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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9.04(수) 제42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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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학성과 피해망상증의 충돌 문명과 야만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9·11 테러’는 인류에게 무엇이었나
9·11 테러사건이 인류에게 무엇인지 묻는 것은 지나치게 거창한가? 그렇다 하더라도 9·11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질문이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테러지만 배경과 전개과정에서 특정한 사회·국가·문화·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전 지구적 사건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인류에게 이제 전달되었는가?
전쟁, 그 자기중심적 환타지
1년이 지난 지금도 9·11은 미국의 지배 엘리트와 그들의 애국적 수사에 휘둘린 미국인에게는 여전히 ‘악’의 표출로, 서구적 근대 문명에 대한 ‘야만’적 도전으로만 보인다. 그들은 여전히 테러리스트를 ‘신의 이름 아래 수많은 인명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적’으로 보며 ‘미국을 보호하고 전 세계 선량한 사람들을 명백한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들에게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침공은 ‘9·11’ 테러와 확연히 구분되는 ‘정당한 전쟁’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무장한 미국의 국가 엘리트는 결국 ‘불량국가’ 또는 ‘악의 축’에 근거지를 둔 테러리스트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은 자기 중심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미국의 군사주의적 대응에도 미국 정부와 미국인에 대한 위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1년이 지난 오늘 미국인은 여전히 테러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막기 위한 복잡하고 인권 침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조처에 둘러싸여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반미정서’에 대한 집중적 비공개회의를 해야 할 정도에 이른 것은 미국의 고립과 그것에 대한 당혹감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와 탈레반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냉전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반공·반소 세력으로 길러낸 무장세력의 일부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흥은 냉전시대에 미국이 중동과 아시아 지역에서 반소전략을 위해 진보 좌익세력을 의도적으로 없애고 친미독재세력을 후원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또한 9·11은 사실 금융자본, 정보기술(IT) 테크놀로지, 조종기술, 여권위조 등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무기로 삼은 매우 ‘서구적’인 테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9·11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정당한 복수인가? 또는 ‘반미 민족해방전선’의 반격인가? 물론 문명 대 야만의 시나리오에 대한 거부감은 제3세계, 특히 중동지역에서 강하다. 9·11은 문화적 반미주의와 정치군사적 반미주의 투쟁의 일환으로만 읽힌다. 압도적인 것은 ‘자업자득’론이다. “미국이 결국 당했다”는 느낌은 지배적이다. 그것은 미국이 지난 50여년간 제3세계 곳곳에서 저지른 군사정치적 개입의 정서적 결과다. 하지만 무고한 수천여 생명을 오로지 죽이기 위해 돌진한 테러리스트 전사를 제3세계 민족해방, 인간해방의 전위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패권국이 짓밟은 자의 자기 파괴적 저항의 왜곡된 형태, 서구문명에 대한 콤플렉스, 경쟁적 모방, 증오심의 결합에 가깝다. ‘반미’가 그들에게 보편적 정당성을 자동적으로 부여할까?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그것을 “세계의 민중에 대한 또 하나의 테러 행위”라고 규정한 것은 정당하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복수였나
그것은 과연 ‘미국’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 간주될 수 있는가? 죽은 사람들은 ‘국가’의 기관원도 아니고 여러 계급과 국적의 민간인이었다. 방글라데시인·필리핀인·한국인·독일인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청소부·식당노동자 등의 ‘민중계급’은 ‘반미투쟁’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아니 희생자가 미국인 백인 남성 자본가였다 해도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반미 민족주의나 반제국주의적 정서와 논리는 돈 많고 권력이 있는 강자, 특히 ‘미국인’에 대한 지구적·사회적 약자의 ‘반격’테러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각의 생명윤리를 마비시킨다. 희생자가 다양한 국적·인종·계급을 넘어 그저 하나의 소중한 목숨이라는 생각, 구체적 ‘인간’이라는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 특히 모든 도덕적 책임의 경계를 국민국가 소속별로 구분해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국민 대 국민 간의 갈등과 적대를 부추기고 정당화한다. 그 논리는 결국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또는 당한 자가 복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을 키워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군사주의적 애국주의 수사를 통해 결국 국민 밖에 있는 ‘타자’에 대한 보복적 폭력을 유발하고 정당화하는 자발적 공감대가 강화된다. 자, 여기서 이상한 모순이 발견된다. ‘미국’이 ‘당했다’든가 또는 ‘미국인’의 죽음에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정서는 사실 국민국가별로 인간을 나누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논리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같은 국가 테러리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도 동원된다. 그 결과 지구 어느 쪽에서건 문화와 국가를 가로질러 구체적인 개인과 생명을 존중하는 보편적인 마음은 변방으로 추방된다. 물론 이런 현상은, 미국인 생명 상실에 그렇게 분노하고 애도하면서도 아프간에서 살해된 수많은 민간인에 대해 별다른 휴머니즘을 보이지 않은 제1세계 중심 ‘관심의 정치학’에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생명의 죽음을 특정한 이념틀로 찍어 쉽게 읽고 정의해내려는 욕망의 뿌리는 어디인가? 혹시 아랍문학 연구자 오카 마리가 얘기한 것처럼, 친미든 반미든 모두 ‘정찰 위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닐까? “아아,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외치는 자의 시각으로, 폭격을 당해 전율하는 나무들의 절규를 듣는 자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될까?”
인류가 아직도 배우지 못한 것
9·11 테러는 이익과 권력의 독점을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제국 중심부의 가학성과 그 대항과정에서 제국에 의해 정신적으로 유린당한 주변부의 피해망상증이 충돌한 결과다. 수천여명의 9·11 희생자와 그 수를 알 수 없는 아프간 사람들의 죽음에서도 여전히 인류가 배우지 못한 것은 구체적인 개개 생명의 절대적인 존엄성과 그것을 보장해내기 위한 평화의 중요성이다. 테러리즘의 근원이, 증오의 기원이 단순히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광신’이나 미국 ‘제국주의’의 최첨단 미사일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9·11 테러의 진실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은 쉬운 반미주의 감정, 선악의 이분법, 그리고 양비론 모두를 넘어서는 매우 복잡하고 끈질긴 사유와 실천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인류는 평화주의적 수사를 반복하거나 반대로 ‘냉혹한 국제현실’이라는 명분 아래 군비 증강과 테러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권혁범/ 대전대 정외과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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