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6월26일 제415호 

우린 더 뜨겁게 놀아도 좋다

월드컵, 이 환희의 제의를 통해 우리의 감수성은 변화하고 있다


사진/ 거리와 광장을 메운 붉은 물결은 우리의 비극적 감수성을 털어버린 한판의 거대한 씻김굿이었다. (박승화 기자)


신화!

한국 축구대표팀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내리 물리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마지막 단계까지 진출했다. 일컬어 ‘신화’라고 한다. 그렇다. 신화가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신화를 쓰고 있다. 그것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사나흘에 한번씩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비극과 오열에 익숙한 우리에게…

살아오는 동안 입을 딱딱 벌어지게 하는, 그리고 벌어진 입을 도저히 다물지 못하게 하는 일들을 많이 겪어왔다. 내 길지 않은 삶 속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의한 광주시민 대학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리고 삼풍백화점 붕괴참사가 있을 때가 그랬다. 그 이전의 모든 삶의 질서가 갑자기 다 무너지고 기존의 가치가 한순간 전부 휘발되어 버리는 그 순간, 불행히도 그 일들은 둘 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일들이었다. 내 앞세대들에게는 아마 한국전쟁의 발발 정도가 그런 일이었을 것이다. 삶의 비극적 단절, 산더미 같은 고통과 절망과 분노가 이루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닥쳐들어 가슴을 때리던 그 기억들…. 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처럼 언제 어떤 나쁜 일이 갑자기 우리를 엄습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익숙한, 비극에의 기대에 숙련된 삶이 나와 내 동시대인들의 삶이었다. 갑작스럽게 삶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비극과 오열에 익숙한 우리에게 환희나 열광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극적 경악에 길든 우리에게 환희와 경악의 순간이 이렇게 찾아왔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우리의 젊은 청춘들이 날마다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을 거침없이 저지르면서 온 나라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다고, 우리네 삶에 이런 경이로운 도약의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고, 비극적 감수성에 곤새우젓처럼 푹 절어 나날의 삶이 오직 욕된 견딤뿐이던 우리들에게 이처럼 복사씨와 살구씨도, 길위의 돌멩이조차도 미쳐 날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연일 거리로 뛰쳐나와 붉은 바다를 이루어 미쳐 날뛰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거대한 씻김굿을 본다. 오프사이드가 뭔지 몰라도, 페널티킥이 뭔지 몰라도, 다음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평소에 축구의 ‘축’자도 입에 한번 안 올려봤어도 괜찮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축구가 아니다. 다만 신나는 일이 벌어졌고, 신나는 일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당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무슨 자격이 필요할 것인가. 히딩크는 사제, 대표선수들은 스물세명의 제례관들, 우리 모두는 이 환희의 제의에 참석한 마음이 가난한 군중들이다. 제의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을 짓눌러온 비극적 감수성에서 놓여나고 있는 것이다. 우화등선, 열반, 해탈, 부활, 휴거…. 온갖 놀라운 종교적 엑스터시를 다 합친 것과 같은 환희의 제의를 통해 우리 삶의 감수성은 변화하고 있다. 활 잘 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던 오랜 낙천적 기억을 돌이켜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씻김굿이다.

축구는 정치논리에서 경제논리로


사진/ 23명의 붉은 전사들의 승승장구를 통해 축구는 한국사회의 문화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SYGMA)


축구라는 운동 자체가 하나의 제의다. 때로는 대리전쟁이다. 그리고 제의와 전쟁은 언제나 지배집단의 가장 효과적인 통치수단이라는 점에서 축구는 기본적으로 정치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독재국가에서 축구는 대표적인 대중조작 수단으로 공인되어 있다. 축구를 잘 하고,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나라가 곧 선진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른 부분에서의 불의와 실정을 축구로 은폐하고, 대중적 불만을 축구를 통해 무마하는 일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에서도 축구가 지닌 제의적·대리전쟁적 성격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소비행위로 순화된다. 제의와 전쟁의 정치적 성격이 희석되고 하나의 문화로 순치되고 양식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한국축구는 당연히 정치의 대리물이었다. 하지만 6월항쟁을 고비로 점차 축구는 정치적 성격이 희석되고 점차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스포츠산업의 한 축으로 변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월드컵을 유치하고자 했을 때 거기엔 정치의 논리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진행 중인 지금도 그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현 정권은 불행히도 그나마 이러한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만한 통치력조차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함께 잔치를 구경하는 처지에 있을 뿐이다.

정치논리에서 경제논리로의 선회, 자본이 주도하는 돈잔치, 국제축구연맹(FIFA)은 하루하루의 매상고를 계산하는 일에, 경제계는 지금 이른바 포스트월드컵의 예상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일에 준결승전을 앞둔 축구선수들보다 더 분주할 것이다. 이런 자본 절대우세의 국면에서 민중의 일상은 망각되고 의도적으로 은폐되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일정표를 들여다보고 한국팀이 16강에 들 수 있을까 어떨까를 침을 삼키며 예상하고 있을 때, 시그네틱스의 여성노동자들은 한강 철교 차디찬 철골조 위에 올라가야 했고, 노점상들은 손수레를 거꾸로 세워놓아야 했으며, 미군은 여중생들을 깔아죽였고, 6·15 공동선언 2주년은 잊히고, 민주주의의 모판인 지방선거는 개판이 되었다. 게다가 전혀 예기치 못한 축구대표팀의 승승장구와 수백만 ‘붉은악마’들의 전국적 발호(?)가 이러한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마치 없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함성 속에 다 날려보낸 것이다.

만일 우리 대표팀이 그저 월드컵 출전사상 첫 승이나 하고, 아니면 겨우 턱걸이 16강이나 하고 말았으면 그 순간부터 월드컵은 남의 잔치로 바뀌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이 행사의 객체로 밀려나 그저 외국인들에게 억지웃음이나 웃으면서 부지런히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월드컵에 대한 일정한 대자적 각성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표팀의 승승장구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아니 갑자기 세상이 개벽을 했다.

우리의 독재정권은 노력에 비해 축구를 적절한 통치매개로 이용하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축구는 아시아에서는 꽤 호령을 하고, 월드컵 본선에도 나갈 만큼 나갔지만 세계 수준에는 늘 못 미쳤다. 그런 차원에서 축구는 그저 ‘박스컵’ 수준으로 독재정권의 고만고만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고, 문민정권들에게는 단지 그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그저 소소한 국내용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정도나 박찬호·박세리 등 해외로 나간 스포츠 천재들의 활약으로 겨우 그 숨어 있는 카니발을 향한 갈증을 감질나게 달래왔을 뿐이다.

국가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

그런데 우리에게도 마침내 축구가 왔다. 거스 히딩크라는 명장과 만나면서 우리 축구는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할 준비를 마쳤고, 월드컵 본선에 임박하면서 치른 몇 차례 경기와 조별 예선을 거치면서 비로소 세계 수준의 축구가 되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국사회 구성원 절대다수가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상징의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뜻이 된다. 골프나 야구에 견줄 수 없는, 감독을 포함한 최소한 12명의 스타, 박진감 넘치게 밀고 밀리는 게임, 골 순간의 원초적 성취감, 그리고 약한 상대를 압도하고 강한 상대를 추격하는 짜릿함, 이 모든 것을 이번 월드컵 대표팀은 한꺼번에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축구팀의 이런 놀라운 향상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오래도록 켜켜이 깔려 있던, 그리고 부정적인 방식으로밖에 표출될 수 없던 엄청난 사회심리적 에너지에 불을 붙였고, 지금 이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태극기 그리고 '대한민국'은 엄숙·경건한 최대 상징물이 아니라 축제 참가자들의 집합행동을 묶어주는 최소 상징물로 기능했다. (SYGMA)


이 폭발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일각에서는 이 엄청난 대중적 에너지의 폭발을 국가주의와 잘못된 애국심의 이상팽창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하여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런 우려에도 일리는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우선 국가주의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더불어 이미 거의 사회적 존재의의를 상실하다시피 한 애국가·태극기 등 낡은 국민국가적 상징들이 다시 복권되는 현상, 그리고 어느 응원인파 속에서도 나오는 “내가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라는 감격어린 진술 등 어느 하나 국가주의 망령의 부활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으로 ‘민족주의적 광기’라고 불려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팀의 경기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던 나도 관중석에서 초대형 태극기가 물결치며 펼쳐지고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목이 메어 모처럼 따라부르려고 한 애국가를 끝내 못 부르고 말았다.

상징과 기호는 중요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주의와 배타적 애국주의의 흔적을 나 역시 여러 군데서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나는 여기서 ‘대한민국’, ‘태극기’, ‘애국가’라는 기표들과 애국주의·국가주의라는 기의 사이에 일정한 ‘미끄러짐’, 즉 불일치 역시 여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비롯하여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에 모인 절대다수의 ‘국민’에게 애국가와 태극기, 그리고 ‘대한민국’은 엄숙 경건한 최대 상징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집합행동을 묶어주는 최소 상징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이 격렬한 카니발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낡은 집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잃어버린 존재의 거처로서의 공동체, 최소한의 분열되지 않은 자기 정체성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들의 의식과 행동은 외면적 격렬성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소극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공동체주의의 소산에 가까운 것이다. 나머지는 말 그대로 이런 자기 존재의 최소한의 거처로서의 민족사회를 발견한 기쁨, 정체성의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된 환희,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누려보는 충만한 절대긍정의 상태에 대한 안도감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좀더 뜨겁게 놀아도 좋다.

우리 마음의 빗장도 풀어라


사진/ 거리를 물결친 축제의 열기는 정체성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된 환희에 대한 안도감의 표현이었다. (김종수 기자)


남은 경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사실 우리는 이미 이번 월드컵의 우승자이고 챔피언이다. 선수들과 국민이 서로를 밀고 끌면서 여기까지 왔으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잠재적 에너지를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뜨겁게 불태웠다. 우리는 남에게도 우리 스스로에게도 존경받아 마땅한 민족이다.

스페인전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이 관중석을 향해 피버노바 공을 차 보내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내겐 그 어느 골 장면보다 가슴에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양팔을 벌리는 것도 아니고, 그 특유의 어퍼컷 동작도 아니고 공손히 두 손 모아 광주시민들에게 고개 숙이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진정 마음속 깊이 우리를 존경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시청 앞 광장에서, 또 여러 거리응원 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섞여 있는 외국인들이 정말 자기 나라 대표팀을 응원하듯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심히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을 보며 그들 역시 우리의 축제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TV에서 그간 온갖 설움과 핍박을 받으면서 잘난 한국사회의 밑바닥을 헤매고 다닌 조선족 동포들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조차 우리와 함께 목이 쉬도록 응원하는 것을 보고 목이 다 메었다. 어느 아프리카인이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친절해져서 좋다고 이야기할 때 부끄러움과 다행스러움을 함께 느꼈다. 그리고 8강 진출 이후 일본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선망과 성원, 베트남·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민중들이 보내는 성원과 격려와 기대 역시 예사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계 스포츠사상 유례가 없을 역동적인 축제가 기껏 국가주의적 광기의 발현에 그치고 한갓 민족적 우월감의 과시로 전락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는 그간 우리가 보여온 과도한 배타성과 국가주의가 우리 스스로 워낙 마음의 정처가 없던 데서 오는 일종의 선병질이자 짜증 같은 것이라 본다. 만일 이 한달 동안에 걸친 카니발이 우리에게 공동체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비로소 강퍅한 마음의 빗장을 풀고 세계인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편적 인류로서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명인/ 문학평론가, 계간 <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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