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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가 강요하는 ‘호의’ 한국이 재판권 행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재판권 넘어와도 미군 맘대로 거부 가능
“호의적인 고려를 해야 한다.” 지난해 일부를 고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이하 한미 소파)과 협정의 합의의사록·양해사항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특히 범죄의 재판관할권과 피의자 구금인도에 관한 조항에는 빠짐없이 이 표현이 나온다. 한미 소파 22조3항은 미군이나 군속, 그 가족이 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공무중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미국이, 비공무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한국이 1차적 형사재판권을 갖도록 나누었다. 또한 상대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이 있을 때 1차적 재판권을 갖는 국가는 이를 호의적으로 고려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호의를 보여온 쪽은 한국뿐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무조건적 호의’는 양국의 신뢰와 우호를 다지는 데 쓰이지 않고 미군 범죄자를 감싸는 데 악용됐다.
일본·독일·나토에 비해 너무 편파적
1. 92년 10월 경기 동두천에서 케네스 이병에게 살해당한 윤금이씨.
미군의 비공무중 범죄는 해마다 500∼600건에 이른다. 99년의 경우 531건의 비공무중 범죄에 대해 한국은 20건에만 재판권을 행사했다. 나머지는 미군 당국의 요청을 “호의적으로 고려해” 모두 넘겨줬다. 미군 당국에 재판을 맡긴 결과 과속과 신호위반으로 사람을 치여 중상을 입힌 이들은 입건조차 되지 않았고, 폭력·강도·절도사범 가운데서도 미 군사법원에 기소돼 형사처벌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공무중 범죄에 대해서는 어떨까. 공무중 범죄에 대해 한국이 재판권을 넘겨받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요청한 적도 없었다. 7월10일 법무부가 미군 당국에 여중생 압사사건의 재판관할권을 포기하라고 요청한 것은 66년 한미 소파가 체결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재판권을 넘겨주는 ‘선례’를 만들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는 “재판권 이양은 미8군사령관의 소관이다”라고 발뺌하고 대니얼 자니니 미8군사령관은 “재판권 이양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허락할 권한은 없다. 워싱턴에서 정할 문제다”라고 떠넘긴다. 여중생 압사사건을 계기로 재판권 이양문제가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한미 소파 재개정의 목소리도 힘을 받고 있다. 그동안 △재판권 이양 △신병인도 시기 △공무수행 판단문제는 한미 소파의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혀왔다. 피의자의 신병인도를 다루는 22조5항은 지난해 일부를 고쳤으나 여전히 불평등한 조항이다. 1차 재판권이 한국에 있는 범죄의 피의자가 한국의 수중에 있다면 미군 당국이 요청할 때 ‘인도해야 하고’, 미군 당국의 수중에 있을 때 한국이 요청하면 ‘호의적으로 고려한다’고 차별적으로 못박고 있다. 또한 한국은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는 피의자를 구금할 수 없어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위험이 크다. 지난해 고친 대목은 12가지 중대범죄에 한해 ‘예외적으로’ 피의자의 신병인도 시기를 확정판결 때가 아닌 기소시점으로 앞당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비공무중 범죄에 해당하고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 합리적 근거가 있는 사법적 결정”이 있어야만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공무중 판단을 미군 당국이 내리고, 한국 경찰의 초동수사를 보장하는 규정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 조항은 무용지물이다. 2000년 2월 용산 미군부대 영안실에서 주검 방부처리용 약품인 포르말린을 하수구에 몰래 버려 한강으로 흘려보낸 사실이 뒤늦게 폭로돼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공무수행중이었다는 이유로 한국쪽의 수사를 거부했다. 무단 방류 책임자에 대한 재판권에 대해서는 논의가 없었고, 내부 고발자인 한국인 군속에 대해서 미군 당국이 재판권이 있느냐 없느냐만 논란이 됐다. 그 사이 미군 방류 책임자는 승진까지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해 한미 소파 개정때 환경관련 조항이 일부 추가되긴 했으나 환경범죄자의 재판권 절차규정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원주 캠프롱 폐유유출 사건과 서울 녹사평역 기름유출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미군 당국은 조사중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지난 5월 서울시와 환경부 조사에서 구멍난 기름탱크를 들키자, 사실을 시인하고 손해배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이 개입할 틈이 없다. 주한미군기지의 기름유출 사고는 한해 평균 8.4건씩 일어났지만 한국이 수사조차 제대로 못한 까닭은 만병통치약과 같은 공무중 증명서 때문이다. 미일 소파는 미군 범죄가 발생했을 때 공무중이었는지 여부를 미군 당국이 아닌 일본 법원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미군 피의자를 체포한 경우 정당한 이유와 필요가 있으면 계속 구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토 소파는 재판권에 상관없이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독미 보충협정에서는 1차적 재판권 포기 철회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어 ‘무조건적 호의’나 ‘일방적 호의’가 가능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무죄 판결 나면 상소도 못해
1. 95년 7월 경기 동두천에서 미군에게 폭행당하고 돈을 배앗긴 원근자씨.
어린 여중생들이 처참하게 죽었지만 미군은 1시간이 넘도록 한국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의 신고로 한국 경찰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하자 미군은 피의자에 대한 접근과 수사를 막았다. 지난해 일부 고쳐진 한미 소파 양해사항에는 한국 수사기관이 미군 피의자를 미군 당국에 인도하기 전에 예비수사를 할수 있다는 내용이 삽입됐다. 그러나 현장조사나 피의자 심문을 어떤 절차로 할지, 누가 예비수사를 마무리하고 인도시기를 정할지 세부내용이 없어 이대로는 있으나마나한 규정이다. 이번 사건의 재판권이 한국쪽으로 넘어온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한미 소파 22조 9항의 합의의사록은 미군 피의자에 대한 지나친 특혜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대표가 참여하지 않으면 피의자나 피고인의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군복이나 민간복을 입고 수갑을 차지 않을 것을 포함해 미국 군대의 위신에 합당하는 조건이 아니면 재판을 받지 않을 권리까지 명시하였다. 미군 당국의 입맛에 따라 언제든 재판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무죄 판결이 난 경우 상소하지 못하도록 해 검찰의 상소권까지 침해하고 있다. 이런 특혜는 미일 소파나 나토 소파 등 다른 나라의 협정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1957년 일본의 미군 기지 근처에서 탄피를 줍던 한 여성을 미군 경비병이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 당국은 공무중임을 알리는 증명서를 일본쪽에 전달하려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미군 당국은 1차 재판권을 포기했다. 당시 일본이 재판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미군 당국의 호의’가 아니라 ‘일본 여론의 힘’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회 권종호 변호사는 “범죄자가 스스로를 재판하도록 하는 나라는 없다. 자국민을 죽인 범죄자를 재판하고 처벌할 권리는 대한민국 사법부에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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