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12월27일 제440호 

노무현의 당당한 성공

주류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을 뚫고 보수언론과 미국에 굽신거리지 않으면서도 승리하다


사진/ (이용호 기자)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 노무현’이 됐다.

권력의 변방만 돌던 상고 출신 정치인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에 올라섰으니 성공신화로는 제격이나, 그 틀로는 의미를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민주당의 재집권으로 해석하는 것도 너무 고루하다. 그저 “세상을 뒤집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87년 6월항쟁의 성공적 마무리

노 당선자는 지난 여름 8·8 재·보궐 선거 지원유세차 부산을 방문했다가 “6월항쟁 한번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진 적이 있다. 한참 흔들릴 때였다. 1987년 때처럼 아스팔트로 뛰쳐나가 세상을 한번 쓸어버리고 싶었을 게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그는 그의 열망을 이뤄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승리는 양 김씨의 분열로 실패한 87년 6월항쟁의 성공적 마무리다.

또 노 당선자의 열렬 지지자인 문성근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학농민혁명 이후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서 최초의 승리로 평가받을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노 당선자는 그렇게 우리 사회 주류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에 파열구를 냈다. 돈과 권력과 학벌로 철저히 무장한 채 수직적 위계질서를 형성해온 주류가 그 충격으로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승리의 의미는 올해 들어 노 당선자가 치른 3차례의 ‘대회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진/ "6월항쟁 한번 더 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선거를 통해 이뤄졌다. 87년 6월항쟁 부산거리 현장의 노무현. (민주당 제공)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이인제 의원을 꺾었고, 후보단일화의 승부에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를 이겼다. 마지막으로는 정 대표의 지지철회라는 ‘자해’성 역공을 뚫고 이회창 후보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이인제·정몽준·이회창 세 사람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우리 사회 주류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인제 의원은 3당 합당에 따라가 순탄한 정치적 성장을 이뤄낸 뒤, 민주당에 합류해서는 동교동 구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4년 동안 부동의 대선주자로 군림해왔다. 정몽준 의원은 재벌가의 아들로 아버지가 일군 부를 물려받은 뒤 월드컵 4강신화라는 행운을 업고 정치적 비약을 이룬 인물이다. 이회창 후보는 지난 5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 메인스트림이 2002년 선거에서 새로운 판단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우리 사회 주류의 상징적 인물이다.

노 당선자가 우리 사회 주류가 형성해놓은 고정관념에 도전한 것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지역감정의 아성에 몸을 던졌다. 지역대결 구도에 대한 도전은 사실 한국정치에서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래도 그는 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았고,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버리고 사지 부산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그는 6번 도전에 4번 떨어졌다. 다른 정치인들도 지역주의 타파를 말로는 외치지만 자신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정면으로 맞선 사람은 노 당선자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천정배 의원은 노 당선자를 ‘천연기념물’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노 당선자는 이번 대선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부산에서는 29.9%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쳐 과거 그가 부산시장 선거나 국회의원 도전 때 얻은 37% 안팎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수치는 전직 대통령들이 얻은 성적에 비교하면 앞으로 지역구도를 깨고 국민통합을 이뤄낼 기반을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87년과 92년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호남에서 10% 미만의 득표에 그쳤고, 97년 김대중 후보가 영남지역에서 13% 안팎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사진 찍으러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


사진/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흥겨워하는 노사모 회원들. 노사모는 노 후보 당선의 가장 큰 힘이 됐다. (박승화 기자)


그가 깨뜨린 또 하나의 성역은 보수언론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정면도전해 승리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신문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해온 보수언론의 집중적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들 언론의 무리한 요구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았다. 때로는 정정보도를 요구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훈수를 들어야 했다. 초선 의원 시절 <조선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 의원 그 사람은 무슨 정치를 그렇게 하지”라고 핀잔을 줬다. 한때 노무현 후보의 언론특보를 맡기도 한 강성구 의원은 반노의 기치를 들면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신문과 싸우는 것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론은 언론의 길을, 정치는 정치의 길을 가면 그만”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고, 끝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은 것도 그가 깨뜨린 성역 중 하나다. 그는 “사진 찍으러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며 미국과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해왔다. 이로 인해 그는 한때 미국이 대선 직전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수출선을 끌어가는 등 역풍을 맞는 듯했으나 이마저도 이겨냈다. 오히려 대선에 승리하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 당선을 축하하고 취임 뒤 가급적 빠른 시일 내 미국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그가 이렇듯 당당하게 성공을 이룩한 것은 그 자신 국민의 힘을 믿고 그 동력을 분출해내는 데 자신의 정치력을 최대한 집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낡은 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정치를 주창해왔고, 이번 대선 기간 선거운동 과정에서 ‘희망돼지’로 상징되는,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자발적 동참에 따른 민주주의 리더십의 새로운 모형을 창출했다. 이제 정치는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일반인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노 당선자는 그런 변화의 중심에 항상 서 있었다.

극단적 여소야대 상황에서의 숙제

그러나 노무현의 당선은 결코 개혁의 완성이나 종착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제부터 그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 될 임무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환경이 그리 좋지 않다. 주류 기득권층은 분명히 퇴조하는 추세이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은 아직 조직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장 국회에서도 극단적인 여소야대 상황이어서 거대 야당과의 문제를 풀어야 할 숙제가 가로놓여 있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정부에서 개혁작업에 착수하는 한편으로 이를 뒷받침할 세력을 만들어가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게 됐다. 그의 곁에는 다행히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 떠날줄 모르고 있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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