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정용 기자·한겨레 강창광 기자),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양(量)의 질(質)로의 전화: 양적 변화는 어느 한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질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어느 한도에 도달하면 질적 변화가 생긴다.…점차적인 양적 변화에 의해 준비되고 있지만,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때는 점차성이 중단되고 이전과 다른 비약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철학사전> 이삭 펴냄) 독일 철학자 헤겔이 세상만사를 관통하는 진리로 정립한 ‘양질 전화의 법칙’이 우리 정치권에서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병역비리 담당검사 경질설

한나라당은 8·8 재보선을 통해 5개 의석을 더 추가했다. 5석은 정치적 입지를 질적으로 비약시켰다. 헌정사상 처음 자력으로 원내 단독과반(137석)을 차지한 야당이 됐다. 단일 야당이 입법권을 장악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회법 제109조는 “헌법 또는 이 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되어 있다. 한나라당은 헌법이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사안으로 규정한 △대통령 탄핵소추 △헌법 개정 △국회의원 제명을 제외한 모든 현안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사진/ 8·8재보선 당선자들이 인사하자 웃고 있는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 지도부. 한나라당은 재보선 승리로 의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정용 기자)

막강파워 한나라당. 그 힘의 원천은 각종 법률안·동의안·결의안 단독처리 권한이다. 더 이상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때처럼 자민련이나 무소속을 끌어들이고, 당내 반란세력의 이탈을 막기 위해 속을 태울 까닭이 없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 한나라당이 결심만 하면 입법권을 활용해 ‘이회창 집권시대’의 청사진을 미리 보여주고, 지지세력을 규합·재편할 수 있다. 여의도 정가에는 한나라당이 찬성 당론은 정했지만 민주당 반대로 가로막혔던 ‘법인세 인하’, ‘김대중 정권의 권력형 비리 특검제’, 대북지원 사업에 대한 검증 강화 조처 등을 곧 구체화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돈다. 의회권력을 활용해 국가의 주요 정책을 한나라당 색깔로 바꾸는 작업에 나선다는 것이다.

올 12월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검찰·경찰 등 각종 권력기관도 통제권 안에 들어왔다. 한나라당은 맘만 먹으면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과 탄핵소추안을 의결할 수 있다.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권도 발동할 수 있다. 이미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에 대한 전방위 압박이 시작됐다. 한나라당은 8월10일 대검찰청에 공정수사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11일에는 “김대업의 범죄를 면책키로 한 천용택 전 국방부 장관과 김태정 전 검찰총장, 김대업씨, 수사 담당자인 박영관 부장검사를 즉각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발언 수위를 높였다. 한나라당은 적어도 수사 담당자인 박영관 검사(서울지검 특수1부장)는 경질하겠다고 벼른다. 검찰이 최소한 개선 조치도 거부하면 법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고, 병풍 공작에 대한 국정조사권도 발동할 계획이다. 한나라당의 공세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검찰 주변에서는 벌써 박 검사 교체설이 흘러나온다. 민주당이 오히려 검찰수사권 보장을 요구하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의 권한은 올 10월 정기국회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국정감사와 내년도 예산안 심의·의결권을 사실상 장악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풍비박산 일보 직전에 내몰렸고, 청와대가 레임덕에 허덕이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나라당의 정치적 위상은 사실상 집권당이나 다름없다. 정치권에 더 이상 야당은 없다. ‘집권야당 한나라당’이 있을 뿐이다. 이회창 후보 핵심 참모들도 “우리가 야당인지 여당인지 정말 헷갈린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신당 창당도 강공 부추겨

집권야당 한나라당의 권능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막강권력을 행사하는 한나라당 내부의 질적 비약은 아직 엿보이지 않는다. 재보선 이후 국정에 대한 책임분담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이른바 ‘이회창 5대의혹 공세’에 마음을 졸인 한나라당 분위기는 오히려 DJ정권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주자는 쪽에 가깝다. 핵심 당직자들은 올 12월 대선 지형을 유리하게 재편하기 위해 단독과반의 권능을 적극 활용할 태세다. 이회창 후보의 비서실장인 권철현 의원은 “사실 지금까지 여론을 의식해 확실한 것 없는 흐릿한 행동을 많이 보였다. 더 이상 눈치보며 끌려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이겠다”고 밝혔다. 이회창 후보를 비롯한 핵심 지도부가 직접 강경론을 주도하는 듯한 분위기다. 이회창 후보는 8월9일 “이제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선거에서 민심은 부패·비리·무능 정권에 더 이상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사악한 흑색선전과 중상모략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보여줬다”는 게 그 이유다. 무능하고 사악한 DJ정권은 퇴출대상이지 협력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청원 대표도 “국민의 뜻은 공적자금 국정조사를 비롯해 각종 비리에 대한 국정조사와 특검제 등을 단호하게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상배 정책위의장과 이규택 원내총무는 공적자금 국정조사 단독추진 의지를 밝히는 등 강공책을 구체화했다. ‘김대업 정치공작진상조사단’ 단장인 이재오 의원도 11일 “김정길 법무부 장관이 김대업 수사를 조작·은폐하는 의혹이 있다”며 김 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 한나라당은 막강한 의회권력을 바탕으로 공세에 나섰다. 2000년 9월 부산에서 열린 김대중 정권 국정파탄 규탄대회(왼쪽)와 국회 한나라당 의원들. (이용호·이정용 기자)

10·25 재보선과 6·13 지방선거 압승 이후 “겸손”, “몸낮추기”, “국정에 대한 공동책임론”을 강조한 것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후보의 한 측근 인사는 “이제 민주당은 완전히 야당이 됐다. 국정은 신경쓰지 않고, 오직 대선 때까지 이 후보를 공격하는 데만 몰두할 것임에 틀림없다. 한가롭게 겸양지덕을 주장할 정치지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향후 정치지형과 연말 대선 정국에 대한 전략적 분석을 토대로 강공을 펼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나라당 안에는 청와대와 민주당이 제2, 제3의 병풍은 물론 세풍·신북풍 등 온갖 공격거리를 총동원할 것이라는 불안감과 함께 미리 상대 공격로를 봉쇄해야 한다는 강경 기류가 흐르고 있다. ‘검찰권 침해’라는 여론 비판을 무릅쓰고, 검찰·경찰 등 사정기관을 잡도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신당창당 논란 등 정치적 유동성 확대도 강공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김영일 사무총장과 이상배 정책위의장, 정형근 의원 등은 최근 일제히 신당론 배후로 DJ를 지목하고 나섰다. “DJ는 신장개업 전문가고, 민주당은 간판제작소다. 신당은 부패와 무능, 조작 전문정당이 될 것이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후보쪽 한 정무 참모는 “최근 동교동계의 재결집 움직임과 ‘정몽준 띄우기’ 배후에는 DJ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검증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올 11월 말쯤 정몽준을 신당 대선후보로 옹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DJ와 민주당 동교동계가 연대해 정몽준을 옹립할 경우에 대비해 강공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몽준 의원을 ‘DJ신당의 데릴사위’로 몰아세워 반DJ정서에 불을 지피고, 정 의원 개인의 약점을 공략해 침몰시키는 대선용 포석인 셈이다.

창,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물론 이런 강공책이 이 후보의 대선행보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다. 한나라당은 병풍공작 분쇄와 권력형 비리척결을 명분으로 특검제를 도입하고 국정조사권을 발동할 수 있다. 그만한 힘을 갖췄다. 상당기간 정국 주도권을 틀어쥘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도 다수당의 횡포에 맞선다는 대의명분을 내걸 것이다. 특히 이회창 후보의 국가경영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회의론을 확산시키며 역전 기회를 엿볼 것이다. 한나라당이 ‘반DJ정서’의 단맛에 빠져 DJ를 계속 물고늘어질 경우에도 적잖은 후유증이 예상된다. 의회와 청와대라는 두개의 정당한 권력이 잦은 충돌을 일으키면 임기말 국정공백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큰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의회권력을 장악한 한나라당도 국정 실패 책임공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막강한 의회권력을 대선전략에 무리하게 활용하면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론이 급속히 확산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확보한 원내 과반은 김대중 정권에 등돌린 민심이 반영된 반사이익일 뿐이다. 낮은 투표율에서 확인됐듯 유권자들은 결코 한나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의지를 표출하지 않았다. 의회권력 장악에 따른 책임을 깊이 사고하지 않고 수적 우위를 즐긴다면 곧 역풍이 닥칠 것이다.”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정치학 박사)은 한나라당의 강경 분위기에 이렇게 충고했다. 입법권은 대선이나 대여 압박용 무기가 아닌, 정치권의 자기 혁신과 민생·개혁법안을 처리하는 유용한 도구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정권 재탈환을 위한 대장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한나라당 몇몇 실무 당직자들은 “지방권력과 의회권력을 장악했으니 이제 행정부만 장악하면 된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대선 승리를 자신하는 것이다. 지방권력에 이어 의회권력마저 장악한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는 과연 국가 경영자로 질적 비약할 수 있을까. 국민은 대통령을 꿈꾸는 이회창 후보에게 다른 모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회창 후보가 꿈꾸는 정권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이 후보는 국회 안에서 자신의 능력과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