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곳에서는 ‘대화’도 ‘협상’도 없었다.

10월3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열렸던 북-미 사이의 첫 고위급회담. 북한의 치명적인 약점을 사전에 확보한 미국은 거침없이 북한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97∼98년 사이 북한이 플루토늄이 아닌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에 나선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 부시 행정부는 처음부터 대화에는 뜻이 없었던 셈이다. 부시는 9월 말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제임스 켈리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북한에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당시 전문가들은 남북·북-일 관계 진전 등을 감안한 부시 대통령의 용단으로 풀이했다. 물론 그렇다고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평화무드를 타고 그간 꽉 막혔던 북-미 간의 고위급 대화가 시작됐다는 사실 자체가 청신호로 비쳐졌다. 하지만 켈리 특사의 방북은 북한의 비밀 핵개발 시사 발언으로 돌연 적신호로 바뀌게 된 셈이다.

계획적으로 ‘시인’했을 가능성 없어

사진/켈리 특사팀이 계속 비밀 핵개발 계획에 대한 해명 추궁에 "그런 계획을 갖고 있다"고 폭탄 발언한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그렇다면 대체 북한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폭탄발언을 한 것일까. 최근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북한 관계자들, 미국의 켈리 특사와 국무부 한국과 직원, 남쪽 정부의 핵심 관계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북한이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핵개발 시인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실수했다.”(남쪽 정부의 고위 소식통) “갑작스런 일이라서 아직 잘 모르겠다. 시인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시인했는지는 전혀 모른다.”(유엔 북한대표부 관계자) “북한은 처음에 핵개발 프로그램을 완강하게 부인하다 다음날 ‘놀랍게도’ 그것을 시인했다.”(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

사진/ 평양에서 돌아온 뒤 지난 10월19일 주한 미대사관 공보원에서 기자회견하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이용호 기자)

북한은 지금 한창 바쁘다. 미국과 핵문제로 씨름하면서 곁눈질을 할 겨를이 없다. 남북관계를 비롯해 북-일관계 개선도 해야 하고, 신의주 특구 개방 등 이제 막 시동을 건 개혁·개방 수레바퀴를 멈출 수도 없는 중대한 시점이다. 어느 때보다 미국과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특사의 평양 방문결정을 반겼고, 뭔가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고대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와 유일하게 대화 채널구실을 해온 한성렬 유엔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뉴욕에서 켈리 특사 방북의 실무를 맡은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월3일 평양에서 열리는 북-미 고위급회담이 “양국의 적대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정황은 부시 행정부가 켈리 특사를 평양에 보내기 직전까지도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북한 당국이 미국쪽 의도를 사전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북한은 켈리 특사 파견은 대북정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사전 통보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기존 강경정책을 되풀이하겠거니 생각했던 북한 지도부로서는 허를 찔린 꼴이 됐다.

켈리 특사는 10월4일 첫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리자마자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북한의 비밀 핵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북한이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서도록 돕고 있는 남한이나 일본의 노력을 미국은 지지한다”며 북한이 미국의 우려사항 해소에 적극 나서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경제·외교적 대담한(bold) 접근법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켈리 특사는 부시 대통령이 우방인 한국과 일본 등과 협의한 끝에 만든 이 대담한 북한 정책을 쓸 수 없게 됐다고 미리 쐐기를 박았다. 이 모든 것들은 북한의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이 제거된 것을 확인한 뒤에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뜻밖의 초강경 기조발언에 접한 북한이 크게 당황한 것은 물론이다. 켈리 특사의 대화상대로 1차 회담에 나온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공작적으로 뒤집어씌우지 말라”며 핵개발 계획을 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쪽 반응을 ‘떠보려고만’ 했던 미국

이 자리에서 미국쪽이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하지는 않은 듯하다. 미 국무부는 켈리 특사팀이 돌아온 뒤 공식 성명을 내어 “북한이 제네바 협정 등과 같은 핵무기 협정을 위반하고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우라늄을 농축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미 당국이 최근 입수했다는 점을 북한쪽에 전했다”고 밝혔다. 미국쪽으로부터 평양 회담결과를 통보받은 남쪽 당국의 핵심 관계자는 “물증으로 북한을 압박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북한도 더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정보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의 정보당국이 지난 8월 여름 농축 우라늄탄 개발계획과 관련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했으나 실제로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아, 켈리 특사를 통해서는 일단 북쪽 반응을 떠보려고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본회담에서 뒤늦게 미국쪽 의도를 파악한 북한 지도부는 비상이 걸렸다. 끝까지 모른 척하느냐, 아니면 확 불어버리고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여줄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하지만 제3국도 아닌 평양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앞으로 잘해보자고 특사로 온 사람이 대뜸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을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포기하라고 요구하자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10월7일 “미국이 들고 나온 ‘우려사안’이라는 것들은 다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라며 “특사의 이번 설명을 통해 부시 행정부가 대화가 아니라 힘과 강권으로 우리를 굴복시켜보려는 강경 적대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대응수는 몹시 제한돼 있었다.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북한 권력의 속성상 묵묵히 듣고 있거나 협상과 대화를 구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결국 평소 입버릇처럼 말해온 대화에는 대화로,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한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켈리 특사의 발언은 미국이 제시한 ‘우려사안’의 해결 없이는 남북관계나 북-일관계 개선도 순탄할 수 없다는 으름장이었다. 남한·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미국의 대북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려보겠다는 계산을 한 북한 지도부로서는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발언이 가장 거슬렸던 것이다.

북한 <평양방송>은 10월7일 켈리 특사를 보낸 직후 역대 미국 정부 가운데 부시 정권의 대한반도 정책이 가장 ‘악랄하고 노골적’이라고 보도해 삭이지 못한 분을 그대로 보여줬다. 10월5일 둘쨋날 본회담에서 북한은 외무성의 실력자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상을 내보내 켈리 특사팀을 상대하도록 했다. 강 부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장 아끼는 심복 중의 심복이다. 켈리 특사도 방북길에 오르면서 내심 강 부부장이 나왔으면 바랐다.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접었다. 자신이 부시 대통령의 특사라고는 하나 차관보급인 자신을 김 위원장이 직접 상대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강 부상이 나온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은 곧 김 위원장의 뜻으로 봐도 된다는 미 행정부 내 판단 때문이었다.

참지 못한 강석주의 ‘폭탄’

이미 첫쨋날 발언을 통해 미국쪽의 확고한 입장을 간파한 강 부상은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다는 게 남쪽 관계자의 귀띔이다. 그는 이른바 ‘일괄타결안’을 먼저 내놓았다. 미국이 당장이라도 적대시 정책을 바꾸면 북한도 미국이 우려하는 핵·미사일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겠다는 부시 정권의 약속과 김정일 체제인정, 북-미 평화협정 체결. 경제제재 해제 및 지원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켈리 특사팀의 입장은 단호했다. 미국은 정보당국이 입수한 농축 우라늄탄 개발계획을 포기할 때만 북한의 변화와 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몰아붙이며 일괄타결 제의를 뿌리쳤다. 켈리 특사는 이런 북쪽 요구와 관련해 19일 서울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강석주 부상) 비슷한 얘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농축 우라늄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논의될 내용이 많기 때문에 그(일괄타결안) 같은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라고 밝혔다.

켈리 특사팀이 계속 비밀 핵개발 계획에 대한 해명을 추궁하자 강 부상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런 계획을 갖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그의 거친 발언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당신네 대통령은 우리를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했다. (…)당신네 군대는 한반도에 배치돼 있다. 물론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우리는 강력한 무기들도 더 많이 갖고 있다. ” 강 부상은 이런 프로그램들은 다 부시 정권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켈리 특사는 북한이 추진해온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은 이미 부시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서둘러 평양을 떠났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