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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도 없고 실패는 없었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로서의 정몽준 고문… 노사관계는 가장 큰 아킬레스건
핵심 계열사 물려받은 세 아들 중 하나
정주영 명예회장은 슬하에 8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 몽필씨와 4남 몽우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2남인 몽구(38년생)씨는 현대자동차 그룹으로 분가했고, 3남 몽근씨는 현대백화점을 맡았다. 5남 몽헌씨는 현대전자 등 옛 현대그룹을 승계했으나 거의 몰락해 현대상선과 현대아산을 중심으로 한 소그룹으로 전락해 있다. 7남 몽윤씨는 현대화재해상보험(고문), 8남 몽일씨는 현대기업금융(회장)을 맡고 있다. 몽준 의원은 6남(51년생)으로 현대중공업을 맡았다. 그룹을 승계한 몽헌 회장과, 자동차그룹을 승계한 몽구 회장과 함께 그는 핵심 계열사를 물려받은 3명의 아들 중 하나다. 그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것은 지난 78년, 그의 나이 27살 때였다. 그는 종합기획실에서 주로 일하며 ‘경영수업’을 쌓았다. 현대중공업의 한 임원은 “(정 의원은) 결재라인을 축소하고, 대리 과장 등 하급직원들에게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등 자잘한 경영개선을 주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회사에 큰 일이 없었고, 명예회장이 직접 중요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철학을 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경영수업 4년 만인 82년 불과 31살의 나이로 현대중공업 사장 자리에 오른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은 “당시에는 중공업이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였다”며 “정 의원이 사장에 오르자 그를 그룹 후계자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주영 명예회장은 지난 91년 <신용은 현금처럼 분배할 수 없다>는 책에서 “성격이 찬찬한 애는 전자를 시키고 대범하게 해보고 싶어하는 애는 중공업을 시키고, 성격대로 맡기는 거지”라고 밝힌 적이 있다. 현대중공업은 정 의원이 정주영 명예회장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보유해 오래전부터 그의 몫으로 여겨져왔고, 실제 그렇게 됐다. 그가 사장에 임명될 무렵 현대중공업의 경영은 이미 상당한 궤도에 오른 상황이었다. 현대중공업은 74년 첫 선박을 건조했고, 팔지 못한 유조선들을 가지고 76년 현대상선을 설립했다. 그러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모든 정유회사는 한국 선박으로 정유를 수송해야 한다는 법규를 만들어 현대를 지원했다. 또 80년대 초에는 현대가 건조하는 선박의 25%가량을 정부가 사들였다. 이는 정몽준 의원이 “일본은 정부가 선박의 50∼60%를 우선 구매한다”며 정부 구매를 요청한 데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전두환씨 만류로 84년 총선출마 포기
하지만 그가 기업인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전 아주 젊은 나이에 정치쪽에 눈을 돌렸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는 33살 때인 지난 84년 12대 총선에 출마하려다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만류로 출마하지 못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4년 뒤인 88년 1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기업인보다는 정치인과 체육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91년 현대중공업 고문으로 물러나 아버지 정주영씨가 창당한 국민당에 정책위의장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대선 당시 현대중공업은 비자금을 조성해 국민당을 지원했다가 간부들이 대거 처벌을 받았지만, 그는 책임을 면했다. 92년 대선 직전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집’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는 모임을 연 것을 현대중공업 직원이 도청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 의원은 도청한 사람에게 테이프를 건네받고 도피자금을 지원한 혐의(범인 도피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선고유예를 받았다. 기업인으로서 그의 행적 중 노사관계는 그의 아킬레스건이다. 현대중공업은 87년 이후 격렬한 노사 대립의 최일선이었다. 그는 당시 현대중공업 회장이었지만, 노사 협상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89년 1월8일 현대그룹 계열 노동자 연쇄테러사건에 그가 연루됐다는 의혹은 지금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1·8 테러사건은 회사쪽의 사주를 받은 현대중공업 직원들과 회사에 고용된 용역깡패 수십여명이 현대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와 현대중전기(현대중공업에 흡수됨) 노조 사무실을 습격해 노조원들을 각목, 야구 방망이 등으로 집단 폭행한 사건이다. 당시 테러 가담자들은 현대중공업 직원들이었고, 안기부 및 경찰의 개입 흔적이 있었으며, 평소 서울에 머물던 정 의원이 테러사건 사흘 전 울산에 내려와 3박4일간 머물렀던 것으로 밝혀져 테러사건에 그룹 회장인 정 의원도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경찰은 당시 현대엔진 전무 한유동씨를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붙잡아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당시 테러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현대중공업 노동자 2명은 92년 3월 기자회견을 열어 “테러사건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 등 그룹 회장단의 재가를 받아 실행에 옮겼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대엔진 한유동 전무가 그룹 회장단의 사건 개입 사실을 시인하는 발언을 한 육성 녹음테이프를 증거물로 제시하기도 했다.
‘재산분배’ 둘러싼 형제들과의 분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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