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11월07일 제433호 

노·정 단일화 ‘대선의 법칙’

‘이회창 대세론’에 맞설 유일한 승부수… 암초 걷어내고 극적인 반전 이뤄낼 건가

후보단일화 논의가 다시 꿈틀댄다. 수그러들었지 싶으면 고개를 쳐들고, 꺼졌지 싶으면 다시 활활 타오른다. 역시 이번 대선의 최대변수라는 평가를 들을 만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도대체 후보단일화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부터가 불분명하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장군멍군’을 주고받는데 애매모호한 말뿐이다.

정 의원의 일부 참모들이 10월30일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을 슬금슬금 흘리며 불씨를 살리더니, 다음날 정 의원이 단일화를 위한 경선을 받아들일 듯한 말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튿날에는 경선 가능성을 아예 닫아버린다. 노 후보는 31일에는 “논의해보겠다”더니, 다음날에는 부정적으로 돌아섰고, 11월3일에는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전격 제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먼저 말을 꺼낸 정 의원쪽이 꼬리를 빼는 듯하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것은 대선구도가 ‘1강2중’으로 재편되면서 ‘이회창 대세론’이 빠르게 굳어짐에 따라 단일화의 필요성은 그만큼 절박해진 반면, 단일화를 성사시킬 ‘길’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정 둘 다 단일화를 하되 자기 중심으로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2등을 하고 보자는 속셈이 작용했을 법하다.

정몽준의 노림수와 노무현의 엎어치기


사진/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와 JP는 야권 후보단일화에 성공해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용호 기자)


정 의원이 그동안 시큰둥해하던 후보단일화론을 새삼 꺼내든 것은 민주당 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의원들에게 탈당의 명분을 주기 위한 것으로 비친다. 국민통합21의 강신옥 창당기획단장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점을 인정한다.

먼저 정 의원으로서는 지지율이 날개 없는 추락처럼 급속하게 빠지며, 아뜩한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를 막아줄 현역의원은 하나도 없다. 더욱이 뭔가를 보여줘야 할 11월5일 창당대회는 다가온다. 잘못하면 창당대회가 지지율 상승의 기폭제가 아니라, 초라한 성적표로 작용할 수도 있다. 5년 전 이맘때 이인제 의원도 국민신당을 창당할 때는 현역의원 8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정 의원은 일단 흔드는 데까지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정 의원의 입에서 단일화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후단협 의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강성구·김명섭 의원을 필두로 민주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나름대로 셈법이 있어, 정 의원에게 쉽게 안기지는 않고 있다. 한나라당으로 가거나 독자적으로 중부권 신당을 꾸리거나 그도 아니면 민주당으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으로 탈당한 경우 등 가지각색이다. ‘탈당’은 그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한 임시 정류소인 셈이다. 정 의원은 탈당파 의원들을 자신의 그물로 끌어들이기 위해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영입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성적은 신통찮은 편이다. 이철 조직위원장이 11월3일 새벽 쓰러진 것도 이런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쪽은 처음에는 정 의원쪽 단일화 공세에 방어적 태도를 보였다. 염동연 정무특보는 “후보 등록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단일화한다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방법과 절차를 논의하다 보면 결국 이전투구로 비친다. 둘 다 죽는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후보단일화 문제가 최대현안으로 떠오른 만큼 피해갈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하자는 의견이 노 후보 진영에서 우세해지면서 3일 전격제안이 이뤄졌다. 노 후보의 한 측근은 “단일화 문제가 대선 내내 고질병으로 남을 것이 확실한 만큼, 외과수술을 통해 도려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막 지지도가 올라가는 판에 후보단일화 불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다시 추락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이며, 탈당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이탈의원들에게 최소한 명분은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물론 경선이 될 것으로는 보지 않으나, 설사 경선을 치르더라도 지금 같은 지지도 상승의 분위기에서는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는 계산서를 뽑아보았을 것이다.

끝없는 ‘샅바싸움’… 적대적 단일화


사진/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는 핫이슈로 등장하곤 했다. 87년 13대 대선에서 DJ와 YS는 국민적 압력에도 단일화에 실패했다.


두 후보 사이의 ‘샅바싸움’에서 보듯, 단일화란 논의만 무성하지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워낙 건곤일척의 큰 싸움이라 조그만 양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단일화를 주도할 만한 ‘심판관’과 ‘게임의 법칙’이 있으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준비가 부족하다. 87년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의 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적 압력이 거셌는데도 단일화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후단협 소속 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해 중립지대를 만든 뒤 협상을 주선하겠다고 말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탈당의 명분일 뿐 이들에게 실제로 단일화를 성사시킬 의지나 능력이 없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미리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김민석 전 의원이다. 김 전 의원은 민주당 탈당 다음날인 10월18일 <한겨레21>과 인터뷰에서 “이대로 가면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이 떨어져, 현재의 2강1중 구도가 1강2중 구도가 되면서 ‘이회창 대세론’이 급격히 확산된다. 2강1중이면 그래도 후보단일화 가능성이 남아 있으나 1강2중이면 단일화는 물 건너간다. 내가 정 의원에게 가는 것도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정치적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상황 판단은 정확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적대적 단일화’ 방법밖에 없다. 즉, 지지율 격차를 최대한 벌여 상대편을 거꾸러뜨리는 것이다. 국민적 선택에 의한 사실상의 단일화다.

문제는 지지율이 떨어지는 후보가 순순히 중도포기할지 여부인데, 이 점에서는 아무래도 노 후보의 ‘근성’이 더 강할 것으로 보는 관측이 우세하다. 노 후보로서는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이 뚜렷한데다 대선패배 뒤라도 자신을 뒷받침할 버팀목이 든든하다. 민주당 개혁파 의원들과 ‘개혁국민정당’이다. 게다가 국민경선으로 선출된 후보라는 보루가 사퇴압박을 막아낼 수 있다.

이에 반해 정 의원으로서는 대선 패배에서 잃을 것이 너무 많다. 이익치 현대증권 전 회장의 폭로에서 보듯 정치적 공방이 격렬해지면, 이회창 후보와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될 수 있는데, 굳이 그런 정치적 부담을 지겠느냐는 것이다.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92년 대선 패배 뒤 당한 시련까지 생각하면, 완주할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는 논리다. 한때 ‘친정몽준’ 성향을 강하게 보이던 민주당 후단협 의원들이 주저하는 가장 큰 요인이 정 의원의 완주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런 단일화는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노 후보든 정 의원이든 대선을 포기할 정도로 지지도가 떨어졌다는 것은 선거정국에 끼칠 영향력이 크게 약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또 포기에 이어질 지지선언의 방향도 현재로서는 점치기 힘들다. 노 후보의 경우 아예 지지선언 없는 조용한 포기가 될 수 있고, 정 의원의 경우는 거꾸로 이회창 후보 지지가 될 수 있다.

본선 경쟁력 놓고 엇갈린 전망


사진/ "탈당으로 단일화를 압박하라!" 민주당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의원 11명이 지난 11월4일 공동 기자회견에서 탈당을 선언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후보단일화가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현되면, 누가 이회창 후보에게 경쟁력이 있을까 정 의원은 “후보단일화를 한다고 나의 지지표가 노 후보에게는 가지 않지만, 노 후보의 지지표는 나에게 온다. 이것이 국민의 뜻”이라고 말했다. 국민통합21의 박범진 기획위원장은 “노 후보의 지지기반은 진보성향 일색이지만, 정 의원은 진보·중도·보수가 골고루 섞여 있다. 노 후보로 단일화되면 중도와 보수 성향표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도 정 의원의 말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김헌태 TNS미디어코리아 이사는 “정 의원 지지층 가운데 보수 성향표는 주로 과거에 박근혜·이인제 의원 지지자들로서 노 후보로 단일화될 경우는 이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 후보 지지자들은 반이회창 정서가 강해 정 의원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TNS미디어코리아가 지난 10월28~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정 의원으로 단일화되면 노 후보 지지자의 60%가 정 의원을 지지한 반면, 노 후보로 단일화되면 정 의원 지지자의 48.8%가 노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김헌태 이사는 “최근 정 의원의 지지도가 급격히 빠지면서 호남표는 노 후보에게로 충청표는 주로 이 후보에게 갔다. 노 후보의 경우 호남에서 10%포인트 이상 상승했지만, 지지도가 호남지역에만 편중돼 있어 전국적으로는 1~2%포인트 상승에 그쳤다”고 노 후보의 ‘한계’를 지적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도 “정 의원의 이탈표 가운데 대략 50%가량은 이 후보쪽으로 가고, 노 후보쪽으로는 20~30%만 오며, 나머지는 부동층으로 간다. 그나마 호남표의 결집도를 강화시키며 얻는 것이다. 노 후보로서는 이 후보를 공격하면 표가 정 의원에게 가고, 정 의원을 공격하면 표가 이 후보에게 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견해를 완전히 달리하는 전문가도 있다. 조용휴 폴앤폴 대표는 “겉모습만 보면 정 의원 이탈표의 상당부분이 이 후보에게 가는 것으로 비치나, 사실은 병역비리로 빠져 있는 영남지역의 유보층이 이 후보에게 가는 것이다. 정 의원 이탈표의 상당부분은 오히려 유보층으로 가고 있다. 이 후보로 바로 넘어가는 표는 매우 적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 의원이나 노 후보 지지층 모두 현실정치 타파 욕구가 높은 집단으로, 노 후보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정 의원 이탈표를 대부분 흡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월31일 실시한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서도 다르게 해석할 부분이 많다. 특히 이 조사에서는 노 후보의 부산 지지율에 상당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10월20일 조사에서는 이회창 대 노무현 양자대결이 71.3% 대 10%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10월31일 조사에서는 53.7% 대 36.6%로 크게 따라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 후보의 지지도 상승이 호남에만 한정돼 있지 않고, 노 후보로 단일화될 경우 영남표의 위력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일화되면 과연 이길 수 있나

단일화가 되더라도 이회창 후보와 맞서 이길 수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 늘 따라다닌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정 의원이든 노 후보든 양자대결에서 이 후보를 꺾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지난 11월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이 후보 대 정 의원이 43.2% 대 38.3%, 이 후보 대 노 후보가 45.1% 대 34.8%로 나왔다. 여기에 노 후보와 정 의원의 경우 젊은층의 지지가 높고, 이들의 투표율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사 단일화가 이뤄지더라도 승산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노 후보는 이미 호남에서 60% 가까운 지지를 얻고 있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고, 정 의원은 월드컵 전의 지지도인 10%대로 돌아가는 추세다. 노 후보와 정 의원이 서로 경합하면서 이 후보를 대적할 ‘대항마’ 개념을 만들지는 못하고 대세론만 퍼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해보나 마나한 경기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홍형식 소장은 “이회창 대세론이 굳어가는 만큼, 그냥 기계적인 단일화만으로는 반전이 힘든 상황이다. 경선을 통해 폭넓은 반창세력 연대를 이뤄내는 화학적 결합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김민석 전 의원은 “정 의원이나 노 후보 둘 다 이 후보에게 안 되는 것은 ‘단일화가 될까’ 하는 실망감이 퍼지면서 반창세력을 관망상태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과거 DJP 연합 때도 대선 초반 실망감으로 인해 ‘연합이 이뤄져도 안 된다’는 정서가 팽배했으며, 심지어 ‘연합이 되면 오히려 표가 떨어진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일단 성사가 되면 시너지 효과가 붙어 판이 격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쨌든 후보단일화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50%를 넘지 않는 한, 대통령 선거 전날까지도 후보단일화 논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런 논의는 대선 이후 각 정파 간 이합집산이 벌어질 때도 편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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