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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패배는 좌절이 아니고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강팀으로 조련받기까지
숨가쁜 질주는 지나온 길의 잔영을 빠르게 지운다. 한국축구가 폴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출전사상 첫 승을 거둔 때가 6월4일이다. 하지만 20여일밖에 지나지 않은 그날의 기억은 벌써 아득하다. 그날 경기의 위대한 역사성은 다음에 쏟아진 새로운 역사들에 의해 가리고 말았다. 한국축구가 경기를 새로 치른다는 건 곧 한국축구의 역사를 새로 고쳐쓰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국축구는 한달 내내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허물어왔다. 한국축구는 두려움을 잊은 전사와도 같았다. 이름세 높은 강호들 앞에서 헛발질해대던 주눅든 모습은 어느새 흔적조차 없다.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유독 강력한 우승후보들과만 맞닥뜨려온 험난한 경기일정은 한국축구의 변신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된 기획처럼 보였다. 패자들만이 한국과 조우한 불행한 운명을 저주했을 뿐 어느새 전 세계는 한국축구의 승승장구를 당연시했다. 승리는 사람의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패배하지 않는 건 철저히 사람의 몫이었다.
파워축구, 정신력+체력
‘한국축구=정신력’이라는 등식은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다. 옛부터 “정신력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평가했던 건 다름 아닌 한국 자신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축구의 정신력은 어제의 정신력이 아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지난 1월 “선수들의 열성은 99점이지만, 경험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극복에서는 30점”이라는 뜻밖의 평가를 내놓았다. 비장하지만 짓눌려 있는 한국선수들의 정신력을 히딩크는 어떤 강팀과도 당당하게 맞붙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재무장시켰다.
선수 23명의 몸값 총합이 데이비드 베컴 한 선수의 몸값에도 못 미치는 한국축구의 ‘검박함’은 승리의 걸림돌이 아니라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스타플레이어 한두명이 이끄는 팀의 승리는 스타플레이어의 컨디션과 몸짓 하나하나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본기에 정신력과 체력까지 갖춘 선수들이 팀플레이를 통해 직조해가는 경기에서 승리는 우연일 수도 이변일 수도 없다. 한국축구는 승리할 만했고, 승리에 대한 기대는 합리적 예측에 기반했다. 지금 세계가 두려워하는 건 한국축구의 거센 돌풍이 아니라 예측가능한 경기력이다.
이렇듯 한국축구의 90분, 또는 120분 경기는 히딩크가 한국대표팀을 조련해온 1년6개월의 축약판이었다. 그의 1년6개월에는 비단길보다는 가시밭길이 훨씬 길었다. 그는 대표팀간 경기에서 거듭 패했고, 잇따라 패했다. 그러나 그와 한국팀의 패배는 좌절이 아니라 성장통이었다. 그는 뜨거운 햇살과 퍼붓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강호들만 골라서 상대했다. 한국팀은 깨지면서 차츰 단단해져갔고, 월드컵을 앞두고 무서운 강철이 되었다.
붉은 물결, 붉은 함성…
히딩크가 농사꾼이었다면 붉은악마는 거름이었다. 2002월드컵을 붉은 축제로 물들여버린 붉은악마는 전 세계로 중계되는 눈요깃거리가 아니었다. 1995년 PC통신 축구동호회원들이 처음 구성한 붉은악마는 더는 형태를 갖춘 조직이 아니다. 한국팀의 12번째 선수는 운동장 관중석에도 가득 찼고, 온 나라 거리거리에도 넘쳐났다. 거름이 흙 속으로 흩어져 식물의 뿌리로 스며들듯이, 붉은악마는 이제 해체되어 거대한 국민 전체가 되었다. 4800만명의 선수와 싸워야 하는 외국팀들은 붉은 물결과 붉은 함성에 질식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땅을 갈아엎고 다시 농사일을 준비하듯이, 월드컵이 끝나면 한국축구는 새로운 출발에 나서야 한다. 한국축구의 나아갈 길은 지나온 1년6개월 속에 이미 이정표로 제시되어 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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