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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승복, 빛나는 투혼 패자의 미덕 보여주며 퇴장한 정몽준 후보… 정치문화 혁신에 한 획 긋고 독자생존 모색
2년 전 11월8일 새벽, 미국 대선을 보도하던 주요 언론들이 플로리다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의 승리를 보도하자,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승패를 가르는 차이가 단지 1800표로 나타나자, 고어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한다. “조금 전에 내가 패배를 시인했던 것은 무효다.” 플로리다의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미국 전역을 달군 대선 2라운드는 이날부터 36일 동안 펼쳐진다.
의구심 씻어낸 깔끔한 퇴장 인상적
하지만 그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기자회견장으로 나갔다. 그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 노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라고 흔쾌히 결과에 승복했다. 다음날에는 국회 귀빈식당에서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 이후 처음으로 만나 실질적인 선거공조 협의에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정 의원은 이 자리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새로운 정치”라며 “더 큰 패러다임은 새 정치이며 정권재창출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인 만큼 노 후보가 잘해달라”고 당부했다. 애초 민주당에서는 정 의원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협상과정에서 탈당파 의원들을 만나거나, 벼랑 끝 전술로 거세게 민주당을 몰아붙일 때는 이중전략이라고 비난했다. 단일화 결과를 불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커져갔다. 그러나 그가 승복하는 순간 모든 의구심이 사라졌다. 민주당 협상팀 한 관계자는 24일 자정 직전만 해도 정 후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다가, 정 후보가 승복하는 TV 장면을 보더니 “야! 이제는 앞으로 정말로 잘 모셔야 되겠다”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돌이켜보면 정 후보로서는 숨가쁜 5개월이었다.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기적과 함께 폭발하기 시작한 지지도는 무서운 기세로 솟구쳤다. 특히 8·8 재보선이 민주당의 참패로 끝난 직후에는 이회창 후보에 대한 ‘대항마’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며, 이 후보를 제치고 상당기간 1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정치적 자산 얻어… 5년 뒤의 가능성
우선 우리나라 정치문화가 그만큼 질적 비약을 이루었다는 평가다. 적어도 ‘게임의 룰’에 불복하는 행태만큼은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이인제 의원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쇠락한 데는 ‘경선불복’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기 때문이라는 점은 다른 정치인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정 의원이 과거 양김처럼 지역과 조직적 배경을 업고 정치를 하지 않아, 몸을 움직이기가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이런 정치환경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개인적 결단력이 빛을 잃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출마한 이후 입버릇처럼 말해온 ‘정당한 승자, 훌륭한 패자’라는 약속을 스스로 지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그는 상당기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단일화가 어느 정도 파괴력을 보일지 열쇠를 정 의원이 쥐고 있다. 그가 충청과 강원도, 울산 등 노 후보의 취약지를 노 후보와 함께 휘젓고 다닐 경우, 이회창 후보의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리면서 ‘1+1=3’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노 후보가 보수층을 파고드는 데도 정 의원은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있다. 정 의원은 또 5년 뒤를 노려보기에 충분한 정치적 자산을 이번 대선과정에서 얻어냈다.
고어는 아쉬운 패배와 깨끗한 승복에 힘입어, 최근 중간선거 직후 치러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56%의 지지를 얻어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정 의원 스스로는 “대통령은 이번 한번만 출마한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단일화 결단을 내린 데는 “지더라도 깨끗한 이미지만 유지하면 차기를 기약할 수 있다”는 측근들의 조언이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체성 차이로 대선 공조 순탄할까
하지만 앞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우선 심리적 공황을 극복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정 의원이 11월25일 오후 가족들과 함께 설악산 방문길에 오른 것은 이런 심리적 치유의 한 과정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는 역시 노 후보와의 정체성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당장 고교평준화 해제문제나 법인세, 수도이전 등 TV토론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두 사람의 생각 차이는 한나라당이 공격하기에 좋은 표적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은 ‘DJP 연대’와 같은 잘못된 결합이라고 몰아붙이며 시너지 효과의 차단을 꾀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의 정책적 차이는 사실 노 후보의 정책과 정치이념 중심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노 후보의 재벌개혁 의지 등에 정 의원이 어느 정도 공조할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또 국민통합21과 민주당의 대선공조가 순탄하게 이뤄지느냐도 빠뜨릴 수 없는 변수다. 정 의원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을 경우에는 자연스러운 역할분담 속에 당 대 당 통합으로 나갈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되나, 그렇지 않을 경우는 상당기간 별도의 살림을 꾸릴 것으로 보인다. 창당작업을 주도한 박진원 대선기획단장은 “앞으로도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해 독자적인 생존전략을 내비치고 있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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