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12월12일 제438호 

표심도 “반미야 놀~자”

반미감정 확산에 후보들 행보도 갈짓자…선거 때마다 떠오르는 ‘북풍’을 잠재우다


사진/ 지난 12월7일 열린 미 대사관 앞 반미시위. 최근 반미감정 확산은 대선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김종수 기자)


일요일인 지난 12월8일 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심미선·신효순양의 집을 방문했다. 예정된 강원지역 유세가 폭설에 막히자 경기 양주군으로 방향을 틀어 유족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후보는 마을 입구에 마련된 추모비를 찾아 어린 희생자의 영정에 쌓인 눈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이 후보는 전날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두 여중생 추모 미사에 참석했다가 달걀과 귤껍질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정치인들은 떠나달라”는 집전 신부의 요구에도 꿋꿋하게 40여분 동안 대열 끝부분에 서서 미사를 마쳤다.

이 후보 방향 전환에 내부 우려도

최근 두 여중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퍼지고 있는 반미 분위기가 정치권에 가하는 ‘압력’의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예전 같으면 “정부가 급진세력의 반미운동을 방치하고 있다”(이회창, 2000년 8월 노근리·매향리 사건과 관련한 반미운동에 대해)고 말했을 이 후보가 반미 대열의 맨 앞줄에 선 모습은 이채롭다.

이런 변화는 놀랍지만, 간단하게 설명된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닥쳤고 반미감정이 유권자들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범대위)의 서명운동에 이미 130만여명이 참여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이를 “간접적인 인화물질”(수도권의 한 원외 지구당위원장)이라고 평가하더니 어느덧 “수도권 20~30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후보 핵심측근)으로 인식을 바꿨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정치세력은 없어 보인다. 다만 형세 인식과 별개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정치권은 대략 4단계의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한나라당은 앞서 보았듯 한-미 동맹을 강조하던 이전의 자세에서 벗어나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직접사과를 강력히 요구하는 ‘우→좌’의 이동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 불연속성을 ‘이회창식 사법정의’라는 논리로 설명한다. 2030위원회 본부장인 김영춘 의원은 “이 후보의 적극성은 ‘반미’라는 차원보다 두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물어야 한다는 법적 정의의 문제, 인권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적 논리야 어떻든, 점차 시위대의 구호와 비슷해지는 이 후보의 주장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는 정치세력이 스펙트럼의 가장 오른쪽에 있다. 이는 이 후보를 향해 “우파의 자존심에 먹칠을 해가면서 좌파에 추파를 던지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일생일대의 모험이며 이 모험에서 실패하면 그는 인간적으로도 치사해져버리는 것”(홈페이지에 올린 칼럼 ‘스탠스를 잃은 이회창’에서)이라고 비난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의 ‘스탠스’인 셈인데, 군소후보로 철저히 전락한 이한동 하나로국민연합 대표와 자민련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운영 자민련 대변인은 “일부 대선주자들과 몰지각한 인사들의 반미감정 부추김으로 국기마저 흔들리는 사태에 국민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 감정 이용해서는 안된다”


사진/ 'SOFA개정 국민서명운동 선포식'에 참석한 이회창 후보. 대선 정책공약을 발표하는 노무현 후보. 부시 대통령에 드리는 공식서한을 들고 있는 권영길 후보(왼쪽부터). (한겨레 이정용 기자)

한나라당의 상당부분은 사실상 이회창 후보와 자민련 사이의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후보의 행보에 은근히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안에선 여전히 “정부가 반미시위를 방조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온다. 한 관계자는 그런 추측의 근거로 “어느 순간부터 연예인들이 대거 합류하고 반미시위에 단골이던 화염병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도 이회창 후보만큼이나 뜻밖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찍기 위해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2002년 4월 서울 지구당 간담회에서)고 말한 노 후보는 지난 12월7일 대구에서 “얼마 있지 않아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대통령만큼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시위 불참의 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노 후보가 실제 서 있는 곳은 이 후보보다 훨씬 자주적 외교를 강조하는 지점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특히 당 차원에서 보면,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들이 이 후보의 파격 행보를 적극 뒷받침하지 못하는 반면 민주당 당직자들은 연일 강경발언을 내놓아 노 후보의 전략적 ‘좌→우’ 이동을 보완해주고 있다.

두 후보가 점차 가운데로 수렴되는 가운데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줄기차게 반미정국을 주도해가고 있다. 권 후보는 7일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석해 “미국이 SOFA 개정을 못하겠다고 버티는데, 이는 우리 국민의 분노를 완전히 무시한 행태다. SOFA 개정을 못하겠거든 주한미군은 당장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권자들은 결국엔 이런 전후·좌우의 상황을 모두 감안한 판단을 내릴 것 같다. 굴욕적인 한-미 관계의 본질에 바짝 다가선 유권자들이 그만한 감별안을 갖췄다는 게 채희병 범대위 사무국장의 지적이다.

채 사무국장은 “선거전에서 표를 얻기 위해 국민의 감정을 이용하려거나 그들의 요구를 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후보들은 국민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에 진심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범대위가 각 정당 후보에게 SOFA 개정에 대한 질의를 했을 때 권영길 후보를 제외하고는 답변을 거부한 일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반미감정의 확산은 그 자체로 대선의 중요한 변수가 되겠지만, ‘북풍’이라는 다른 변수 하나를 잠재우는 구실도 한다는 데 정치권은 주목한다. 대선에 미치는 영향에서는 반미감정보다 이 ‘플러스 알파’ 효과가 더 강력하다는 시각도 있다.

미 대사 만난 일이 오히려 흠

과거 각종 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간첩단 사건이나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따위에도 유권자의 불안심리가 작동해온 한반도에서 북한의 핵개발 시인이라는 핵폭탄급 북풍이 부는 데도 전혀 표심을 흔들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몰아세우는 상황에서 한-미 동맹 강조가 대북 강경책과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안보 위기감을 부추기는 선거전 행태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리라는 예상 속에서 그 위력을 점치는 이는 정치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김상우 민주당 외신대변인은 이회창 후보가 지난 7일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것을 두고 “대사관쪽은 우리도 면담을 요청하면 응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두 여중생의 죽음을 선거에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을 앞두고 미국대사를 만난 게 오히려 흠잡힐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국쪽이 한국의 반미 분위기에 대해 주한미군 철수 거론 등 강경한 대응조처를 내놓음으로써 선거 막판에 분위기의 역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가 이미 ‘반미 콤플렉스’를 떨어내고 있는 지금 그런 충격 요법은 사태만 더 악화시킬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박용현 기자/한겨레 정치부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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