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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 캐시’는 없다 ‘대통령 노무현’은 언론개혁의 칼 꺼내드나… 약발 떨어진 <조선일보>는 어디로 가나
‘노무현 시대’의 개막은 ‘조중동’, 그 가운데도 <조선일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실상 노무현의 승리는 <조선일보>의 패배기도 했다. ‘노무현 대 이회창’으로 진행된 지난 대선의 이면에선 ‘노무현 대 <조선일보>’의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회창씨는 정계를 은퇴했지만 <조선일보>는 꿈쩍하지 않는다. ‘약발’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게 입증되기는 했지만.
조선일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렇게 된 것은 <조선일보>가 나가도 너무 나간 탓이 크다. <조선일보>는 선거 막바지에 이르자 노 당선자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말 사력을 다했다. 12월18일 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발표되자 사설을 바꾸는 민첩성을 발휘하며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으라”고 선동한다. 이 순간 <조선일보>는 정 대표의 지지 철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만 하면 노 당선자가 앞서던 대선 판도가 금세 뒤집어질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12월19일 새벽,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 순간 한민족의 운명과 동북아의 안위가 걸린 한국의 대선은 새로운 진로를 선택한 것 같다”는 감상을 적었다. 이 글 직전에 올린 ‘핏발 선 보수층’이라는 자극적 제목의 글에선 이번 대선을 ‘적화(赤化)냐 체제 유지냐’를 가름하는 선거로 규정했다. 노 당선자를 적화세력으로 단정한 ‘핏발 선’ 글이었다. 대선의 진로변경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고, <조선일보>의 판단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이로써 <조선일보>의 대통령 만들기는 15대와 16대 거푸 실패로 돌아갔다. 시대는 도도하게 흘러 ‘밤의 대통령’이 낮의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일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된 것이다. “앞으로 또 5년간 벌서야 되겠군”, “당분간 고생 좀 더 합시다”, “이건 혁명이야, 혁명!” 선거결과가 나오자 이 회사 사람들이 내뱉었다는 얘기들이다. 이들은 12월18일 밤, 정몽준 대표의 노무현 지지 철회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이제 게임은 끝났다.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하게 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노 당선자는 ‘폐간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2002년 4월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견해를 밝혔다. “언론은 언론의 정도를 가고 정치인과 정부는 각각의 정도를 가야 한다. 상호간 부당한 간섭이나 공격은 없어야 한다. 특히 언론은 정치권력 창출과정에서 언론 본연의 길을 벗어난 형태의 간섭행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도 비슷한 시기 이와 똑같은 주장을 폈다. 4월1일치 ‘정치인의 몫, 신문의 몫’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준절히’ 주장한다. “정치쪽은 정당한 그들의 몫을 수행하고, 신문쪽은 정당한 우리의 몫을 수행하는 가운데 피차 건강하고도 명예로운 긴장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심판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 시점에서 국민이 어떤 심판을 내릴지 궁금하다.
전향적 언론관, 밀어부치기엔 난관 많아
네티즌의 기대대로 ‘대통령 노무현’은 언론에 개혁의 수술칼을 들이댈 수 있을까.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언론 관련 공약을 따로 내놓지 않았다. 당 관계자는 “민감한 내용을 언급해 공연히 논란만 가중할 것을 염려했다”고 말했다. 적대적 언론상황에서 섣불리 언론문제를 건드렸다가 득볼 게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단일화 직후 노 당선자의 지지율이 상승할 무렵 <조선일보>와 전면전을 벌이는 문제를 검토했다. 편파보도가 극심했다. 그러나 ‘다른 수를 다 써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이면 몰라도 우리가 상승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우세해 보류했다.” 한 참모가 전한 얘기다. 노 당선자는 지난 3월 민주당 내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매우 전향적 언론관을 밝혔다. 기자협회 설문조사에서 △세무조사 정례화 △편집권 독립 정간법 포함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 △경영지표 공개 △해직언론인 특별법 △연합뉴스사법 △방송위원 인사청문회 △지역언론특별법 △신문시장 독과점 규제 등 모든 질문항목에 찬성했다. 그러나 노 당선자가 이런 일들을 밀어붙이기엔 난관이 너무 많다. 언론 관련 참모의 얘기를 들어보자. “현재의 언론시장이 왜곡돼 있고, 이를 시정할 필요가 있으며, 법과 제도를 통해야 한다는 게 노 당선자의 기본적 생각이다. 노 당선자에겐 위스키도 없고, 캐시도 없다.” ‘위스키 & 캐시’. 현 정부의 언론창구를 맡아온 박지원 비서실장이 언론사를 방문하거나 언론 관련행사에 참여할 때면 어김없이 고급 양주를 한병씩 선물했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DJ정권은 힘이 센 정권 출범 초기 언론개혁을 외면한 채 ‘위스키 & 캐시’에 의존한 유화정책을 폈다. 집권 후반기 들어 거대언론에 휘둘리기 시작하자 세무조사의 칼을 빼들었지만 그땐 이미 힘이 빠진 뒤였다. ‘위스키 & 캐시’는 ‘당근’이다. 당근을 쓰지 않겠다면 ‘채찍’이 남는다.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세무조사나 정간법과 방송법 등 법률개혁, 공정위의 신문고시 강화 등이다. 그러나 세무조사라는 칼은 당분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소수여당의 처지에서 법률개정도 쉽지 않다. 기껏해야 공정위를 통해 신문고시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게 고작이다.
자생적 안티조선운동 탄력 붙을 듯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신문방송학)는 “노 당선자가 대통령이 된 이상 특정 언론에 대한 개인적 적의를 드러내기는 어렵고,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므로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된 이상 직접 권력을 통해 언론문제에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김 교수는 노 당선자의 승리가 지니는 의미에 주목한다. “노 당선자의 정치적 조건상 당장 제도개혁을 진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일보> 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크게 넓어졌다.” 노 당선자가 <조선일보>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이 <조선일보>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고, <조선일보>는 드러나지 않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나 네티즌의 자생적 ‘운동’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일까. <조선일보>는 12월21일치에 문제의 19일치 사설에 대한 간접적 ‘반성문’을 썼다. ‘오피니언’난에 독자의견 형태를 빌려 은근슬쩍 짚고 넘어가는 형식이었다. 이 사설에 대한 독자의견이 이틀 새에 40여편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비판적 내용이었다는 점도 소개했다. <조선일보> 인터넷 사이트에 이 사설에 대해 1천개가 넘는 댓글이 붙었고, 대부분 비판적 내용이었다는 게 진실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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