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금강산도 가는데 공동어로 왜 못해!” 교전원인 둘러싼 논란에 흉흉한 민심… ‘흔들리는 섬’ 연평도를 가다
퇴락한 선창가에서 추억을 씹으며…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도는 추억의 섬이다. 1400여 주민이 꽃게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 섬은 30여년 전만 해도 해마다 4∼6월 조기파시가 열리던 곳이다. 온 나라 고깃배가 용왕기를 앞세우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연평바다로 돌 실러 가잔다/ 어허야 어허.” 뱃노래를 부르며 모여든 어선으로 일대는 흥청거렸고, 뱃사람들은 만선의 기쁨에 취해 갯가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수천척의 배들이 줄지어 서서 포구에서 선착장이 있는 당섬까지 배만 딛고 건너갈 수 있었다던 그때, 대연평도에는 술집만 300곳이 넘었다. 그러나 ‘조기 반, 물 반’이라던 연평어장에서 1968년을 끝으로 조기는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잇단 어선 나포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어로한계선’을 선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황금빛 조기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해태양식이 동원됐지만 험난한 섬 생활을 꾸려가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67년 558가구 3055명에 이르던 인구는 불과 10여년 만인 80년 1888명으로 줄었다. 한때 수만동의 조기를 말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던 연평포구 갯가에는 이제 흉물스런 대상륙장애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평도 사람들은 그 추억을 씹으며 산다. 북상하는 태풍 라마순의 영향으로 바다가 꽁꽁 묶인 5일, 뱃사람들은 오전부터 퇴락한 선창가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현실의 삶이 팍팍해서일까. 그들의 대화는 좋았던 옛 시절을 벗어나지 않았다. 연신 소주잔을 들이켜던 박아무개(50)씨가 불콰한 낯빛으로 황금빛 조기가 넘쳐나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박씨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조기파시가 이어졌다”며 “그때는 북방한계선 주변까지 올라가서 북한 배를 바라보며 조기를 잡아올렸다”고 말했다. 외지에서 들어와 40여년을 연평도에서 살았다는 최아무개(72)씨도 북쪽 뱃사람들과 ‘서로 담배를 던져주고 받을 만한 거리’에서 조기를 퍼올리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최씨는 “한참 조기잡이를 하다 보면 이북 땅에서 개짖고 닭우는 소리까지 들리곤 했다. 요새 말로 하자면 그땐 그야말로 남북한이 ‘공동어로’를 했던 셈”이라고 말하며 헛헛하게 웃었다.
“어민들의 욕심이 지나쳤다. 봄철 게잡이가 한창이던 올 5∼6월에는 ‘(조업구역을 벗어나) 4마일 나갔다, 5마일 나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북방한계선 근처까지 어선이 몰려 들어오는데 북한 군인들 그냥 두고 볼 수 있었겠나.”(어민 ㄱ씨) “어민들이 무슨 죄가 있나. 조업구역을 벗어나 꽃게 잡으러 나간 것이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왜 어민에게 목숨 값을 떠넘기는가.”(어민 ㄴ씨)
두 패로 갈려 서로 손가락질
어민들은 교전이 벌어진 뒤 서로에게 그렇게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민회를 중심으로 월선 조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어민회 중심의 ‘주류’ 쪽과 과도한 월선이 북을 자극했다고 말하는 ‘비주류’ 쪽의 공방은 좁디좁은 섬마을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책임론을 피해가려는 군은 그 사이를 비집고 여기저기 다른 말을 옮기기에 여념이 없고, 외지인의 과도한 관심은 섬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이젠 후미진 뒷골목 식당 골방에서도 맘 편히 얘기꽃을 피우지 못할 지경이 됐다.
그러나 풍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연평꽃게는 3년 풍어, 3년 흉어가 반복된다”는 옛말이 정확히 들어맞으며, 지난해로 풍어는 ‘종’을 쳤다. 갑작스런 어황변화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꽃게에게 적당한 해수온도인 섭씨 14∼17도보다 ‘올해는 물이 차다’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비대해진 어선과 조업 규모는 흉어기로 접어들면서 어민들에게 고스란히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선주 대부분이 적게는 2억∼3억원, 많게는 6억∼7억원의 빚을 안고 있다. 허가된 조업구역은 흉어기에 더욱 좁게 느껴졌다. 어민들의 생계는 조업구역 밖에서 보장받을 수 있었다. 월선 조업이 예년보다 훨씬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40대 어민은 “모두들 월선 조업에 나서는데 다른 배보다 아래쪽에서 조업하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교전이 벌어진 6월29일에도 12척에 이르는 어선이 조업구역과 북방한계선 중간지점인 이른바 ‘적색선’을 넘어 조업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어장의 오염도 월선조업 부추겨
7월2일 교전발생 뒤 첫 조업을 나간 연평 어선 56척이 건져온 꽃게는 모두 10t 남짓에 머물렀다. 지난해 이맘때 많게는 100t 가까이 걷어올리기도 했지만, 이날 건져온 꽃게는 그나마 시기를 놓쳐 상해버린 양도 만만찮았다. “일기 나쁘다고 회항, 빨간 바가지(북한 경비정) 떴다고 회항, 월선했다고 회항을 거듭하다 결국 교전까지 나고 말았다. 이제는 바다도 꽃게도 다 싫고 그저 연평도를 떠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꽃게잡이 10여년에 빚만 3억원을 졌다는 40대 주민의 한탄이다. 그의 올 봄철 게잡이 손익분기점은 어획고 2억원. 그러나 지금까지 잡아올린 꽃게는 7천여만원어치에 불과하다. 어황이 바닥을 기고 있는데다 총질까지 나고 보니 올 봄 게잡이는 사실상 끝난 상태다. 섬마을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꽃게잡이의 흉어로 주민들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휘청이고 있다. 이제 막대한 피해를 본 어민들의 바람은 망망대해에 두고 온 값비싼 어구를 거둬오는 것뿐이다. 그러나 팽팽한 군사적 긴장은 그마저도 어렵게 하고 있다. 분단은 그렇게 연평 어민들의 일상을 옥죄고 있었다. 조상이 열어놓은 바닷길을 따라 대대로 삶의 희망을 퍼올리던 뱃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는 현실적이었다. 조업구역 문제를 두고 해군과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되고, 벌과금을 감수하며 위태로운 월선 조업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평화였다. 하지만 남과 북이 총질을 해대고 안타까운 젊은 목숨이 스러져가는 한 어민들은 희망을 품지 못할 것이다. 남북 공동어로는 그런 어민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봐야 할 아스라한 등대불빛인지도 모른다. “금강산도 가는 마당에 공동어로인들 왜 못하겠어. 우리 어구가 훨씬 발달했으니 어획고에 따라 북한 쪽에 ‘비용’을 지불해줄 수도 있을 테고.” 연평도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뭍으로 나갔다 5년 전에 귀향했다는 연평어촌계 박건섭(58) 간사는 “어민 입장에서 공동어로 작업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느냐”며 “성사만 된다면야 서해바다만큼은 통일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허망하게 숨져간 젊은 넋을 위로하려는 것인가. 태풍으로 더욱 기세가 오른 파도가 일찌감치 어두워진 선창가를 거칠게 때려댔다. 이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연평도의 물과 고기는 바다 건너 북녘땅 앞으로 옮겨가 있을 터다.
연평도=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