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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등록 2002.06.26(수) 제415호

[표지이야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신대륙’

2002 월드컵에서 드러난 세계 축구의 지각변동…견고한 유럽·남미의 성벽 허물어지다

‘판구조론’이라고 불리는 현대 지리학 이론은 지진과 화산 분출, 그와 연관된 지각변동의 원인을 지구 내부 판의 이동과 충돌에서 찾는다. 대륙은 물론 바다까지 떠받치는 12개의 거대한 판이 서로 밀어내고 부딪치며, 그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5대양 6대주의 구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현존의 지각구조 또한 잠정적일 뿐, 이동하는 판들의 충돌에 따라 다시 엄청난 격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지금 세계축구가 그 격렬한 지층이동의 시기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제17회 한·일 월드컵은 그러한 관측을 입증한 하나의 역사적인 실험장이었다.

5개 대륙 고루 입성한 8강

꿈틀거리며 기존의 판구조를 압박해오는 힘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중미의 신흥세력에서 비롯한다. 이들의 용트림 앞에서 유럽과 남미가 전적으로 지배해온 현존의 판도는 이미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한층 뜨겁게 달군 유럽 강팀들의 잇단 탈락사태는 끝간 데 없이 뻗치는 지각변동의 거대한 파장을 말해준다. 축구 신흥대륙의 힘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으며, 구대륙은 진도 8의 맹렬한 지진에 무너져내린 형국이다.

지각변동의 단적인 증거는 이번 대회 8강의 구색에서 제시됐다. 이번 월드컵에선 72년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8강이 겨루는 준준결승에 5개대륙 국가가 고루 진출했다. 아시아(한국)와 북중미(미국), 아프리카(세네갈) 대륙이 유럽과 남미 일색의 8강 중원에 발을 들이밀었다. 유럽에선 잉글랜드·스페인·터키·독일이, 남미에선 브라질이 각각 올랐다. 다섯 나라가 올라 여전히 막강한 지배력을 과시하긴 했지만, 구대륙의 힘이 예전만 못함은 분명해보였다. 특히 유럽의 추락은 한층 두드러졌다. 98 프랑스 월드컵에선 8강 중 6개가 유럽의 차지였다.

월드컵 사상 8강에 유럽이나 남미 이외의 국가가 두 나라 넘게 올라선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지 유럽과 남미대륙 이외의 지역에서 출전해 월드컵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 나라는 5개국에 지나지 않았다. 북중미에선 미국(30년)과 쿠바(38년), 멕시코(70, 86년)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선 각각 북한(66년)과 카메룬(90년)뿐이었다. 이 가운데 축구열기가 북미보다 인근 남미에 더 가까운 중미의 쿠바와 멕시코를 제외하면 8강 진출국은 세 나라로 줄어든다. 기존의 축구 판구조가 얼마나 강고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이번 대회의 지각변동이 얼마나 엄청나고 격렬한 것이었는지를 함께 말해준다.

한국의 4강 진출은 한층 통렬한 증거다. 이번 대회 들어 가시화한 세계축구 지형의 변화가 결코 일회성이 아니라 영구적인 판구조 변동의 결과일 수 있음을 뚜렷이 드러냈다. 월드컵 4강의 의미는 8강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4강행이 확정되는 순간 한 방송사의 해설자는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채 오로지 “4강! 4강! 아! 아…!”의 괴성만을 내지를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진실한 해설이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4강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였다. 드물게 나온 비유럽·비남미권의 8강 진출국 가운데 4강에 오른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그것도 30년 초대 대회 때 단 13개 나라가 참여한 가운데 거둔 성적이다. 이번 대회 이전까지 16번의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팀을 단순 반복계산하면 모두 64개팀이 된다. 유럽이 45개팀(70.3%), 남미가 18개팀(28.1%)이다. 82년 스페인 월드컵 등 3개 대회에선 유럽이 4강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만리장성만큼 높아보이던 4강의 벽이 이번에 마침내 허물어진 것이다.

반란의 시작은 90년 카메룬

지각변동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뜨겁기 그지없다. 통신사 는 한·일 월드컵 4강 확정 직후 “1회 월드컵 이래 4강 진출팀이 가장 다채로워졌다”며 “유럽의 세력 상실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비록 지역적으로 유럽권에 포함되지만,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까운 변경쯤으로 치부돼온 터키의 선전 또한 구조적 지각변동의 한 방증으로 읽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월드컵이 이변에서 시작해 전혀 예상치 못한 네팀으로 압축됐다”며 “두 축구 최강국이 경이를 불러일으킨 두 도전자와 맞붙게 됐다”고 전했다. 영국의 은 “믿어지지 않는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실로 혁명을 포함한 모든 구조적 변화는 첫 순간 믿어지지 않는다. 변화를 이끈 쪽과 이끌린 쪽 모두 실제 발생한 변화에 놀라워하고 압도당하긴 마찬가지다. 그 의미는 충격이 가신 뒤에야 비로소 실감나게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또한 역사가 있다. 미세한 맨틀의 움직임이 쌓여 거대한 대륙의 모양을 바꿔놓듯이 축구와 월드컵 또한 판구조의 변동으로 이어진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앙시앵레짐을 뒤흔든 최초의 의미 있는 일격은 아프리카의 것이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한 ‘불굴의 사자’ 카메룬은 16강을 넘어 8강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아프리카는 94년 미국대회와 98년 프랑스대회에서도 ‘슈퍼 이글스’ 나이지리아를 16강에 진출시키면서 현존의 판구조에 중대한 변동이 도래하고 있음을 예상케 했다.

사실 90년 이전까지 아시아와 북미는 물론 아프리카 역시 잠자는 사자이며 호랑이이자 사화산에 지나지 않았다. 38년 프랑스대회 때 아시아에 처음으로 배당된 출전권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현 인도네시아)에 돌아갔다. 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아시아 출전국인 인도는 축구화 없이 출전하려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제지를 받자 아예 참가를 포기했다. 54년 스위스대회부터 FIFA는 대륙별 본선 출전국 안배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이 대회 본선 출전국 16개국 가운데 유럽(10개국)과 남미(4개국)를 빼고 아시아와 북중미에 돌아간 티켓은 각각 1장씩이었다. 심지어 아프리카는 70년 멕시코대회에 들면서 비로소 본선 출전권 1장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시아나 오세아니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본선에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본선 출전국이 24개국으로 늘어난 82년 스페인대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각각 1장의 출전권이 더 배정되면서 마침내 축구의 판구조는 대규모 충돌의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본선 진출국이 36개국으로 늘어난 90년대 세계를 흥분시킨 아프리카의 약진은 변혁의 도래를 알리는 한편의 장대한 반란극이었다.

본격적 변혁은 아시아의 몫

반란극에 이어진 본격적 변혁은 66년 북한의 8강 진출로 한때나마 위대한 ‘단막극’을 연출한 아시아의 몫이었다. 9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16강 진출과 강팀들에 맞서 비록 전패했지만 당당했던 일본의 선전, 마침내 한·일의 16강 동반진출에 이은 한국의 4강신화…. 그것은 ‘AGAIN 1966’이었으며, ‘PRIDE OF ASIA’였다. 여기에 세네갈과 미국의 돌풍이 어우러지며 마침내 새천년 축구의 지형도는 완전히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유럽의 힘과 체력, 남미의 유연한 개인기로 양분된 세계축구의 기존 구도는 이제 스피드와 조직력을 무기로 한 신흥대륙의 부상 앞에서 그 효력을 잃었다.

전문가들은 △축구전술의 융합에 따른 대륙별 고유성의 상실과 △그 틈을 파고 든 신흥대륙의 저변 확대 △세계적 축구시장의 형성에 따른 선수와 감독 이동의 확산과 그에 따른 대륙 간 평준화 △월드컵과 지역별 빅리그의 성황에 따른 축구 열기의 고양 등을 축구 지각변동의 징후 또는 원인으로 꼽는다. 축구황제 펠레는 “한국팀은 특유의 체력적 강인함과 플레이스타일 덕분에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팀이 됐다”고 말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중미에서 분출해 유럽과 남미라는 축구의 구대륙을 휩쓴 황홀한 승리의 붉은 용암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고 이글거리며 타오를 것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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