 호소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당당하게 선언했지만, 통계수치 뒤쪽에 감춰진 진실을 들추면, 앙상한 뼈대만 남은 노동자들의 삶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노동자가구의 소득과 지출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통계자료는 통계청이 분기별로 발표하는 <도시가계조사>다. 이 통계는 농촌지역 노동자는 빠져 있고, 1인 가구도 제외됐지만 가장 최근까지 노동자가구의 소득추이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박씨와 함께 노동자들의 가계소득 통계를 따져보기로 했다.

먼저 소득이 가장 적은 가구부터 가장 많은 가구까지를 한줄로 세운 뒤, 이들을 10개의 그룹으로 나눠 그룹별 평균소득을 낸 것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계층별로 나누는 것은 소득분포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첫 번째 그룹(1분위)의 평균소득은 84만원, 두 번째 그룹은 134만원, 세 번째는 167만원, 네 번째는 198만원, 다섯 번째는 229만원….” 박씨의 가계소득은 180만원이니 소득이 많은 가구부터 치면 7번째 언저리였다. 중하층과 하층의 경계선이다. 가장 소득이 많은 열 번째는 612만원이다.그러니까 딱 중간인 240만원에서 월 50만원가량 모라자는 소득을 그는 벌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구의 계층별 실질소득 증감률

물가는 날뛰고 소득은 제자리

그러나 이 통계는 노동자들의 삶이 예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그동안의 물가상승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년 전보다 물가는 18.6%가량 올랐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실질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 계산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새로 계산한 통계수치를 보고서야, 박씨는 왜 자신의 가계가 그렇게 어려워졌는지 깨달았다. 노동자가구의 월 실질소득이 평균 0.3%가량 줄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3분기보다 국민 총소득이 8%나 늘었는데도, 노동자가구의 평균소득이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IMF로 인해 노동자들이 가장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박씨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노동자가구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가장 소득이 낮은 1분위 계층은 5년 전보다 8.2%, 2분위는 7.8%, 3분위는 6.8%나 실질소득이 줄었다. 이들은 아직 IMF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 끝날지 장담하기도 어렵다. IMF 전보다 실질소득이 늘어난 계층은 상위 20%뿐이었다. 최상위 10% 가구의 소득 증가율은 7.2%나 됐다(그래프 참조). 그러나 고소득층은 통계조사원에게 이자소득이나 임대료소득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소득격차는 더 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소득격차가 실업증가 때문이라면 98년 이후에는 소득격차가 완화돼야 한다. 그런데 98년 이후 계층별 실질소득 증가율을 따져보면, 거의 모든 계층이 비슷하다. 외환위기 직후 벌어진 소득격차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단지 최하위층의 소득만 98년 이후 상대적으로 많이 회복됐다. 이는 2000년 8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으로 이들이 혜택을 입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더욱 가난해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난은 가난을 낳고, 부는 부를 불렀다

사진/ 빈곤층의 빚이 늘어날 때 부유층은 부동산이 늘어난다. 아파트 청약결과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Economy21 박미향)

하위 30% 계층은 단지 실질소득이 줄어 삶이 어려워진 것만은 아니다. 실제 소비에 지출할 수 있는 돈도 줄었다. 노동자가구 전체로 볼 때 세금·국민연금·사회보험료 등의 이른바 비소비지출은 5년 전보다 무려 25.1%나 늘어났다. 물론 물가상승률까지 감안한 것이다. 비소비지출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비슷한 비율로 늘었다.

세금은 평균적으로는 늘어났지만 저소득층에는 큰 부담을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금을 제대로 걷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우리나라의 근로소득세율은 9%부터 36%까지 4단계로 돼 있다. 그런데 도시가계의 소득 가운데 직접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2년 3분기에 평균 3.1%에 지나지 않았다. 저소득층이야 적게 버니까 적게 낸다지만, 연소득이 8천만원이 넘는 상위 10% 계층의 세금도 소득의 10%를 넘지 않는다. 소득공제 제도를 이리저리 넓히더니 고소득자들만 큰 혜택을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국민연금 같은 공적 연금이나 건강보험료·고용보험료 등 사회보험료는 누구나 소득비율대로 늘었다. 그러나 당장 소득이 적은 저소득층에게는 큰 부담이다. 세금과 공적 연금, 사회보험료가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소득 하위 30% 계층의 경우 5년 전 3%대에서 지금은 5%다. 처분 가능한 소득이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가계를 쪼들리게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필수 소비지출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구는 대략 소득의 11%가량을 교육비로 지출한다. 경제가 어려워져도 교육비 비중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은 가난하더라도 자식교육만은 제대로 시키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지출 항목은 교통·통신비, 그 가운데도 통신비다. 노동자가구가 교통·통신비로 지출한 돈은 5년 전 소득의 14.3%였으나, 현재는 18%(평균 32만7천원)에 육박하고 있다. 휴대폰과 인터넷 이용이 필수가 된 까닭이다. 통신비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싸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민저축률은 2002년 들어 급격히 낮아져 26%대다. 그러나 소득에서 그 정도 비율을 저축할 수 있는 노동자가구는 소득 상위 20% 가구뿐이다. 집도 없고, 소득은 줄어 저축도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미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