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8월09일 제421호 

오키나와와 함께 싸우자

클린턴 사과 받아냈던 한많은 주일미군의 섬… 한·미 소파 개정은 일·미 소파와 직결


사진/ 오키나와=도유사ㅣ재일동포(한국·오키나와 민중연대 회원).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켜야만 ‘국가안보’를 지탱할 수 있다면 그 국가안보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국민이 국가안보를 위해 실시되는 훈련 때문에 무참히 생명을 빼앗긴다면, 그것을 우연한 ‘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성 그 자체에 잠재하는 ‘살인사건’으로 취급해야 하는가.

‘아시아 미군 10만명 체제’의 주축

두 여중생이 세상을 떠난 6월13일로부터 꼭 한달이 흐른 지난 7월13일 저녁, 나는 해외에 사는 한 한국인으로서 조국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두 여중생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의 56번 지방도로에 가보았다. 현장을 살펴본 사람으로서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미군 발표대로 시속 8∼16km로 궤도차량이 달리고 있었다면 두 여중생이 50t의 무게에 짓눌려 압사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범인’인 미군에 조금도 과실이 없다면 두 여중생의 죽음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단순한 ‘과실치사’였다면 도로의 너비보다 폭이 넓은 궤도차량이 빈번히 주민의 생활도로를 마음대로 달리는 행위, 다시 말해 ‘과실’이 쉽게 일어날 수 있고, 그래서 주민의 생명을 가볍게 앗아갈 수도 있는 행위를 국가안보를 위한 훈련으로 그대로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사진/ 성폭행 미군 처벌 등을 요구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시위. 오키나와의 반미 투쟁은 주민들의 연대가 미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SYGMA/ AP연합)


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반드시 따라붙는 주둔군지위협정(소파)에는 이런 의문과 관련된 모든 모순이 집약돼 있다. 두 여중생의 유족을 비롯해 의정부 지역 주민이나 국민이 갖는 깊은 슬픔과 분노는 결코 한국에 사는 사람만이 갖는 감정은 아니다. 미군이 주둔해 있고, 소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풀리지 않은 한이 수없이 존재한다.

제주도에 주둔미군의 75%가 모여 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오키나와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일본 인구의 1%에 불과한, 그리고 일본 국토면적의 겨우 0.6%를 차지하는 오키나와에는 주일미군의 75%가 모여 있다. 오키나와 본토 면적의 약 20%가 미군기지에 점유돼 있다. 미국 본토 외에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해병대 원정군 사령부가 중심인 이곳은 육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주한미군과 연결돼 ‘아시아 미군 10만명 체제’의 주축이 되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주일 미군기지가 밀집하고 있을까? 누구나 의문으로 생각하는 일이지만 답은 단순하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일본(본토)에서 1200km나 떨어진 남방의 작은 섬에 ‘말썽꾼’을 떼어놓기 위해서다. 오키나와는 1609년에 일본이 점령하면서 일본에 의한 통치가 시작됐다.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미군 상륙에 따른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때 오키나와는 일본의 ‘패전처리’(천황제의 유지)를 의도한 정책으로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1이 희생되는 ‘오키나와전’의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의 ‘국체유지’(천황제)를 위해 미군에 의해 과도하게 살육당했고, 또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일본군으로부터도 ‘군 우선’이라는 이름 아래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미군에 의한 철저한 파괴가 이뤄진 뒤에는 주민의 땅을 빼앗아 미군기지가 건설됐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계기로 일본이 국가 주권을 되찾았음에도 오키나와는 1972년 5월까지 미군정에 계속 점령된 상태였다.

분노를 부채질한 사건…사건…사건

일본에 반환된 지금도 오키나와에는 일·미 안보조약 아래 5만명이 넘는 미군, 군속 및 그 가족들이 그곳에 거주한다. 4천m 활주로를 2개 가진 극동 최대의 카테나 공군기지, 그 카데나 기지보다 넓고 핵병기 등 모든 무기가 저장되어 있으리라 생각되는 탄약고지구를 비롯한 수많은 미군기지가 일본 정부의 강요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미군 범죄와 사고를 일일이 거론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1966년까지 소파가 제정되지 않아 미군 범죄에 아무 힘을 갖지 못했던 한국처럼, 오키나와도 1972년까지 미군 점령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한 수많은 범죄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5년 9월3일에는 나가야마 유미코(6)가 미군에게 폭행·살해를 당한 채 카테나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토지문제로 투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의 ‘입법원’(의회)에서도 “짐승만도 못한 잔인한 행위”라는 식의 항의결의를 했다. 미군은 범인을 엄벌에 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법회의에서도 사형판결을 내렸지만, 범인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사건은 유야무야돼버렸다.

미군이 오키나와 아이들에게 저지른 범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는 1970년 12월20일에 ‘고자(현재의 오키나와시) 폭동’으로 폭발했다. 도로를 횡단 중이던 한 주민이 미군이 운전하던 차량에 치이고, 미군 헌병이 미군의 일방적인 사고처리에 항의하는 주민에게 위협발포를 하자 분노한 주민들은 미군 헌병 차량뿐만 아니라 미군 차량, 외국인 차량 등 모두 73대에 불을 질렀다.


사진/ 95년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GAMMA)


최근의 미군 범죄 사례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1995년 9월4일 미군 3명에 의한 소녀(12) 성폭행 사건이다. 피해소녀의 용기 있는 호소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시 한번 오키나와의 미군 범죄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10월21일의 ‘현(縣)민 총궐기대회’에는 오키나와 본토에서 8만5천여명이 결집해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또 전국에서 줄줄이 항의집회가 열렸고,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의 사과발언을 얻어냈다.

오키나와 주민의 잇단 분노의 행동에 놀란 일본 정부는 그 뒤 ‘오키나와에 관한 일·미 특별행동위원회’(SACO)를 발족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일·미 소파 개정이 아니라 ‘운용상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SACO의 최종합의가 1996년 12월2일에 발표됐다. 특징적인 내용은 ‘중대범죄에 한해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기소 이전에 일본 경찰에게 넘긴다’는 것뿐이었다.

신병인도, 2001년에 처음 실현

그러나 미군 당국은 그 뒤에도 음주운전을 하다 오토바이를 탄 여고생을 치고 달아난 미군 병사를 일본에 인도하지 않았다. 기소 이전 범인 신병인도는 2001년에 오키나와 자탄초에서 여성이 성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1995년 소녀 성폭력 사건을 상기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면서야 처음으로 실현됐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중대범죄가 일어나면 지방의회가 ‘비난결의’를 채택해 미군에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또 지사가 미군 책임자를 면담해 개선을 촉구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사건·사고가 전혀 줄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군쪽에 근본적인 태도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둔지역의 주민이 주권자로서 일어섰을 때 미군은 지배의 고삐를 느슨하게 한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오키나와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도 한국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 미군에게 국경이란 의미가 없다. 전 세계의 미군은 하나의 기능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소파 개정은 일·미 소파에 직결될 수밖에 없다.

‘평화 수호’와 ‘국가 안보’를 위해 주둔하는 미군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그 피해를 입는 주민들이 각각 고립된 상태여서는 해결이 어렵다. 주권자인 주민 서로가 연대해서 투쟁하자고 할 때에야 비로소 미군, 주둔국 정부에 의한 무거운 족쇄로부터 주민들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