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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스템이다 공직자 윤리는 문화나 개인의 도덕성이 아닌 제도에 뒷받침돼야…부방위에 기대를
슈뢰더 총리의 ‘유별난’ 공사 구분
슈뢰더는 개인적인 여행을 할 때 돈을 아끼려고 열차의 2등칸을 타거나 구형 폴크스바겐을 직접 몰고 간다. 가족이 교외 나들이라도 하려고 하면 폴크스바겐 뒤로 경호원이 가득 탄 리무진이 따라간다. 세탁소도 1주일에 한번만 가고, 쇼핑·요리·다리미질은 부인 도리스가 직접 한다. 또 월 770만원짜리 총리용 호화 빌라가 있지만, 출퇴근 교통비를 아끼려고 사무실에서 20걸음 떨어진 침실 하나에 욕실이 딸린 월 67만원짜리 아파트에 산다. 10대인 의붓딸 클라라는 부부 옆에 간이침대를 놓고 잔다. 총리가 열차 2등칸을 타는 거야 서민 이미지를 과시하려는 정치적 제스처쯤으로 보아 넘기지 못할 일도 아니다. 대한민국 총리가 그런다면 모를까? 서양 정치인들이란 워낙 이미지에 목을 매지 않는가. 하지만 그 이유가 국가예산 몇푼 아끼려는 생색내기가 아닌 총리 개인돈을 아끼려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구나 이 나라에서는 총리가 자기 돈을 내고 출퇴근까지 한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서도 확실한 한 가지는 한국에서 그런 공직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 공직자들이 공사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는 역사·문화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신문화연구원 이서행 교수는 “연줄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가 뿌리깊은데다 서구의 계약사회와 합리주의 경험이 짧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법학)는 “서양이 진작부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한 데 반해 동양에서는 양자의 구분이 희미했다. 특히 효를 위해서라면 공사를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식이 오래 전부터 자라잡아 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공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서구와는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 김기현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유교사상에 나타난 공사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유학에서도 공의 영역과 사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고, 공을 우선시하는 선공후사의 관념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서구와 달리 유교사상에서는 부모·형제 같은 가족조차 공적 영역에 속했다”고 해석했다. 가족조차 공적 영역의 연장선 위에 놓고 엄격한 규범을 강조했다는 얘기다.
직장 볼펜을 집에서 써도 좋은가?
문제는 눈앞의 현실이 오히려 정반대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는 가족에게 엄격한 공적 규범을 적용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공무에 느슨한 사적 이해를 개입하는 게 일반화되어 있다. 윤태범 충남대 교수(행정학)는 “한 사회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일상생활에서는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공직자만은 그런 상황논리에서 예외여야 한다. 공직자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 전체를 상대로 한 부정과 비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서구의 공직사회도 역사·문화적 배경이 아니라 엄격한 제도와 규정에 의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직장에서 쓰는 볼펜을 집에 가져가서 써도 좋은가?” 김호섭 아주대 교수(행정학)는 “미국에서 행정윤리를 공부할 때 교수가 강의시간에 분석하라고 내놓은 사례가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처음엔 한심해보였으나 공과 사의 경계를 사례별로 꼼꼼히 규정하다보니 공직자 윤리가 한 사회의 문화나 개인의 도덕성이 아닌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돌이켰다. 서구의 공직사회 윤리규정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직자가 개인의 이익을 공직생활에서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이익충돌 규제의 원칙’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공직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의무적으로 제3자에게 신탁한 뒤 이를 어떻게 운영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하는 ‘블라인드 트러스트’ 규정을 두고 있다. 윤태범 교수는 “엄밀히 말해 미국의 공직자윤리법 등은 공직자에게는 모든 영역이 공적이라는 대전제에 입각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도 부패방지위원회(부방위)가 ‘공무원 행동강령 권고안’을 제정해 공직자들이 공사를 구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중앙부처와 지자체, 국회·법원 등 헌법기관은 이 권고안에 따라 자체 규칙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앞으로 공무원은 직무가 자신이나 친족의 이해와 관련되면 직무회피를 요청할 수 있다. 또 공무원 자신은 물론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이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전·선물·향응을 받거나 직무와 무관한 사람일지라도 기준을 초과하는 금전 등을 받으면 징계를 받는다. 영리활동도 엄격히 제한된다.
흐지부지된 ‘공직자 10대 준수사항’
부방위의 행동강령은 규정이 다소 느슨하다는 비판이 없지 않으나, 공직사회의 부패를 막기 위한 획기적 제도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공직사회에서는 벌써부터 경조금 관련 규정 등이 현실이나 관행, 문화와 너무 동떨어졌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도 지난 99년 간부급 공무원들의 경조금 금지 규정 등을 담은 ‘공직자 10대 준수사항’이 흐지부지된 전례를 들어 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관행·문화가 비슷한 일본도 지난 2000년 부방위 권고안과 비슷한 ‘공무원윤리법’을 제정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김호섭 교수는 “일본에서는 공무원에게 건네던 스모 경기 입장권이 사라지면서 스모 경기장이 텅 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부방위 홍현선 심의관은 “이번 행동강령은 부패방지법에 근거한데다 구체적 상황까지 적시하고 있다.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문화를 바꿔갈 수 있도록 다같이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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