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이해 노골적 반영하는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서민의 삶에 큰 위협
사진/ 재집권에 성공한 벨를루스코니 총리. 그는 이탈리아 TV 방송사의 90%를 장악한 언론계 황제이기도 하다. (GAMMA)
‘언론계 황제’, ‘이탈리아 신흥자본의 대표’, ‘마피아와 정치의 결탁’, ‘유럽 최초의 미국식 정치인’….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언론재벌로 미디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정치 무대에 진출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제도 허점 노려 사설방송 설립
1994년에 이어 지난해 5월 두 번째로 총리에 오른 베를루스코니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37년 은행원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유람선 가수로 활동했다. 60년대 초 밀라노 외곽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70년대 ‘텔레비전 붐’을 거치면서 거부로 급성장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공영방송인 < RAI >(라이)의 3개사 외에 사설방송은 없었다. 이들 3개 방송사는 기독민주당과 사회당,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분점됐고, 사설방송을 규제할 제도는 없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선정적 사설방송들을 속속 설립했다.
언론계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 TV 방송사의 90%를 장악한 언론계 황제가 됐다. 3대 민영방송인 < Canale 5 > < Italia Uno > < Rete Quattro >뿐 아니라, 인터넷 미디어 그룹 ‘뉴미디어’ 잡지 <파노라마>, 영화제작·배급사인 ‘메두사’까지 소유하고 있다. 전국 최대의 슈퍼마켓 체인과 프로축구단 ‘AC밀란’도 그의 재산목록에 올라 있다. 2000년 <포보스>가 집계한 개인 자산은 120억달러(약 16조원). 세계 14위의 대재벌이다.
그러나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돈세탁과 탈세, 매수 등 각종 부정혐의로 법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특히 98년에는 밀라노 법원으로부터 2년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뇌물수수, 불법 정치자금 운영, 탈세, 마피아 지원 혐의였다.
서유럽 최대의 좌파세력이 존재하는 이탈리아에서 부정부패로 얼룩진 거대재벌의 대표자가 두 차례나 총리에 당선되는 것은 분명 정치적 아이러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계진출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뒷배를 봐주던 사회당 거물 정치인 베티노 크락시의 몰락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1980년대 초·중반 총리를 지낸 크락시는 정치적 지각변동이 시작된 90년대 초반 대표적인 부정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찍혔다. 개혁정치 등장을 예고하는 정치적 대변동 앞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직접 최고권력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때 40%의 득표율을 기록하던 기민당이 해체된 뒤 발생한 힘의 공백 상태를 적절히 활용했다. 94년 총선 3개월 전 중도우파 성향의 ‘자유동맹’을 창설해 갈 곳 잃은 기민당 지지자들을 대거 흡수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경제적 능력도 대국민 설득의 중요한 명분이었다. 그는 일자리 창출을 통한 실업난 해결, 전 국민 일괄 세금감면 등을 공약했다. 자신이 소유한 방송에 직접 출연해 형성한 개인적 인기도 그의 집권전략에 상당히 일조했다.
이탈리아, 매각 위험에 처하다
사진/ 이탈리아 시민들은 지난 4월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법개정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GAMMA)
베를루스코니의 또 다른 성공요인은 재계의 세력판도였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중북부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신흥자본과 중소 산업자본은 전통적 공업 대자본과 갈등하고 있었다. 전통적 공업 대자본은 중앙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반면, 중소 산업자본은 조세 문제 등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대립해왔다. 3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신흥자본도 전통적 공업 대자본과 심각한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첫 집권은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중북부 이탈리아의 중소 산업자본에 기반한 북부동맹당이 연정에서 탈퇴하고, 부패추문 등이 겹친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지난해 5월 ‘전진이탈리아당’ 당수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선거 때 △일자리 150만개 창출 △세금감면 △연금인상 △공공근로 확대 △범죄율 감소 등 5대 공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집권 뒤 언론재벌로서 개인의 경제적·사법적 이해관계를 개선하는 조처들을 취해왔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가속화 등 자본 일반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고, 사법부에 대한 국가통제 강화, 준대통령제로의 전환 등이 그것이다. 또 공직자이므로 기업경영에서 손을 떼라는 야당과 국민의 요구도 공공연히 무시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2월에는 국영 < RAI >의 이사 5명 가운데 3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해 공영방송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그가 추진해온 극심한 권언유착 행위는 최근 이탈리아 내부에 언론개혁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또 베를루스코니의 경제사회 정책이 연금축소나 해고요건 완화, 기업체 해외매각 추진 등 지속적인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정책으로 표출되면서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이탈리아 노동자 300만명은 이탈리아 정부의 해고요건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법개정 추진에 항의해 콜로세움 주변을 에워쌌다. 이탈리아에서 20년 만에 총파업이 재개된 것이다. 최근 잇따른 해외매각 추진 정책은 ‘매각 위험에 처한 이탈리아’를 경고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를 불러오고 있다.
최소한의 국가 순기능조차 빼앗을 염려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자신이 몸담은 언론재벌의 이해와 대기업 자본 일반의 이해관계를 직접 반영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그의 정치적 행동 범주는 연립정부 구성 세력에서 정확히 볼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신흥재벌, 북부동맹당의 중북부 중소자본, 민족연맹의 남부 신파시스트, 그리고 옛 기민당의 우익 영역이다. 이들은 좌파, 중도적 비판세력, 노동자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2차 연정도 동맹 내부 자본 간의 갈등 정도와 노동자들의 대정부 투쟁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베를루스코니 효과’란 현대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을 염두에 둔, 언론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치에서 ‘베를루스코니 효과’는 단지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이탈리아 최대의 재벌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데 따른 파급효과는 이탈리아 서민의 삶 전체에 더욱 큰 위협요인으로 다가온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질서 속에서 재벌이 직접 정치무대에 나서지 않더라도 국가는 총자본의 일반적 이익을 보장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국가기구는 개별자본의 분파적 이익이나 총자본의 일시적 이익과 일정하게 갈등하면서 상대적 자율성도 일정 정도 갖고 있다. 민중들의 영향력에 국가기구는 이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이 직접 정치권력을 장악할 경우 국가는 이런 도구적 측면을 이용할 가능성까지도 빼앗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정병기/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상근연구원(베를린대학 정치학박사·이탈리아 정치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