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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등록 2002.08.21(수) 제423호

[표지이야기] “세상을 다 갖고 싶다”

최고권력을 꿈꾸는 재벌2세… 정몽준의 대선출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기업도 하고 정치도 하는데 이제 한 가지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8월16일, 지리산 화엄사 주지인 명섭(明燮) 스님은 함께 차를 마시던 정몽준 의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는 회사 일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정 의원이 답했다. 어차피 불가의 법도를 따르는 스님이 속세에 깊숙이 관여할 수는 없는 일.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넘겼다.



민감하게 움직이는 한나라당

하지만 속세에서 몸 부대끼며 살아갈 시민들은 그리 간단히 넘길 주제가 아니다. 정몽준 의원은 이른바 ‘갑부’다. 그저 돈 많은 부자가 아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여섯째 아들, 한국의 대표적 재벌인 현대 일가의 구성원으로 승승장구했다. 1982년 31살 나이에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해 87년 회장에 올랐다. 88년 13대 국회의원(무소속·울산 동구)에 당선된 뒤에도 91년까지 직접 경영 일선에서 뛰었다. 정 의원은 최근 “국민과 즐겁게 대화하는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재벌 일족이나 기업인이 아닌 정치인 정몽준을 새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거대 기업 현대중공업의 실제 주인이다. 전체 주식의 11%인 836만주를 소유한 최대주주로, 고문직도 유지하고 있다. 8월16일 현재 보유주식 주가총액만 1797억원에 이른다. 10대 그룹 회장단 가운데 삼성 이건희, 현대자동차 정몽구, LG 구본무, SK 최태원, 롯데 신격호 회장에 이어 6위의 재산가다.

그런 그가 올 12월 대통령 선거 판도를 좌우할 유력 후보로 급속히 떠올랐다. ‘반이회창, 비노무현’ 신당을 도모해온 이인제 의원, 김종필 자민련 총재, 김윤환 민국당 대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가 모두 그의 결단을 손꼽아 기다린다. 정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옹립해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는 것이다. 정 의원도 8월18일 “정치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많이 만나고 싶다. 신당이 모습을 드러내면 능동적으로 참여하겠다”며 신당 창당과 대선 출마를 사실상 공식화했다.

엄청난 부를 거머쥔 재벌 2세, 거대 기업의 최대주주가 최고권력을 넘보는 상황. 그 현실 앞에서 명섭 스님과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당장 정 의원과 최고권력을 다퉈야 할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쪽이 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는 18일 “근대사에서 부와 권력을 동시에 추구해서 성공한 사람이 없다. 현대에 얼마나 많은 공적자금이 들어갔느냐. 그 빚을 갚는 것이 우선이지 대통령에 나와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정 의원의 ‘태생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한나라당은 내친김에 ‘정몽준 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까지 발표했다.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출마하려는지 △돈과 권력을 함께 갖는 게 바람직한지 등 모두 6개항의 질문을 던지고 성실한 답변을 요구했다. 정치권의 비판은 분명 경쟁자에 대한 견제가 목적이다. 한나라당 대선기획단은 이미 정 의원을 정주영 회장의 후광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재벌가의 황태자로 몰아간다는 기본전략까지 세워놓았다. ‘돈과 권력을 함께 줄 수는 없다’는 국민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겠다는 것이다.

“부자가 정권까지 잡는 것, 과연 넘지 못할 금기인가”,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 우리 사회에는 어떤 화학작용이 발생할까”…. 아직 명확한 해답이나 사회적 합의는 없다. 다만 우려의 목소리가 좀더 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모두 아직 충분한 정당성을 얻지 못한 상태다. 이런 권력들은 좀더 많은 사람에게 분산되고, 상호 견제와 감시도 더욱 강화돼야 한다.” 김상조 교수(한성대 경제학과·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는 “재벌 2세, 거대 기업의 대주주인 정 의원이 최고권력을 넘보는 상황이 솔직히 우려스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현대중공업이 연간 1조원 정도 당기순이익을 발생시키면서도 과거 현대 계열 그룹에 대한 지원 부담 때문에 실제 경영수지는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연결고리를 끊고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 정 의원 개인과 국익에 더 이익이 될 것 같다”는 조언까지 덧붙였다.

박진도 교수(충남대 경제학과)는 경제영역에서 경쟁의 규칙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대선 출마는 자유다. 하지만 지금까지 재벌은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극심하게 영향받았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만약 현대가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경제계, 특히 재벌 내부에 심각한 충격과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제 재계는 정몽준 의원을 ‘특정 재벌가 후보’로 받아들이며 잔뜩 경계하는 눈치다. 한 재벌 그룹 임원은 “아직 우리나라는 권력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기업의 명운이 좌우된다. 그런데 특정 기업 주인이 최고권력자가 된다면 과연 기업 간의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한 재벌그룹 관계자도 “피는 물보다 진한 것 아니냐. 그가 형제들의 그룹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론도 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정권의 압력이나 정경유착은 보통 시장과 기업의 힘이 정부보다 약할 때 발생한다”며 “정부가 아직 힘을 갖고 있지만 과거처럼 부당한 압력이 작동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고 진단했다. △외환위기 이후 시장 개방에 따라 해외투자자와 국내투자자의 시장 감시기능 강화 △상당수 은행과 기업들이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등을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했다. 좌 원장은 “이제 경제권력을 쥔 대기업이나 정치권력을 쥔 정부 모두 독자적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대기업 출신이 최고권력을 잡는 것만으로 이런 근본적 흐름은 바뀌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정 의원의 출마를 부정적 시각으로 미리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부유한 정치인의 진보성?

노동계는 불안하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물론 재벌개혁을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까지 재벌의 힘 앞에 좌절하고 있다. 추진하던 재벌개혁 정책조차 거둬들일 정도다. 그런데 재벌 2세, 그것도 거대 기업의 최대주주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 명확하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국장은 단정적이었다. 재계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더 커지는 상황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실제 전국경제인연연합회 등 경제 5단체가 지난 3월 “대선후보들의 공약 평가”를 공언한 뒤 대다수 정치인들은 재벌개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은 대부분 현 정부가 추진해온 대표적인 재벌규제 정책을 수정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기업활동의 자유을 막는다는 이유로 △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제 △기업집단지정제 △내부거래와 상호지급보증 규제 등을 단계적으로 완화 또는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 특위위원장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은 이미 충분히 열악해졌고, 재계의 이익은 극대화됐다. 강자의 논리가 지금보다 더 강화돼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정 의원이 대통령이 되면 노동자의 생존 조건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노동계의 불안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민병균 자유기업원장은 정반대 논리를 전개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정 의원이 재벌 2세라는 부담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반재벌적이고 동정적인 노동정책을 펼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정 의원이 표를 의식해 재계쪽 요구에 냉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 원장은 오히려 “정 의원 출마가 경제·정치 등 사회 전 영역에 국제 기준에 부합한 규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논쟁이 가능하다”며 자신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정 의원이 사회 발전 방향에 일정 정도 공헌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출한 것이다.

정 의원도 재벌 2세라는 태생적 한계와 그에 따른 논란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그는 최근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유한 정치인의 진보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때마다 시저와 케네디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로마시대 귀족의 아들인 줄리어스 시저는 민중파에 속해 정치를 했고, 미국의 유명 재벌집안 아들인 케네디도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 좋은 정치를 하려면 어느 정도 재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핵심적인 방어논리다. 정 의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정치 부패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권력이 부패 유혹에서 자유로우려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소한 부당한 정치자금, 더러운 돈의 유혹에서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정 의원이 그 말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그의 이런 주장에 의구심을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영태 교수(인하대 정외과)는 “돈이 있는 사람이 덜 부패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단순 경제논리며, 부자의 진보성도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진실을 입증하고, 과거 행적을 통해 미래를 검증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히려 정 의원 자신이 막대한 재력을 약자를 위해 어떻게 써왔는지, 현대중공업 노사관계에는 어떤 규범을 적용시켰는지, 집단소송제, 대기업 상호출자제한, 주5일근무제 등 재벌의 이해가 달린 핵심 현안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시민단체들 구체적 후보검증 공언

시민단체도 정 교수의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이들은 정 의원이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하면 구체적인 검증에 나서겠다고 공언한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정 의원의 대선출마는 개인의 고유한 선택권인 만큼 결코 시비걸 생각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현대 및 다른 재벌과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지 △재벌편향으로 기울지 않고 정책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그동안 축적한 막대한 부가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것인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재벌 및 기업의 투명성 강화조치를 시행할 의지가 있는지…. 시민단체가 준비하는 검증 과제는 무궁무진하다. 신종언 서울 YMCA 시민개발부장도 “부자가 권력을 가져선 안 된다는 법도 없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덜 부패하고 능력 있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정 의원이 재벌 등 경제권력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객관적으로 최고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은 시민단체의 신성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정 의원 출마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민병균 자유기업원장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민 원장은 특히 “정 의원이 경제권력을 쥔 채로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면 국민은 물론 경쟁사한테도 의심을 받을 것이다. 현대중공업 주식지분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매각해 현금화하든지, 형제들에게 나눠주든지 어떻게든 털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권력에 도전하려면 최소한 기업경영에서 완벽하게 손을 떼라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현대 일가에 대한 주식이동조사와 최고권력자들의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92년에는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최고권력에 도전했다. 하지만 금권정치 논란에 휩싸여 좌절을 맛봐야 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의 아들인 정몽준 의원은 꼭 10년 만에 아버지가 맞닥뜨린 그 검증대 앞에 다시 섰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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